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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아

50년을 뛰어넘은 만남

50년을 뛰어넘은 만남


6월 마지막 날 오후 3시발 서울행 열차에서 나는 차창에 밀려오는 싱그러운 초록의 물결을 훔치다 눈을 감았다. 믿기지 않은 현실이 - 한 시간 전에 그토록 맘 깊이 묻어두었던 그녀가 내 곁에, 아니 두어 시간동안 같이 있었고 그 순간순간들이 꿈만 같아서, 그 정황들을 다시 반추하고 싶어서였다.

지난 24일 삼성서울병원에서 항암치료 후 6개월마다 받는 재검진을 위해 위내시경, CT촬영, 혈액검사, 가슴사진을 찍고 익일 귀가했던 나는 ‘혜시미’란 분의 정체가 궁금해 웹 세상에 들었다. 그러니까 6월18일 무박2일로 설악산 대청봉을 등정했던 산행후기를 ‘한국의 산하’에 올렸던 나를 댓글(코멘트) 몇 줄로 단박에 옴짝달싹 못하게 한 주인공이기 땜 이였다.

-<< 어쩌다 다시 만나게 된 강대화님...


얼마나 강대화님을 기다리면서 건강 걱정 했는지 모르죠?

이렇게 다시 올려주신 산행기를 대하니 눈물나도록 감사한 마음입니다.

조금 뜸 하신 것 같아서 연락해봐도 회원정보에 있는 전화는 되지 않고

까페장에게 여쭤봐도 알수가 없다고 하니 답답했어요.

24일 속 시원한 결과 받으시고 오래오래 산행의 즐거움으로

많은 산님들에게 기쁨 주셨음 좋겠습니다.

옛 친구인 저도 늘 안심하게 해주세요... 혜시미. 2011-06-21. 20:41:12 >>-



온갖 상념에 골몰하다 그냥 넘겼었는데 문맥이 자꾸 나를 놔주질 않아 ‘혜시미’란 분의 회원정보를 탐색하다 깜짝 놀랐다. e-메일 주소에 ‘jhs’이란 영문이니셜이 들어있어서였다. 거기엔 전화번호도 있었다.

그녀란 확신이 드는 거였다. 반세기 전의 펜팔 여고생, 아니 여태까지의 삶 속에서 가장 가슴앓이를 하게 했던 그리운 연인이란 생각에 잠시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멍청이가 됐었다. 늦은 밤, 메시지를 띄웠던가? 곧장 전화통화가 됐다. 그녀의 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나의 깊은 기억창고를 깨우고 있다는 사실에 들뜨고 당황해 하면서도 그보다 더 나를 놀래 킨 건 그녀가 인근 군산에 살고 있다는 의외성 이였다.

당연타는 듯, 약속이라도 했던 것처럼, 수시로 만나고 있었던 사람들처럼 우린 오늘 정오쯤 만나기로 약속을 하며 반세기의 단절을 넘 간단하고 신속하게 이어갔다.

내일 손태성교수의 면담에서 검진결과를 통보받기로 돼 상경해야할 나는 오늘 그녀와의 만남을 위해 오후로 미뤘고, 서울에 있는 아낸 영문을 모른 채 일찍 오지 않는다고 몇 번째 전화에다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아내는 부추김치를 담겠다고 준비해놨는데 양념장을 갖고 와야 할 내가 미적거리며 시간을 지체하고 있어서였다.

아까, 우린 아내와 남편이 우리들의 사연을 알고 있는지를 서로 묻고 확인 했었다. 난 아내에게 그녀의 얘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큰애가 연대입학시험에 합격한 날 둘째까지 대리고 충무로 어느 찻집에서 고교시절의 그녀와의 교우를 신나게, 자랑삼아 얘기했었다. 물론 그녀도 자매와 큰딸에게 얘기했다고 실토했고 더는 난 그녀의 남편을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녀를 그에게 양보해야만 했었던, 내 몫까지 사랑해 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군자인척 했던, 신산한 눈물 억지로 삼키며 눈물범벅으로 충혈된 그녀를 떠나야 했던 낭패감, 흡사 담판(?)이라도 지우지 않음 안됐을 것 같았던 불쾌했던 자릴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충장로 어느 2층 다방을-.

오늘 오전 11시 반쯤, 대야읍내 27번국도상 정류장에서 우린 극적으로 만났다. 모자 틈새로 비친 은빛의 귀밑머리칼은 까칠한 그녀의 얼굴과 어울려 얼마나 많은 세월이 곰삭아 풋풋했던 여고생을 초로(初老)의 의연함으로 화장해 놨음인지~!

그녀의 얼굴에서 반세기 전의 그녀를 기억해내기가 난망인 것은 나의 맵지 못한 눈썰미 탓만은 아닐 테다. 땜에 지금 그녀를 어디서 마주친단 들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을 거란 점도 애석하지만 현실 이였다. 하긴 내 가슴에 똬리 튼 그녀는 여고생의 아련한 모습뿐이였으니 곱게 늙었음에, 그리고 이 자리를 있게 해준 행운에 감사할 뿐이라고 자위한다.

