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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비원(秘苑)의 비경을 탐하다 - 창덕궁후원

비원(秘苑)의 비경을 탐하다 - 창덕궁후원

  정오쯤 돈화문에 들어섭니다. 오후1시의 창덕궁후원탐방티켓으로 벼르던 비원에 들어가기 위해서지요.

1412년 태종이 목조2층 누각으로 건립했는데 궁궐대문 중 가장 크답니다.

 

돈화문은 왕의 출입문으로 신하들은 서쪽 옆의 금호문을 사용했다지요.

2층 누각엔 종과 북을 매달아 통금은 종, 해금은 북을 두드렸답니다.

칙칙한 서울도심은 돈화문을 들어서자 싱그러운 연초록세상으로 둔갑을 합니다.

 

사뿐한 발걸음은 연두이파리 나불대는 노거수 밑을 얼쩡거리다가 금천교를 넘습니다.

돈화문보다 1년 먼저 만든 금천교는 역시나 서울의 돌다리 중 최고라지요.

이 다릴 조선의 임금들은 한 번씩이라도 거닐었을 테고, 고관대작들도 아장거렸을 텝니다. 나도 아장거리며 난간의 문양을 들여다보지만 분별이 쉽잖습니다.

 

‘억울한 일이 있음 소장을 내되, 그래도 원통하거든 북을 두드려라’ 고 신문고를 설치했던 진선문을 통과합니다.

허나(지금도 오십보백보지만) 북 두드리는 절차가 까다로워 백성들은 왕이 행차하기만 기다려 육탄돌진으로 호소하는 통에 관리들은 골머리가 아팠다지요.

 

 

지금 세월호가 진도앞바다에 침몰하여 가족친족들이 애통해 하는데 관리들은 우왕좌왕, 지체 높은 사람들이나 어른들 하는 짓이 영 부끄럽습니다.

승객들 안위는 안중에도 없이 물귀신처럼 빠져나온 선장과, 간첩조작허위문서도 모르고 아는 건 외국정상과의 비밀문서 공개해도 된다고 어거지 쓴 국정원장이 나와 같은 세대라서 부끄럽습니다.

 

학생들 앞에서 나도 부끄러운데 높은 자리에서 잘났다고 목에 힘주는 그들은 얼마나 창피할까요.

‘꼼짝 말고 가만있어’라는 세월호나 ‘입 닫고 숨죽여’라고 뻣뻣한 검찰`국정원은 학생들 알기를 뭘로 아는 걸가요? 그 자리가 그리 환장하게 좋을까요?

 

한숨 한 번 몰아쉬고 숙장문을 향한 어도(御道)를 밟습니다. 좌우론 붉은 열주들이 떠받는 행각이 비로써 내가 궁궐에 들어선 느낌이 들게 합니다.

회랑처럼 둘러 선 행각엔 호위청, 상서원 등의 관청이 있었다지요. 왼쪽엔 인정전에 이르는 인정문이 있으나 나는 곧장 숙정문을 향합니다.

 

 

숙정문에 이르면 터가 좁아져 태종은 공사총감독인 박자청을 하옥시킵니다. 사다리꼴이 된 정원이란 게지요.

 하지만 자연친화적인 혜안과 통찰력을 가진 박자청의 공간 활용 심미안은 후에 많은 공사를 하게 되고, 벼슬도 공조판서에 이릅니다.

그는 짐짓 내시였지만 태조는 그를 알아채 기용한 게지요.

 

숙정문을 나서면 좀 넓은 마당이 있는데 우측엔 만화방창 봄이 철철 넘쳐 탐방객들은 상춘객이 됩니다.

좌측엔 선정전, 희정당, 성정각이 들어섰고, 꽃대궐 깊숙한 곳에 낙선재가 자리했습니다.

 

나는 성정각일원에 있는 비원입구인 함양문 앞에서 핏빛 연산홍에 파묻힌 궁궐의 상춘에 취하며 1시를 기다립니다.

가을까지 계속되는 후원탐방은 매시간 단위로 예약하여 해설가를 따라 1시간 반쯤 비원을 산책하게 합니다.

 

이윽고 1시가 됐고, 곱게 한복 입은 해설여성은 우릴 안내합니다. 노송들 사이로 연둣빛이파리를 나불거리는 활엽수들이 또 하나의 하늘을 만들었습니다.

 

 

아~! 인구 1천만의 도심에 연초록하늘 아래서 고요가 막 피운 고운꽃잎에 내려앉는 별천지가 이렇게 지근거리에 있었을까!? 하고 감탄부터 하게 됩니다.

군데군데 화사한 꽃들이 헤프게 웃으며 부르는 것 같아 이제 시작인데 나무늘보처럼 기어가고 싶습니다.

 

 

긴가민가한 골짝에 300평쯤 된다는 사각형연못의 부용지가 나타납니다.

