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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만추 속을 걷다 (안산- 내장산- 벽골재)

만추 속을 걷다 (안산 - 청계등축재 - 내장산 - 벽골제)

 

살다보면 무작정 떠나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하는 일이 잘 안될 때도 그렇고, 잔뜩 기대했던 게 허망하게 끝날 때도 그러며, 내 스스로의 내면의 빈자리를 채울 수 없다고 체념한다거나, 사랑하는 사람한테 이유 같잖은 이유로 상처받았을 때도 어딘가로 훌쩍 가고 싶습니다.

 뭔가 내 마음을 채울 수 없는, 공허한 심정을 위무 받고픈 한 가닥 희망이 결국 성에 차질 않아서, 치유의 방법을 몰라 낯익은 주위에서 낯선 곳으로 숨고 싶어지는 거지요.

 

미지의 땅에선 뭔가 새로운 계기가 숨통을 틔우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심리가 높다는 게 소이라면 소이가 아닐까요. 허나 난 훌훌 떠나질 못하고 집 밖을 나서다보니 안산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봉원사 생각이 났습니다. 불자도 아닌 주제에 문득 발걸음을 그리로 옮긴 것은 우선 집에서 가깝다는 점과 도심에서 산사의 고즈넉한 정취에 들어 치유의 가닥을 잡을 수가 있을까 싶어서였지요 

 

안산을 곱게 물들었던 가을이 자락길을 배회하다가 산사로 내려왔지 싶었습니다. 아직도 타다 남은 불꽃이 칠성각주위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한 여인의 간절한 기도가 칠성각의 만추를 붙들고 있는가 싶기도 했구요.

착잡한 나는 왜 저 여인처럼 기도하려는 마음이 동하지 않을까요? 마음이 더 무거워졌습니다.  산사를 빠져나와 다시 숲길을 걷습니다.

-봉원사 삼천불전-

잔뜩 흐린 탓인지 땅거미는 기척도 없이 성큼 저녁하늘을 펼치네요. 서대문을 건너 정동 뒷길을 타다 덕수궁돌담길을 휘돌곤 시청 앞에 닿았을 땐 빛의 축제가 도심을 요지경으로 둔갑시켰습니다.

허접한 마음을 얼싸덜싸 빛과 인파의 도가니 속에 묻혀보고 싶었지요.    빛의 축제 - 등불축제는 밤의 청계광장을 은하의 계곡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근데 은은하고 밝은 은하의 밤하늘에 나를 드밀어 봤지만 마음은 더 싱숭생숭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휩싸입니다.

-은하다리-

발디딜 틈새가 없는 인파와 아우성과 또한 프레스센타 옆에선 시위대의 구호까지 뒤엉켜 난장판도 이런 개판이 없을 듯싶었습니다.

석유 한 방울 안 나오는 나라에서, 달동네 독거노인네들은 연탄 한 장을 아끼려 냉방에서 오돌오돌 겨울을 나는데, 청계천개울바닥에다 흥청망청 전구로 도배를 해도 위정자들의 양심엔 털도 안 납니다.

-은하계 속-

네온사인만으로도 훤한 도심에 전등불로 은하계를 만들어 전력난에 불을 붙여야 시민들을 위한 정치고, 나라의 위상을 드높이는 선정이고, 관광객들을 유치할 수가 있는지?

설사 그렇다한들 추위에 떠는 가난한 백성과 전력난 운운하며 절전정책보다, 우선순위로 집행해야 하는 사치스런 눈요긴지 멍청한 나는 헷갈립니다.

속 좁은 나는 여기도 내가 힐링 할 장소는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배알이만 꼴려 빠져 나왔습니다. 서울은 살 만한 곳인가 봅니다. 시가지를 돈으로 처발라 놓았으니 눈요기 만으로도 배부를 것 같아 보입니다.

-은하의 정원-

시덥잖게 돈 몇 푼 가지고 시비하다 말다툼으로 비약, 아내는 토라져 삐져 입이 닷 자나 나오고,  나는 뒤통수에 오기만 가득 담아 못된 송아지처럼 씩씩대며 집 나선 오후였는데, 결국 갈 데가 없어 아내 눈치 살피며 침실로 기어들었습니다.