초록이 짙게 물든 시골길을 우린 어디랄 것 없이 차로 어슬렁거렸다. 점심이라도 할참 이였다. 그녀는 아무거라도 괜찮다고 했다. 함라산 방향으로 길을 따랐다.

난센스였지만 어떻게 해서 우린 양가어른끼리 결혼얘기도 있었는지를 서로에게 되묻기도 했었다. 그녀는 결혼 후 8년간은 영광에서 살다가 여태 군산에서 살고 있으며 슬하에 5남매를 뒀고, 모두가 건강하고 유능한 사회인이 됐음을 감사해 했었는데, 특히 나를 감탄케 했던 건 그녀가 50대 후반에 나의 집 앞 W대 미술대한국화과에 입학하여 3년 만에 조기졸업, 대학원까지 다닌 점과 포기할 줄 모르는 학구열 이였다.

그녀가 미술에 소질이 있었던 건 나는 미처 모른 사실 이였지만 영특했던 것만은 익히 알고 있었다. 늦깎이 미술학도였던 그녀의 그림은 입·수상도 수차례였다. 고백컨대 내가 지금 이렇게 낙서랍시고 끌쩍대고 있음도 실은 그녀의 영향에 힘입은 바였다. 펜팔교제시 월등한 그녀의 문장력에 뒤처지지 않으려 갖은 용을 썼던 땜인 것이다.

그녀를 내 가슴에 영원히 묻을 수밖에 없는 이윤 사춘기고교시절을 그녀로 하여 다소 지적으로 성숙하지 안했나 생각돼 더더욱 절절했던 것이다.

그녀가 늦게나마 재능을 살리며 보람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 흐뭇했다. 나아가선 나와 결혼하지 않았음도 어쩜 그녀의 복일거란 생각을 해봤다. 과연 내가 그녀를 늦깎이 대학에 다니도록 주선을 했을까? 라고 생각할 때 머뭇거리게 돼서 말이다.

아내가 또 전화를 걸어왔다. 몇 시 차를 탔으며 주민증은 챙겼느냐는 게다. 휴대폰이 말썽이어서 바꿔야 한다는 거다. 열차는 서대전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내가 오늘 그녀를만났다면 아낸 어떤 반응을 할까? 그녀 얘길 할 때면 아낸 찾아나서 보라고 후하게 격려까지 한적이 몇 번이였기에 별 내색이야 안할 테지만 그녀가 군산에 살고 있다는 사실엔 맘 편하진 않을 것 같다. 어쨌거나 아내에겐 비밀로 하자. 모르는 게 더 편할 게다. 알아 행여 불쏘시게 만들 거야 없잖은가. 필요악이랄 것 까진 아니더라도 옛 애인을 만난다는 사실에 태평할 위인은 없으리라.

그녀는 댓글에 부러 ‘혜시미’란 별명을 썼단다. 펜팔 때 사용했단 데 난 도시 기억이 없다.

그녀는 아호 ‘仁甫’를 놔두고 내가 빨리 알아챌 거란 생각에서였다는 게다. 1년 전 쯤 웹상에서 우연찮게 나를 찾게 돼 환호하고 지인들께도 알렸다는 소릴 듣고 난 뿌듯했다. 누군가의 맘속에 예쁘게 살아있는 존재가 됨은 행운이다.

그래 누군가를 곱게 간직하고 살아간다는 사실도 행복이다. 난 그녀가 있어 행운아이고 행복함이다.

‘행운가든’에 들었다. 청둥오리요리 전문점인데 우리내외 또는 지인들과 함라산 등산 후에 가끔 들러 식사했던 곳이라. 오리사육을 직접하고 있어 고기가 신선하고 값도 저렴하여 찾았는데 오늘따라 더 만원이어 시끄러웠다. 하지만 시골에서 어디 마땅한 음식점이 있지도 않아서 우린 난장판 속 한 쪽에 자릴 잡았고 간단없이 우리도 궁금증을 토하느라 소란에 일조하고 있었다.

그녀와 식당에서 식사를 한 적은 없다. 그러나 고3겨울방학 땐가? 그녀의 친구 정순이의 자취방에서 두 여고생이 온갖 정성을 쏟았을 자취밥상을 받고 밤을 새웠던 추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정순이의 소식은 지금도 뜸하게나마 통발하고 있단다. 문득 보고 싶어 졌다. 그때 그 밤이 사무친다. 정순이도 나를 무척 좋아했다고 귀띔 해준다.

