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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환관 김처선은 어디 있는가?

  요새 환관 김처선은 어디 있는가?

 

진나라의 환관 조고는 진시황이 순행 중 급서하자 황제의 칙서를 위조해 얼간이 막내아들 호해(2)를 황제에 옹립하여 국정을 농단한다. 그는 황제에게

폐하는 아직 어려서 대신들과 정사를 논하면 폐하의 단점만 들어날 터이니 모든 건 저한테 맡기십시오.”라고 간신질하며 진2세를 구중궁궐에 침거토록 한 채 모든 국사를 전횡했다.

십상시 환관의 손아귀에서 등극한 후한의 마지막 황제 영제는 그들의 놀이개였다.

12살에 등극한 영제는 십상시의 우두머리인 장양(張讓)과 조충(趙忠)을 부르기를 장상은 나의 아버지요 조충은 나의 어머니라고 칭송했다.

고려 의종 때의 환관 정함이 득세를 했다. 의종이 정사를 게을리 하고, 대신들을 멀리하자 정함이 문신 김존중와 결탁해 매관매직을 일삼아 호화생활을 했다. 정함은 대궐 30보 안에 2000간의 집과 누각을 짓고 국사를 농단했다.

정함과 같은 환관의 농단 탓에 정중부의 난이 났다라고 고려사절요엔 기록됐다. 반면 충신 환관도 있다.

이조 때의 김처선은 성종의 총애를 받은 충신환관으로 정2품 자헌대부(판서)에까지 벼슬이 올랐다. 환관의 최고위직은 종2품 이였다.

그런 그가 성종의 후임인 연산군이 무오(1498)갑자(1504)사화를 일으켜 조정이 쑥대밭이 되고 나중엔 음란행위까지 하므로 여러 번 충심으로 간언을 올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연산은 그가 못마땅하고 이내 짜증과 노여움까지 생겼다. 150441일에 궁중에서 처용놀이가 펼쳐지고 있었다. 음탕한 놀이를 즐기던 연산이 김처선이 들자 술 한 잔을 따라줬다. 술잔을 비운 김처선이 술김을 빌려 임금께 독설 같은 충언을 아뢴다.

늙은 놈이 네 분 임금을 섬겼지만 고금에 전하와 같은 짓을 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연산이 크게 노하여 활을 들고 처선을 향해 화살을 당겼다. 화살이 처선의 가슴팍에 꽂혔다. 처선이 굴하지 않고 다시 아뢴다.

조정의 대신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늙은 내시가 어찌 감히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전하께서 오래도록 보위에 계시지 못할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라고 처선이 연산이 거푸 쏘는 화살을 맞으며 할 말을 다 쏟았다.

연산이 일어나 자리를 털고서 땅에 꼬꾸라진 처선의 다리를 끊어놓으며

어디 일어나서 다녀봐라라고 침을 뱉었다.

전하께선 다리가 부러져도 다닐 수가 있습니까?”라고 끝까지 대꾸하자 연산은 처선의 혀를 자르고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냈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린 연산은 처선의 시신을 호랑이에게 던져주면서 광기 섞인 극언을 내뱉었다.

간사한 내시 김처선이 임금을 꾸짖었으니 이런 죄는 개벽이래 없었다. 어찌 천지사이에 용납하랴!” 라고 <연산일기1504.4.1>에 기록돼 있다.

나아가서 연산은 조정과 민간에서 처()자를 입 밖에 내지도 말라고 하명하고, 그해 과거시험 답안지에 자를 썼던 유생 권벌의 합격을 취소시키기도 했다. 권 벌은 3년 후에 다시 응시 합격했다.

처선의 집을 헐고 연못을 파서 그의 죄명을 돌에 새겨 그 웅덩이에 묻으라고 연산은 명했다. 또한 처선의 양자였던 이공사(환관)도 죽이고, 7촌까지 죄인으로 낙인찍혔으며, 부모의 묘도 부관참시 했다. 김처선이란 이름도 모두 개명토록 명했음은 자명했다.

충신환관 김처선은 그 후 250년이 흐른 1751년 영조27년에 그를 기리는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영조는 말 한다.

충성한 사람을 위해 정려문을 세우는 것은 세상을 권면하는 큰 정사다. 사람이 비록 미천하다 하더라도 없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요즘 세간에 십상시란 말이 회자된다. 실재 문고리권력이 있는지? 없는 것인지?를 따지기 전에 그런 말이 떠돌게 된 자체가 청기와집의 허물일 테다.

참으로 우릴 슬프게 하는 건 십상시소문이 낭창해도 누구하나 그곳을 향해 고언을 뱉는 김처선 같은 분이 여당에 안 보인다는 게다. 십상시가 무서워서일까.

2014. 12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를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