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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탑골공원에서 실버들의 유토피아를~?

탑골공원에서 실버들의 유토피아를 그려보다

 

종로3가에 있는 탑골공원은 탑동공원(塔洞公園파고다공원이라고도 하였는데 191931일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을 낭독된 장소였다.

 

 

아침부터 공원에는 45,000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는데 정오를 알리는 오포(午砲) 소리가 울리자 학생 정재용(鄭在鎔)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동시에 학생들이 태극기를 꺼내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대한문으로 향하니 수많은 군중이 합세하여 3.1독립운동의 발단이 된 곳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  처음 탑골공원을 사진으로 보며서울얘기를 들었었다.  그 사진이 선친께서 40대초에(1930년대 후반으로 추정된다) 상경하여 탑골공원 내 원각사지십층탑 앞에서 찍으신 기념사진 이였던 것이다.

사진은 액자에 넣어진 채 벽에 걸려있었고 지금은 나의 가족 앨범에 철해있다.

 그 후 서울생활할 때 탐방할 기횐 있었으나 왠지 관심 밖이었다.

금년에 싱가폴 사는 외손자 윤이가 잠시 귀국하여 머물 때에 와이엠시에이건물에 있는 이비인후과를 데리고 다니면서 탑골공원 앞을 지나칠 땐 꼭 한 번쯤 탐방 하자고 맘 막었던 거였다

선친의 사진 속 원각사지십층탑을 보고팠던 것이다.

추석 사흘 전, 종로에 볼일이 있어 공원을 찾았는데 서문(동서남북에 문이 있단 걸 첨으로 알았다)으로 들어섰다.

공원은 꾀나 오래된 나무들과 유서 깊은 건물들이 어울려 깨끗하고 고색창연한 기품을 발하고 있었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팔각정, 원각사비와 독립운동부조, 손병희동상, 원각사지십층석탑 등이 도심 한가운데서 엄숙한 역사의 장을 펼치고 있었다.

 

실버들이 삼삼오오 공원쉼터에서 세월을 붙잡고 있을까? 싶게 청명한 오후의 햇살은 느릿느릿 그림자를 드리우는데, 외국인 관광객이 심심찮게 찾아들었다.

난 선친께서 기념촬영 했던 원각사지십층석탑을 찾았는데 유리보호막 안에 있어 아쉬웠다.

 

(빛바랜 사진에)조경수 한 그루도 없이 휑하니 서있던 원각사지십층석탑 앞의 선친모습을 상기하고 싶어도 감이 잡히질 않았다.

더구나 유리막속의 탑은 햇볕의 반사로 실체마저 뚜렷하게 관찰할 수 없어 7~80여 년 전의 사진속의 탑인가? 싶었던 것이다.

 

한참동안 선친의 행적을 상상해 보며 두 번 공원을 돌아봤다. 많은 조경수 중에서 200살 이상 먹은 낙우송이 군데군데 자리했는데 단연 압권이었다

남문인 삼일문현판은 고 박정희대통령글씨란다. 삼일문을 나와 공원담장을 끼고 한 바퀴 돌았다.

 

 

낙원동쪽 공원담벼락을 끼고도는 상가와 골목은 실버천국을 이뤘다.

수많은 실버들이 그늘에 앉아 따가운 햇살을 피하는가 싶고, 장기판이나 바둑판 주위엔 빙 둘러선 실버들의 모습이 이곳에 익숙치 않은 내겐 더 볼거리가 됐다.

어떤 분들은 아직 한낮인데도 노천태이블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

 

몇 푼어치나 될까싶은 중고옷가지와 소지품을 늘어놓고 흥정하는 실버들의 실랑이도 들을 만했다.

노천테이블에서 막걸리로 목을 축이는 통닭안주는 6천원을 넘지 않고,  2천원짜리 국수, 이발3.500원에 염색5000원이 공정가가 된 이발관이 줄줄이 들어선 골목엔 비싼 먹거리도 5~6천원을 넘지 않았다.

극장료2000원을 받는 실버극장(옛 허리우드극장)과 저렴한 상권은 탑골공원일대가 실버들의 천국임을 자랑한다.

 

실버들이 마땅히 갈 곳이 부족한 서울도심에 무료전철로 공원에 오면 또래의 친구들과 소통을 하며 가난한 호주머니로 하루를 멋있게 보낼 수 있는 유토피아가 여기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봤다.

늘어나는 실버들을 위해 지자첸 앞으로 심도 있는 정책을 펴서 탑골공원 같은 장소가 곳곳마다 들어서야 함이다.

 

단체장들이 지 낯내려고 거창한 프로젝트를 입안착공하려 안달인데 후손에게 빚만 떠안기는 졸속행정인지 숙고하여, 일정의 예산을 실버들의 소통의 장소 만들기에 우선해야 함일 것이다.