내가 갈 데가 이렇게도 없는가? 후련하게 속 씻을 만한 곳이, 아님 누구라도 붙잡고 이빨이라도 깔 상대가 없단 말인가? 로 뒤척거리다가 낼 아침엔 정말 먼 곳으로 떠나보자고 다짐을 했습니다.

-인정전 앞의 궁중악단-

아침에 아내가 암 소리 없이 차려주는 밥을 꾸역꾸역 처넣은 나는 배낭 하나 짊어지고 용산역을 향합니다. 아내가 별 갖잖다는 투로 어디 가는 데?” 라고 물어도 한일자로 입 다물고 집을 나섰지요.

이번만큼은 내가 잘못 한 게 없으니 꼬리 내리기 싫다는 알량한 자존심에다 핑계 걸어 만추 속으로 훌훌 떠나보고 싶었던 거지요.

설거지 대충 끝낸 산야가 완행열자에 휙휙 달려드는 황량한 풍광들을 피하며 정읍역에 내렸습니다.

-감나무 홍시트리-

내장산을, 천지가 온통 불꽃이라는 내장산단풍을 몇 번 가 보긴 했지만, 만추의 풍광을 본 기억이 없어 그게 궁금하기도 하고, 여차하면 익산집으로 가서 코 드르렁 골아도 눈치 할 사람 없어 자연스럽게 잡은 여정인 거지요.

내장저수지를 끼고 달리는 차창엔 누런 이파리 몇 잎씩을 단 나목들이 만추가 버겁다는 듯 늘어져 있는데 남향받이 골엔 핏빛단풍이 횃불처럼 군데군데 타고 있네요.

-호반의 우화정-

단풍나무도 디엔에이 내림 탓이고 환경 땜인지 각자 따로 노는 놈이 좀 많아요. 나처럼 혼자 놀기를 즐기는 괴팍한 놈이 있단 게 좀은 위안이 됩니다. 내장산경내에 들어섰습니다.

골짝을 빨갛게 문질러버렸던 색깔들은 어디로 다 사라지고, 그 오합지졸난장 단풍객들도 어디로 다 빠졌는지요.  바람도 없는데 개울가 마른풀이 흔들리고, 휑뚫린 골짝을 정처 잃은 갈색낙엽만 발길에 채입니다.

살아있는 건 흐르는 물소리입니다. 근데 만추를 까먹고 년말을 장식하려는 철딱서니 없는 나무가 도처에 내 시선을 붙잡습니다.

산사에 무슨 얼어 죽을 성탄트리를 만들겠다고 감나무는 빨간 등을 우수수 달고 눈치도 없이 서있데요.

무소유의 삶이 스님의 마음인지라 홍시는 산짐승들의 겨울식량으로 매달아놓았을 겁니다. 암튼 보기 좋은 군목일홍(群木一紅)입니다.

만추만이 선사하는, 산사에서나 가능한 엽서같은 삽화지요. 공기가 싸해도새들이 신이 나서 나목사이를 폴짝폴짝 날아다니는 사연을 알 것 같습니다.

 

-삼백 살의 모과나무-

기분이 한결 좋아졌습니다. 마음이 심난 할 땐 깊고 한적한 산이 좋습니다. 맘이 평온해 집니다. 바위를 씻고 돌을 굴리며 이끼를 다듬는 물길의 소곤거림이 힐링의 세레나데일 것 같습니다.

원적암골 산책길은 물소리와 새소리만의 힐링로드였습니다.

원적암 오르는 길목의 삼백 살이 넘은 모과나무는 우리가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지를 가늠해보게 합니다. 그가 봄,여름,가을에 내뿜어주는 산소는 얼마나 많은 동물들을 숨 쉬게 하며, 그 지칠 줄 모르는 보시를 앞으로도 몇 백 년을 아무 조건 없이 할 테니 말입니다.

-비자나무 숲-

식물 잎 뒷면에는 약 100만 개의 공기구멍이 있어 이를 통해 사람과 동물의 호흡에 절대 필요한 산소를 내뿜는다고 합니다. 이들 식물의 탄소동화작용이 없으면 지구상의 어떤 생명체도 존재 할 수가 없겠지요.

