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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고자[宦官]의 고자질과 국왕시해(國王弑害)

고자[宦官]의 고자질과 국왕시해(國王弑害)

 

                                         -고려사 홍륜편-

전왕자는 12세 때(1342) 원나라에 불모로 잡혀가 10년간 머물다가 귀국, 충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니 공민왕이다. 귀국 전, 왕자는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와의 강제혼사를 추진하는 원나라를 향해

내 나라에서 살지 못하는 것도 원통한 일인데 혼사까지 원나라공주와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불복했지만 끝내 정략결혼을 해야만 했다.

강제결혼은 공민왕의 냉대로 죄 없는 노국공주만 맘 아프게, 이국의 밤을 더욱 스산하고 울적하게 하였다.

왕은 몽골식변발과 호복을 철패하며 친원파를 제거하고 북진정책을 펴 국토회복을 획책한다. 해도 공주는 내색 않고 왕비의 길에 헌신한다. 왕은 신진인사를 채용 왕권을 튼실하게 하며 개혁정책을 펴며 반원 자주정통을 추구 고려의 중흥을 꾀하며 원과 대치한다. 이에 공주는 왕께 아뢴다.

비록 몽골여자이긴 하나 저는 이미 고려인입니다. 고려의 풍습과 전하의 큰 뜻에 따라야함은 당연합니다. 고려를 반석위에 세우시는 일이 전하의 천명이십니다. 전하의 선정으로 나라의 기반이 튼실해가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있겠습니까. 다만 저의 지혜와 덕이 부족하여 전하께 큰 힘이 되지 못함이 늘 송구스럽습니다.”

공주의 말을 듣고 있던 왕은 감동하여 마음을 열고 공주를 뜨겁게 포옹했다. 이후 왕과 비의 금실은 끔찍이 돈독해져 학수고대하던 임신에 이르게 된다.

왕은 개혁의 고삐를 늦출 수 없었고, 첨예한 몽골과의 분쟁을 견제해야 했으며, 설상가상으로 홍건적의 난을 막아냈지만 136110월 홍건적의 2차 침입을 받아 개경이 함락될 변란에 안동으로 몽진을 가야했다.

왕비와 차비이씨(次妃李氏, 노국공주가 애가 없어 이재현의 딸을 비로 맞음),모후 명덕태후와 28명의 신하들을 대동한 초라한 행차였다.

 

                    -공민왕이 그린 천산대렵도-

원나라가 명나라로 바뀌는 혼란기를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고려의 중흥에 진력하던 왕은 1365년 오매불망하던 왕비가 해산하다 절명하는 비통에 빠진다.

왕비의 죽음에 실의한 왕은 신돈에게 개혁을 맡겼지만 여의치 않자 1371년 그를 귀양 보냈다 사사(賜死)시켰다. 왕은 1372년엔 공신 및 고위직 자제들 중 미청년들을 선발하여 자제위를 설치하여 비빈(妃嬪)들과 무분별한 간통을 조장하여 후대(後代)를 도모하려 했다.

어느 날 환관,최만생((宦官,崔萬生)이 왕을 모시고 변소엘 가서 기고만장해 아뢴다.

전하, 신이 익비(益妃)전에 익비께서 임신한 지 5개월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은밀히 보고하자 왕은 깜짝 놀라고 반가워,

내가 후사가 없어 영전(影殿)을 부탁할 데가 없는 것을 늘 염려했는데 비가 임신했다니 이제 걱정이 없다라고 기뻐했다.

그리곤 뭔가 집히는 데가 있었던지 왕은 되묻는다.

혹시 누구와 관계했는지 들었느냐?”. 최만생이 머뭇거리다 아뢴다.

익비께서 홍륜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왕은 잠시 뜸들이다가,

내일 창릉(昌陵)을 참배하러가서 일부러 주정을 부리며 홍륜 무리를 죽여 입을 막겠다. 너도 이 계획을 알았으니 또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최만생은 섬뜩한 생각에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겁이 난 최만생이 자제위로 달려가 홍륜·한안·권진·홍관·노선에게 왕의 계획을 고자질하고 역린을 모의했다.

그들은 이날 밤 3경에 침전에 들어가서는 왕이 대취한 틈을 타 최만생이 칼로 치니 뇌수가 벽에 뿌려졌으며 이어 권진·홍관·노선·한안 등이 왕을 난자했다.

환관 이강달(李剛達)이 먼저 침전에 들어가 온 방이 피투성이가 된 것을 보고는 임금이 편찮다고 거짓말하고 문을 닫아걸어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새벽에 태후가 와서 왕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게 하고 백관들도 평소처럼 시위하도록 했다. 이강달은 왕명을 내세우며 경복흥(慶復興)이인임(李仁任)안사기(安師琦) 등을 불러 역적의 토벌을 비밀리에 논의했다.

백관들이 큰 거리에 모여 홍륜과 최만생을 거열형(車裂刑)에 처하고, 한안·권진·홍관·노선 및 그들의 아들을 참수형에 처해 목을 전시했으며 가산을 몰수하고 처첩들은 모두 관비(官婢)로 삼았다.

한방신·노진·권용·홍사우·홍사보는 장형에 처한 후 먼 고을로 유배보냈으며 친숙질과 종형제들도 모두 장형에 처하고 유배보냈다.

고자가 왕의 거사를 신하들에게 고자질하여 역모를 꾀하고 손수 왕을 시해한 사건은 세계사에 전무후무한 비극이겠다.

공민왕은 그림에 뛰어나고 글씨도 뛰어난 명필로 회자된 지혜로운 왕 이였다.

노국공주의 사랑을 잃은 공민왕은 실의에 빠져 나약해지고 따라서 고려의 운명도 급격하게 쇠락의 길로 빠져들었다.

여자의 사랑은 위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