탑골공원이 좀 더 규모가 컸음 얼마나 좋았을까뉴욕의 센트럴파크 처럼 말이다. 고려때 여기에 흥복사란 절이 있었는데 1464년 세조가 원각사(圓覺寺)로 개명하고, 근처의 가옥 200여 호를 철거 3년 여간 대대적인 중창을 하여 도성 안에 제일 큰 가람으로 만들었다.

 

구리 5만근을 모아 대종과 진신사리를 봉안한 10층탑을 만들었다는데 그대로 보전 했담 지금 서울도심에 훌륭한 공원으로 남아있을 테다.

 하지만 배불정책에 올인 했던 연산군은 원각사를 장악원(掌樂院)으로 만들어 전국에서 뽑은 1000명의 기생과 악사들이 기거하는 기생방으로, 일부는 한성부청사로 사용케 하다가, 중종 땐 아예 건물들은 헐어서 공용건물을 짓도록 했다

하여 선친께서 찍은 사진이 왜 원각사지십층석탑만 휑하니 남아있었던 건가? 를 짐작 하게 한다.

 

천만년 복 받을 나라를 만들어 가는 핵심은 어진 성군(聖君)이 나와야 하고, 민심에 올인 하려는 지자체장이 선출되어야 한다. 나라 곳간 털고 빚 왕창 내어 전시성사업은 누군들 못하랴후손들한테 빚만 떠안긴 지도자로 오명을 날릴테다. 

공원 뒤에서 호주머니 털어 (허리우드)실버극장 운영하는 삼십대의 여사장이 진정한 애국자이고, 억척스레 돈 벌어 사회에 환원하고 더는 명보실버극장을 운영하며 실버들에 공헌하는 배우 신영균씨가 참 사업가란 생각이 새삼 드는 오늘이었다.

 

공원을 나선 나는 종각을 거처 광화문에 이르자 세월호 비극의 노란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5개월 동안 나라는 뭘 했던가?  대통령과 정부는 세월호의 참상이 빨리 세월에 잊혀 지기를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건 자기 탓이기에 무한 책임지겠다고, 유족들이 만나고 싶다면 언제든지 오라고 했던 박근혜대통령이 먼 산 구경하듯 책임회피 하고 있으니 국론은 분열되고 상처만 도지는 현실이다.

 

조선조 때 왕 정조는 격쟁(擊錚)이란 민원창구를 만들어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들이 직소하게 만들었다. 신문고가 있었으나 절차가 여간 까탈스러워 빛 좋은 개살구란 걸 인지한 정조였다.

하여 왕의 행차 길에 백성이 꽹과리나 징을 치고 엎드려 직소를 하게 한 제도가 격쟁이었던것이다. 정조는 그런 격쟁을 재임 중에 3355건을 접수하여 해결했다. 한 번 행차 때마다 51번의 격쟁을 처리한 셈이었다.

 

 40여일 단식한 유가족이 청와대까지 찾아가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고 간청해도 모른 채 민생과 문화를 살핀다고 시장과 극장을 찾아다니며 유가족들의 염장을 후비는 박대통령이라. 장(斷腸)이란 말을 아는지? 참 대단한 여자대통령이다.

사냥꾼한테 새끼 잃은 원숭이가 울면서 줄곧 따라오다가 언덕에서 절명하자, 죽은 어미원숭이를 끌고와 배를 갈라보니 창자가 여러토막으로 끊겨 있었다는 고사를 모르진 않을 테다. 부모를 총탄에 잃은 애통이 원한으로만 남은 대통령일까?  

 

그래도 실버들한테 인기 있는 박대통령이라니 백성이 깨어야 성군이 나는 법이란 말뜻을 새겨보게 된다.

세월호특별법을 논하기 전에 단장의 유가족을 보듬는 대통령을 보고싶다. 추석이 낼 모랜데 단장의 유가족들에겐 더 아픔만 도질 명절이 되진 않을지?

 

집에 와서 탑골공원을 검색해보니 “1897년 총세무사 영국인인 브라운(Brown) 탑이 있는 곳이라 하여 파고다공원(Pagoda Park)으로 건의하여 조성 된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이다.”라고 기록했다.

우리나라는 지금 급격하게 실버월드로 진입하고 있다. 노인들의 후생을 어루만지고 가난하고 억울한 자와 소통하는 - 격쟁의 정치를 펴는 대통령이어야 행복한 나라를 영위해 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해봤다.

 

세월호법이, 김영란법이 속히 통과되길 기원해 본다.

2014. 09. 05

 

                                                -1930년대 탑골공원에서의 선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