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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프리섹스궁중에 대물로 고민한 지증왕

프리섹스 신라궁중에 대물(大物)로 고민한 지증왕

 

                   -안압지출토 목재남근-

6세기 신라 상류층의 성문화는 프리섹스가 만연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남녀가 눈 맞아 서로 통정하는 건 큰 허물이 아니었으며 자연 결혼풍습도 동성(同姓)간은 물론, 형제의 자식이나 고종`이종의 자매까지도 혼인을 했다고 <국사기 내물왕 즉위조>에 기록돼 있다.

다른 역사서 <삼국유사 문무왕 범민조>엔 문무왕은 이복동생 차득공을 암행어사로 파견하여 지방 관리들의 청렴도를 살피게 했다.

차득공이 승복(僧服)으로 변장을 하고 무진주에 들어섰다. 무진주 관리 안길이 차득공이 범상한 인물이 아니란 걸 눈치 채고 자기 첩 3명을 불러 묘책을 논한다.

 “너희들 중에 오늘밤 저기 승복의 거사(居士)를 치마폭으로 녹이는 자에겐 나와 죽을 때까지 해로할 것이다라고 명을 내렸다.

 첩 둘은 서방님 아닌 자와 어찌 잠자릴 펴겠냐고 했으나, 얼짱첩은 서방님 명령에 따르고 해로하겠다고 나섰다고 기록 돼 있다.

명리나 출세를 위해선 때론 아내도 성상납 했던 프리섹스관념이 통용 됐던 신라문화였다. 옛날 에스키모들이 귀한 손님이 오면 아내를 빌려줘 대접했던 성문화를 떠올리게 한다.

썰매나 개를 빌려주면 닳고 지처서 오지만 아내를 빌려주면 새것으로 되돌아온다.”는 에스키모들의 노래도 살아가기 위한 통정이었을 테다.

뭇 남성들과의 통정은 아내가 교태와 방중술에 도통해 오니 섹스가 더 즐거울 수 있었다고 신라남성들은 여겼던 걸까?

 

                         -신라시대 토우-

프리섹스가 만연한 신라 상류사회에, 그것도 왕이 맘대로 섹스를 할 수 없어 달밤에 한숨만 푸푸 뱉는 이변이 있었다.

지철로왕(지증왕)은 음경이 15(40cm)나 돼 상대할 여자가 없었다. 어쩌다 멋모르고 왕의 침소에 든 여자는 상처뿐인 영광을 안고 나자빠진 통에 어느 궁녀가 지증왕의 대물을 상대하려 했겠는가?

고민하던 왕은 사자(使者)를 전국에 파견하여 신부모집에 나서게 했다. 사자가 묘랑부 동노수 밑에 이르니 웬 개 두 마리가 북()만큼 큰 똥 덩어리 양끝을 물고 늘어져 실랑일 벌리고 있는지라 사자가 주민에게 하문한다.

저렇게 큰 똥을 싼 자가 누구냐?”. 그곳 촌부가 대답했다.

묘랑부 상공의 딸이 빨래하다가 뽕밭에 숨어들어 싼 똥이다라고.

사자는 얼씨구나 냉큼 그 집을 찾아가 상공의 여식을 보니 키가 75촌이나 되는 거녀(巨女). 즉시 지증왕께 전갈을 상신하자 왕은 수레를 보내 처녀를 데려오게 하여 황후로 맞았다.

항문이 크면 옥문도 크고 깊은 걸까암튼 똥구멍커서 황후 된 역사는 지구상에 전무후무한 상공의 딸이 차지한 기네스북감이라.

경덕왕의 옥경도 길이가 8(20cm)나 됐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으니, 만약 그 물건이 성질이 날대로 났다면 그놈의 크기를 상상을 절하게 된다. 홍두깨란 말이 괜히 생긴 말은 아님이다.

 

                      -신라시대의 목재남근, 귀두에 옹이를 살려 돌기가 있음은 부인들의 내실 자위용임을 의미한다 -

<삼국유사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機三事)>엔 성(性)이 병법에도 응용 됐음을 기록하고 있다.

영묘사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인데도 개구리들이 많이 모여 사나흘 간 울어댄 적이 있었다. 왕은 급히 정병 2천명을 뽑아 서교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이 어딘지를 찾아가 숨어있는 적병을 몰살시키라고 명했다.

두 각간이 왕명을 받아 여근곡을 찾아내 거기 숨어있던 백제군 500명을 일망타진 했다고 했다. 이때 신하들이 선덕왕께 여근곡에 백제군이 있는 줄 어떻게 알았느냐?” 묻자 왕이 답했다.

개구리가 성난 모습은 군사의 형상이요, 옥문은 여자의 음부라. 음부의 빛은 희니 흰빛은 곧 서쪽방위라. 하여 적군이 서쪽에 있다는 걸 알았느니라.  또한 남자의 생식기는 여자의 생식기에 들어가면 곧장 죽는 것이니 적병을 쉽게 처치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신라의 성문화는 분방하게 일상화 됐었다. 프리섹스의 절정을 구가한 미실(549~606)의 남성편력은 벌린 입을 닫지 못하게 한다.  김대문의 <화랑세기>기록에 의하면,

미실은 진흥왕과 아들 동륜태자를 꼬셔 고쟁이 속에 가두고, 왕의 두 동생 미생랑과 설화랑을 성 노리개감으로 사육시켜 즐긴다.

앞서 미실은 사다함과 연애질하다가 세종과 결혼하였으나 지소태후의 눈 밖에 나 쫓겨나자 다시 사다함과 붙었다. 옛 연인인 남녀는 불나게 살 태우다가 사다함이 가야국정벌에 나가고 세종이 애원하자 유턴하여 세종을 가랑이 속에 가둔다.

전쟁에 나갔던 사다함이 개선했을 땐 그녀는 세종을 가랑이 속에 넣고 불꽃을 튀기는 지라 사다함은 상사병으로 죽는다.  미실은 진흥왕에 이어 진지왕, 진평왕까지 3대왕을 넘나들며 프리섹스를 즐기니 신라사회 성문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킨 요부였지 싶다.

신라의 고분(古墳)에서는 많은 목재남근이나 성행위토우들이 발견되곤 했는데 이는 곧 신라의 개방된 성문화의 일단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삼 국 중 가장 왜소했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 건 프리섹스 같은 자유분방한 사고의 유연성도 한 몫 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해본다.

2014. 10. 01

* 위 글은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를 읽고 발췌함

 

                             -신라시대의 토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