그보다 아찔한 추억은 딱 한 번 더 있었다. 산수동 그녀의 자취방 앞 들녘 논두렁에서 생전 처음 데이트(?)를 하다 통금이 돼 그만 논두덕에 쪼그리고 앉아 보듬었던 떨림의 밤새움, 그 격한 감정을, 어설펐던 전율을 지금도 고스란히 느끼고 있다. 교우한지 3년만의 만남 이였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포옹 이였다. 그녀도 기억하고 있었다. 어찌 기억 못할 소냐! 곱디고운 청초한 추억이다. 추억은 삶의 향기다. 그윽한 향기가 없는 사람은 아리따운 추억이 없는 사람이기 십상이다. 추억은 생활의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열차는 천안에 진입하고 장맛비는 축복이라도 하려는 듯 바람에 실려 세레머니를 펴고 있었다. 메시지 착신 음이 들렸다. 내일 11시30분 손태성교수의 면담을 알리는 삼성서울암센터의 것 이였다. 산행기에 간헐적으로 쓴 나의 암투병에 가슴 조인 그녀를 생각하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아프게 마음써줌에 뭉클해졌었다.

그보다는 뜸한 산행후기를 올림에 변명삼아 쓴 (투병)핑계 글이 그녀를 맘 아프게 하고 또 누군가를 걱정 끼쳤다면 참으로 민망하다. 전혀 그럴 뜻은 없었는데도--.

몇 년 전이였다. 난 영광엘 간 김에 항상 맘속에 뒀던 남천리 얕은 언덕배기의 그녀의 집을 찾아들었었다. 개발이란 세파가 읍내의 촌락까지 휩쓴 탓에 그녀의 집은 형체도 없었기에 반장님을 찾아 수소문 했지만 헛수고였다. 아니 더 이상 탐문해야할지를 확신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그렇게나 보고팠던, 사무친 그리움 이였던 그녀가 기적처럼 갑자기 나타났음에 막상 할 일이 생각나질 않는다. 허긴 언제 우리가 만날 날을 기약한적 없었으니 준비 없음도 자연스러울 수밖에-. 다만 반세기란 관념의 장벽을 만나자마자 스스럼없이 허물 수 있었던 건 소중히 아꼈던 그리움들을 나누며 자연스런 감정이입 한 땜일 터였다.

그토록 보고팠고 만나고 싶었던 간절한 소원은 어디에 쓸려고 키우고만 있었을까? 애석하고 아련한 지난 기억의 실타래 풀 듯 추억창고에서 생각나는 대로 꺼내 확인하는 수다(?)로 금쪽시간을 보낸 게 다였다. 멋대가리 없는 맹꽁이 짓 이였을까?

단 한 번이라도 보고 싶었던 건 곱게 간직한 감정을 추인하고 건재함을 확인하려는 그리움의 간절한 단순성 이상도 이하도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죽는 날까지 서로가 예쁜 모습으로 가슴에 남길 언약하는 이외 뭘 할 게 있을 것인가?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이거다. 라고 얼른 떠오르지 않는 만남-너무도 긴 헤어짐 후의 연인의 만남 탓인가!

둘째가 전화·콜을 해왔다. 어디쯤이냐? 고. 도착시간에 어디 외식집에서 만나 저녁을 하자는 게다. 양념장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아내의 심드렁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열차는 수원을 바람같이 빠져나갔다. 잿빛구름 사이로 햇살이 역광을 하고 있다. 장만 서울지방에 주로 쏟아 붓고 있다. 서울엔 씻어낼게 너무 많음을 하늘은 익히 알고 있다는 투다.

그녀는 집에 들어갔을까? 오늘의 나를 어찌 생각했을까? 실망하진 안했을까? 우린 너무 쉽게 간단히 오늘만남을 끝냈음인가? 내 역량부족을 못마땅해 하진 안았을까?

아니, 내 스스럼없는, 주책 맞은 행위에 민망하진 안했을까? 어찌됐던 그녀는 곱게 늙었고 초로의 여유시간을 하고 싶은 취미생활을 하며 보람을 찾고 있음에 난 뿌듯했다. 가능하다면 다시 그녀에게 또 배우고 조언 받고 싶은 게 많을 것 같았다. 자기개발에 혼신 하는 그녀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연인으로 간직하며 살아간다는 행운에 오늘의 만남을 자위해 본다.

누군가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있다는 건 행운이고 누군가를 예쁘게 간직하고 살아가는 삶은 행복이다. 그녀는 나에게 그리움이고 꿈이다.

영등포를 멈칫했던 열차는 종착역으로 질주한다.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약속은 안했지만 가능할 것이다.

그래 뭘 할 수 있을까? 켜켜이 쌓인 추억창고의 아련한 그리움들을 꺼내 음미하는 일 외에 무얼 할 수가 있을까?

공유했던 고운 감정들을 한 땀씩 꺼내 뱉기라도 해야 그나마 위안할 수 있음 아니겠는가!

그리운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행운은 아무나 갖는 게 아닐 것이다.

우린 복 받은 연인이다.

2011. 0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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