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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감-그 미지?

태풍나크리 속으로 2박3일

태풍나크리 속으로  23

 

태풍나크리가 오늘부터 제주도에 접근하여 서해안으로 북상할 거란 기상청예보는 매시간단위로 하고 있었다. 하여 내일부터 남해안지댄 태풍의 영향권에 들 거란 건 빤한 노릇이어서 한 달여 전부터 계획한 23일 완도행은 행선지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 나였다.

처남네와 매제네, 우리부부 세 가족이 여름휴가를 완도처갓집에서 보낸다는 건 실로 멋있는 계획이었다. 장인장모님 돌아가신 지 벌써 8년이란 세월이 흘렀어도 처갓집을 찾을 기횔 잡지 못했었다. 그동안 누군가가 (공짜로)살고 있어서였다. 빈집으로 놔두니 누구라도 살고 있음 폐가신세는 면한다싶어서였고, 워낙 먼 거리여서 찾아가기도 쉽지가 않은 탓 이였다.

근데 작년가을 입주자가 바뀌면서 빈집이 된 채 흉가(?)로 전락하는 꼴이 됐다. 이사 올 사람이 집수리를 한다고 온갖 가제도구를 다 내놓고 황토로 벽칠을 하다가 소식 두절한 땜이다. 그 소식을 늦게 접한 처남은 바쁘단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다 작금에 이르렀고, 그래 세 집 가족이 올해 여름휴가를 처갓집에서 보내면서 정리를 하자고 약속한 거였다.

꽤 넓은 남새밭의 풀을 베어 과일나무에 숨통을 살려주고, 집안 청소를 하여 숙식을 해결하며 바닷가에서 한나절, 숙승봉 등산에 묘역벌초까지 하자고 의기투합했던 바였다.

 

 

오늘 아침 6에 출발하여 우리내외를 데리러 온다고 군산처남이 어제 밤 전화를 했을 때 나는 태풍 온다는데?’라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목적지 변경을 타진했었다. ‘한 번 정했으면 실행해야지 뭔 소리요?’ 하는 처남의 대꾸에 내 편할 대로만 고집하는 속내를 뵈는 것 같아 입 닫았었다.

오늘 아침 6시 반쯤에 처남내왼 차를 대령한 채 나타났다. 스타렉스짐칸을 빼곡 채운 채-. 잿빛하늘 아래 우중충한 대기를 뚫고 태풍나크리를 맞으러 남녘을 향해 질주한다.

서울매제는 5시에 출발, 정안휴게소에서 시장기를 때우는 중이란다. 워낙 거구에 먹 탐이 심한 탓에 배고프면 못 견디는 매제의 모습이 차창을 스쳐간다. 정오쯤에 완도에서 만나잔다.

남쪽을 향해 내달릴수록 간헐적으로 흩뿌리던 가랑비도 멎고 맞바람만 세차 완도읍은 우릴 아주 시원한 날씨로 맞아주는 거였다. 우린 마트, 철물점, 약국, 시장을 찾아 준비물을 챙겨 처갓집 대문을 들어섰을 땐 정오가 지나서였다.

장모님의 따뜻한 인정 물씬 내뿜었던 처갓집은 키만큼 자란 풀에 에워싸인 채 파란 지붕만이 그리움을 일깨운다. 넓은 남새밭은 키만 한 풀들이 바람에 휩쓸려 미친년머리채 됐고, 정원수는 넝쿨 식물의 놀이터로, 대문에서 마당에 이르는 포도는 잡초가 야금야금 촉수를 뻗으며 마당엔 가구와 가전제품들이 폐기장에서처럼 널부러져있다.

김밥으로 대충 시장기를 때우고 안방과 주방청소에 들었다. 주방과 작은방 벽을 황토 칠하다가 소식 끊은 누군가가 원망스러웠다.

청소를 하고, 주방에 매트를 깔고, 주전부릴 하며 이 집의 역사를, 아니 내가 장가들어 장인장모님께서 작고하시기까지의 수십 년간의 애환을 반추해봤다.

 

 지질이도 가난하여 결혼 일 년만인가 (아내 몰래 빚내서)처음 찾은 처갓집, 똥구녁 찢어지게 가난해 뵐 면목도 없는 쌍판을 들고 무엇 땜에 그리도 처갓집을 찾아가고 싶었던지 모른다.

서울서 완도까진 거의 하루가 걸리는 먼 거리를 말이다. 가난해서 먹는 게 부실했던 탓이었으리라. 장모님께서 낙지, 소라 등의 이름도 모를 생선들로 요리를 하셔 주는 통에 포식하여 배탈이 나 미처 화장실에 가지도 못하고 툇마루로 기어가서 뒷마당에 겨워냈던 음식물들.