삼백년의 풍상 그대로 울통불통한 모과나무 그림자가 사라지면 그와 나이가 비슷할 비자나무군락지가 있는데, 나는 나무데크에 앉아 늦은 점심을 했습니다.

-겨우살이-

육포와 다이제시티브가 전부인 내게 박새와 청솔모가 온갖 아양(?)을 떨며 퍼포먼스를 떠는데, 부스러기라도 줘야할지 말아야할지 녀석들 탓에 난 갈등의 점심시간이 됐습니다.

비자나무숲은 독특한 짙은 향을 내뿜습니다. 은행알 같은 비자나무열매는 쌉싸름한 약과로 맛 본지 꽤 오래지만 그 식감과 향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겨우살이 꽃 핀 참나무 숲길-

벽련암 가는 숲길은 낙엽이 두툼하게 깔려 낙엽밟는 소리가 구르몽의 시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 낙엽소리에 귀 기우리며 명년을 위해 깨 벗고 인고의 겨울 날 채비를 하는 나목들을 처다봅니다. 경건하기까지 합니다.

파란사금파리하늘을 멋대로 금그어버린 나목들은 새집 아닌 겨우살이셋방을 그림처럼 달고 있었습니다.  기생식물인 놈도 광합성으로 영양소를 만들어 보충한답니다.

 

식물이 땅을 외면하고 허공에 정착하여 딴 나무에 기생하며 살아간다는 끈질긴 투지는 자연의 신비고 생명의 영묘(靈妙)함입니다.

더구나 이놈들은 꽃을 피우고 새나 짐승들에게 제 살점을 제공하여 똥이 되고, 새들이 딴 나무에 그 똥을 싸서 번식을 한다니 생존의 비밀은 경이 그 자체인 것이지요.

살아있다는 게,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신령스런 과정인지를 읽다보면 흘려버려도 될 아내의 말을 말꼬리 잡아 늘어져 티격태격한 옹졸한 나의 삶이 부끄러운 게지요.

허나 꼬리 내리기 싫으니 나는 참으로 치졸한 놈입니다. 이젠 왠만큼은 타성이 된 듯싶구요. 

저만치서, 이 한적한 낙엽길을 밟는 두 여인이 한 폭의 그림같아 뒤에서 몰카에 담았습니다. 멀리선 학생인줄 알았는데 만나보니 모녀간 이였습니다.

-귀목낙엽길 만추를 만끽하는 모녀-

결혼을 앞둔 딸 손을 잡고 그동안 바쁜 일상 탓에 놓쳤던 오붓한 시간 만들기 위해 나선 살뜰한 산보였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만추 속의 모녀였던지 나는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또 보곤 했댔습니다.

바쁜 일과 후엔 바보상자 티브이가 가족의 유대시간을 갉아먹기 일쑵니다. 티브이가 죄인이 아니라 불륜 조장하는 연속극과 떼거리로 연예인 모아놓고 말장난시키는 방송국이 죽일 놈인 게지요.

전력낭비에다가 시덥잖은 말공해로 인성을 갉아먹습니다. 법정스님은 자신의 주옥 같았던 말씀도 행여 누군가에게 누가 될까 싶어 책도 더 이상 만들지 말라고 절판을 유언하셨습니다.

깨 벗은 나목만 쭉쭉 뻗은 참나무숲에 초록산죽이 이때다 싶어 햇볕 씹어대느라 비까비까 광발 내고 있습니다. 누구에겐 배고픈 겨울이 다른 누구에겐 포식의 계절인지도 모릅니다.

-갈 햇살 맞는 산죽-

백련암에 들어섭니다. 애초엔 내장사였다가 백련암으로 다시 벽련암으로 개칭 됐는데, 추사가 여기서 수도를 하면서 벽련암으로 개칭, 서액을 써서 달았다는데 6.25때 소실 됐답니다.