음식 잘 못 만들어 줬나싶어 밤새워 안절부절 못하신 채 서성거렸던 장모님의 허둥대는 모습이 떠오른다. 못난 사위가 찾아가 모진 욕 뵈 드렸는데 어쩌다 내가 처가엘 간다고 전갈하면 아침부터 동구버스정류장엘 마중 나와 계셨던 그지없이 순박한 아낙네였다.

어느 해엔 안방 중천을 만들고 도배를, 또 이듬해엔 부엌을 입식으로 개조해 드렸을 때의 흡족해 하시던 모습이 선하다. 장모님은 나이 50줄에도 사위보기가 뭐가 그리도 부끄러우신지 웃을 때도 손으로 얼굴 가리며 살짝 외면하고 미소를 흘리셨다.

내를 위해서라면, 아니 당신의 새끼들을 위해선 팔 하나라도 흔쾌히 때어 주실 정한의 어머니상 그대로셨다.

그런 장모님께서 우리가 가난을 벗고 좀 살만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니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를 생각하며 우리내왼 부모에 대한 효도란 게 별게 아닌, 건강하게 잘 살며 걱정 끼쳐드리지 않는 삶이란 걸 절감하게 된다.

 

어느 해 여름휴가 때, 둘째와 막내와 같이 우리내외는 완도엘 찾아갔다. 모처럼 외손녀를 집에서 맞는 늙으신 장인`모님의 기쁨은 얼굴에 그대로 만연했었다.

십여 년 전에 우리가 마련해 드린 냉장고가 누수를 해 두 차례 수리를 했으나 여전하여 새나온 물을 훔치고 계셨다. 얘길 듣던 둘째가 냉장고를 선물해 드리겠다고 완도읍을 향했다. 저녁때 대형냉장고가 들어왔을 때의 장인`모님의 기뻐하시는 모습은 지금도 선연하다.

특히 장인님은 외손녀의 효심에 감복해 우리가 떠날 때까지 , 우리유리란 놈이~!”라고 연탄을 하시며 얼마나 흡족해하신지 모른다.

세상의 부모님은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 자식들이 몸 건강하고 주위사람들에게 패 끼치지 않고 산다는 소문만으로도 흐뭇해하신다는 걸 터득하는 자리였다.

그런 장모님, 장인님께서 세상을 뜨자 처갓집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거였다. 옛말에 장모 없는 처갓집은 처가가 아니다란 말이 정설인 게다. 그런 탓에 8년 동안 처가엘 찾아보지 않음이다.

 

 

매제는 해남 고향에 도착, 동문계를 추려야하니 내일 오겠다고 전화질한다. 괴씸했다.

약속대로 제초기나 갖다놓고 계를 하던지, 날밤을 새고 오던지 하면 눈 질끈 감아줄 수 있었다. 내일부턴 본격 나크리가 덮칠 테고 폭풍 속에선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걸 알면서 계 핑계로 술 한 잔 걸치고 뻗어버린 두꺼비이기에 난 울화가 치밀었다.

제초기만 있으면 남새밭 풀베기와 산소벌초를 오늘 중에 할 수가 있음인데 말이다. 처남내외 듣는데서 난 매제힐난을 어지간히 해뒀다. 내일 두꺼비마냥 아그작대며 들어서면 한 방 따끔하게 쏘아댈 작정이다.

나와 처남과의 약속보다 더 중요한 게 알량한 동리계였던가 싶어 부화가 솟구쳤다. 더구나 오늘은 덥지도 않은 일하기 안성맞춤인 선선한 날씨여서 더 아쉬운 거였다.

앞뒤 문을 열어놓은 채 모기향을 피우고 방장을 치고 칠흑같이 어두운 세계에서 잠자리에 드니, 툇마루 밑에서 풀벌레울음소리가 타임머신을 태우고 까마득한 옛날로 피서여행을 시키는 거였다.

내가 시골에서 방장을 치고, 모기향을 맡으며, 풀벌레 자장가 속에 잠자는 날이 다시 언제 올지도 예측할 수 없다. 오늘 아침에도 나를 데리러 온 처남에게 완도 말고 태풍을 피해 딴 데로 가자고 쏘았던 경박함이 슬그머니 미안함으로 지피는 거였다.

방장 안에 네 식구가 나란히 누어 어버이를 그리는 그리움의 소곤거림은 추억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통감케 했다. 여름휴가는 굳이 돈 쏟아버리며 딴 데 갈 것 없다. 자기의 고향이나 처갓집이나 아님, 추억이 깃든 시골을 찾을 일이다.

시골에 자기 집이 없어도 숙박걱정일랑 하지말라. 숙식이 가능한 깔끔한 마을회관이 있고, 친지들은 쌍수 들고 환영한다. 우리도 친족이 아닌 이웃주민들이 찾아와 우리가 미안할 정도로 온갖 편일 제공하려 애쓰는 거였다. 산야를 덮은 푸성귀마냥 싱싱하고 풋풋한 인심, 순박한 시골의 정분은 아직도 넘치고 있었다.

자정이 되자 비바람은 고요를, 풀벌레노래를 파묻어버렸다. 앙칼진 바람소리가 포효한다. 굵은 빗줄기가 처마양철지붕을 난타하고 있다. 내일부턴 본격 나크리의 광란이 요동칠 징조다.

남새밭풀베기와 산소벌초는 물 건너갔다. 두꺼비매젠 내일 무슨 해괴한 변명을 늘어놓을까?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얄미운 거였다.

 

 

나크리는 어디쯤 왔을까스마트폰이 대신한다지만 티브이 없으니 그게 아쉬웠다. 스포츠와 재난프로는 대형화면으로 봐야 실감이 난다. 해도 모처럼 티브이 없는 시간이 얼굴 마주하고 온갖 얘기꽃 피울 수가 있어 좋다. 티브인 불통의 범인이라.

10시쯤, 장대비를 헤치며 매재부부가 들어섰다. 어지간히 낯짝이 없었던지 들어서면서 형님, 보름 후에 저희가 다시 내려와 벌초를 하기로 동네사람과 약속을 하고 왔습니다. 그때 남새밭 풀도 베어놓을 테니 맘 푸세요.”라고 넉살을 떠는 게 아닌가.

자네 와서 풀 베느라 흠뻑 옷 젖는다고 비옷까지 준비해놨네.”라고 응수하며 비옷을 가리키는 나한테 매제는 또 아따 형님, 걱정 마세요. 제가 오늘 완도수산시장엘 가서 한턱 쏘겠습니다.”라고 두꺼비 담 넘어가듯 지나가고 있었다.

이 태풍 속에 서로가 말꼬리 잡아봤자 무위란 걸 알기에 우린 먹거릴 사러 우르르 읍내를 향했다. 전복, 해삼, 소라, 멍장어, 낙지, 숭어를 사서 해물요리에 빠져보기로 했다. 숙박비가 공짜니 아낄 필요도 없었다.

나크리에 갇혀 옴짝달싹도 못하고 집안에서 먹거리 싸움하는 하루였다. 심심하면 처갓집에서의 추억 한 토막씩 꺼내 구수하게 안주로 씹으며 애환에 일희일비하는 시간은 특급요리상이 아니던가!

추억이 많은 일생은 행복한 삶을 산 사람이다. 친족 모두가 모여 추억을 공유하는 시간은 얼마나 뿌듯함인가! 가능하면 자식들을 동반하여 공유할 추억 만들기를 함은 참으로 유익한 시간이 될 거란 걸 절감하기도 했다.

형제간이란 혈육의 정도 소원해지는 현대인에게 고향에서 친족과의 며칠간의 시간은 돈으로 살수 없는 황금의 추억을 만들기다.

나크리의 포효소리에 세상과 절연 된 채 맞는 또 한 번의 칠흑의 밤! 처갓집에서의 밤태풍 땜에 빗나간 일정이, 태풍 탓에 울안에서 지지고 볶은 피붙이들 체취의 맛이, 하고 싶어도 하기 어려운 공유의 기쁨들이었던 것이다.

태풍 맞이하러 남녘땅 완도를 향했던 건, 23일을 태풍 속에서 보낸 시간들은 여느 때의 휴가보다 기억창고에 오래 저장 될 추억이 됐다.

고향은 이래저래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엄마의 치마폭인 것이다.

2014. 08. 03

-더덕꽃, 첫날 청소를 하다 정원 동백나무를 뒤덮은 더덕을 캤다. 처남은 15년생이라며 진홍색 껍질의 팔뚝 만한 세 갈래의 더덕뿌릴 캐 씻어 나눠 먹었다. 향 짙은 쌉싸름한 맛의 더덕은 산삼 못잖다고 혹살을 떠는 처남, 짐짓 내가 아쉬워했던 건 그 더덕을 디카에 담지 못했다는 거였다.         나크리 탓에 나크리가 빚는 풍광을 담을 수 없음도 또 하나의 아쉬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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