그 벽련암 석축은 희묵대사가 바로 위 서래봉에서 돌을 던지면 수재자 희천이 그 돌을 받아 쌓았다고 합니다. 명승지의 고찰이 이만한 에피소드가 없으면 품격에 하자가 붙나봅니다.

 

-벽련암댕웅전과 서래봉-

일주문을 향합니다.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숲은 내 스스로 깨닫지 못한 가운데 모진 심사를 삭혀냅니다. 단풍나무 몇 그루가 기울어가는 산골의 햇살을 받아 훨훨 타고 있습니다.

일주문 밖 우화정 검푸른 소에 앙상한 만추가 녹아들어 흔들리고있습니다. 만추는 화려하지 않은 채 단순하고,  묵직하고 담백한 정감이 마음을 평정하기 좋은 때 같습니다.

-만추의 하늘을 수 놓은 비행선-

깊은 가을엔 홀로 서 볼 일입니다. 모든 푸나무가 깨 벗고 짐 내려놓은 호젓한 낙엽길을 밟아볼 일입니다. 낙엽밟는 소리에 귀 기우리다 보면 나도 낙엽을 털어내야 하는가 싶기도 합니다.

일 년간 낀 마음의 때를 떨어내는 일말입니다왠만큼 가벼워진 마음으로 벽골재를 지나다가 들판에 용 두 마리가 여의주를 물고 기 싸움을 하기에 구경 가봤습니다.

 

오래 전, 백성들을 동원하다시피 하여 조성한 거대한 방조재는 기름진 호남평야에 젖줄을 대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 기름진 옥토 일부가 관광단지로 변신했지요.

선현들이 보면 미친 짓도 한참 미친 짓인 게지요. 그곳에 관광단지를 만들어 빚만 눈덩이처럼 불어나니 말입니다.

농사가 아무리 채산성 없다 쳐도 산도 아닌 절대옥토를 놀이터로 만들어 세금만 쏟아 붓는 일이 잘 한 짓은 아닐 테니 말입니다. 지자체장들 하는 짓 눈 부릅뜨고 지켜봤다 투표로 혼쭐내야 하는데 말입니다.

 

수십만 평 될 옥토에 며칠간의 축제를 위한 집과 구조물들이 마치 전쟁으로 소개 된 듯 황당합니다.

벽골재 둔치에 서면 가물가물한 지평선이 우주 한 가운데에 내가 존재함을 실감케 합니다. 나란 존재의 가치를 되씹는 계기가 되지요. 무한대의 시공 속에서 심호흡을 절로 하게 됩니다.

 

-벽골재둔치에서 본 저수로-

내가 소중하면 아내가 그렇고, 식구가 그렇고, 이웃이 그렇고, 귀중하지 않는 게 없지요. 생명 있는 것 모두가 나와 똑 같단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호밀 한 포기엔 1300만 개의 잔뿌리와 140억 개의 실뿌리가 있고, 잔뿌리를 모두 이으면 서울서 부산을 갔다가 대전까지 올 수 있는 길이며, 실뿌릴 전부 이으면 16km로 남극과 북극을 이을 수가 있다고 김선우시인이 말하데요.

 

이 뿌리들은 흙에서 기초영양소를 만들고, 잎은 그 영양소를 받아 탄소동화작용을 하여 산소를 내뿜는다. 고 말입니다.

호밀 한 포기의 뿌리가 땅속 7m 넘게 뻗으며 자신의 완성을 위해 부단히 진화해 가는 노력이 지구환경을 살리는 힘이 되고 있는 것처럼 생명은 어쩜 혼이랍니다.

-벽골재 못-

사람의 세포도 60조 개로 이루어져 있으니 60조 개의 혼을 짊어진 엄숙한 생명인 것 이랍니다.

이틀간의 만추나들이 속에서  생명의, 삶의 무거움을 체감하는 여정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2014. 11. 27

 

  -내장사 우화정-

-봉원사경내-

벽련암 못과 백조-

-단풍나무와 귀목의 연지목-

-내장사입구의 레드카펫-

-먼 발치에서 본 서래봉-

 

-우화호반-

-서래봉-

-내장저수지-

-내장사-

-벽골재 용싸움-

-벽골재둔치 갑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