연꽃 핀 모양의 부용정이 두 다리를 연못에 담구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만치 쬐그마한 비각이 있고, 부용정 맞은편 언덕에 주합루가 못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2층 누각의 주합루엔 아래층은 왕실도서관 노릇을 한 규장각이, 위층엔 책 열람에 연못과 골짝을 감상할 누마루를 만들었습니다.

‘문장을 담당하는 하늘의 별[奎宿]이 빛나는 집’ 이란 뜻의 규장각과 ‘천지우주와 통하는 집’이라는 주합루(宙合樓)라니 달빛탐방(금년4~6월 예약은 마감됨)을 하는 분들껜 딱 이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합루엘 오르는 문을 어수문이라 하는데 큰 정문은 왕이, 양옆의 작은 문은 신하들의 출입문이었다네요.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다’는 뜻에서의 늘 백성을 생각하겠다고 어수문이라 했던 정조의 심저를 읽힐 것도 같습니다.

 

영화당은 왕의 활궁터로 쓰이기도 했는데 명궁수였던 정조는 50발 중 49발을 명충시키곤 “무엇이든 차면 못 쓰는 것이라.”라고 하면서 한 발을 안 쏘고 능청 떨었다는 일화도 영화당에 떠돌고 있습니다.

또 영조대왕이 칠순 넘도록 명궁수였던 건 ‘ 방하착!’한 탓 아니었을까요?

 

항상 모자람 속에 안락이, 행복이 있고, 그래 장수하는 비결일 것 같습니다.

정약용도 여기서 활쏘기와 승마를 마지못해 했는데 운동엔 여간 젬병 이었던가 봅니다. 벌칙 아닌 벌을 받았다나요?

 

 

영화정 마당엔 홍송들이 역사의 무게를 버거워하 듯 굽어 기울고 있어 고풍이 절절 묻어납니다.

아닙니다. 마당에서 치러지는 과거시험 감독관 노릇 하느라 허리가 그렇게 굽었을지도 모릅니다.

암튼 시험에서 합격한 서생은 왕과 부용지를 감상하며 얼마나 뿌듯했을까요?

 

 

그날의 정경을 데자뷰 해봅니다. 시험도 낭만 속에서 실시해 죽기살기의 지금의 시험과 비교해 봅니다.

방하착!을 생각하며 한갓진 양반걸음으로 얼마나 숲을 걸었을까, 숙종이 꿈엔들 죽을까? 싶게 애착했던 애련지에 발을 담급니다.

 

진시황이 불노초를 찾았듯, 숙종은 넓은 통돌을 네모로 깎아내어 세우고는 떡하니 ‘不老門’이라 명명 했답니다.

하긴 장희빈과 노닥거리다보니 늙는 게 원통해 죽을 지경이었을 테지요.

‘내가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서도 맑고 깨끗하며 은연히 군자의 넋을 지녔기 땜이라’ 라고, 연못에 정자를 지어놓고 애련이란 이름을 지었다지요.

 

 

효명세자는 여기에 8칸짜리 서재와 몇 채의 단출한 건물을 지어 왕도를 밟았으나 단명했습니다.

북쪽 산기슭 음지에 집지어 머물었다는 게 요절의 한 축이었을까요?

 

또 여기엔 어수당이 있었는데 인조반정 때 광해의 비 유씨는 반정의 낌새를 알아채고 미리 여기에 숨어들었다죠.

이틀인가 지나도 기척이 없자 궁녀를 시켜 반군대장에게 ‘반정이 의거다’라고 반군 편에 선 자신을 알립니다.

대단한 여자지요. 남편이며 지존인 광해를 배반 욕하다니요? 암튼 인조는 광해를 내쫓고 유씨를 살려줬습니다.

 

 

숙종과 희빈이 어떻게 놀았을까? 를 생각하다 너무도 멋진 풍광에 정신 추리니 존덕정 골짝입니다.

살짝 굽은 골짝에 앙증맞은 연못들이 물길을 잇고 우거진 연초록 숲 아래 관람정, 존덕정, 숭재정, 펌우사가 뛰엄뛰엄 숨어 들었네요.

 

 

1644년 인조가 세운 존덕정은 육모정에 지붕 위에 또 기둥을 세워 지붕을 올린 겹지붕 걸작정자입니다.

24개의 기둥 중 두 발은 반월지에 담그고 있는데 천정 중앙엔 여의주를 희롱하는 청룡과 황용 -쌍용이 있습니다.

 

 

자연에 녹아 든 건물구조와 공예솜씨의 기교가 빼어나 찬탄을 불러일으킵니다.

또한 정자 안 지붕 밑엔 정조의 ‘萬川明月主人翁自序’란 현판이 걸려 있지요.

 

 

정조는 ‘세상의 모든 냇물이 품고 있는 밝은 달의 주인공’이란 기다란 호를 지어 스스로를 부르고 서문을 새겨 걸어놨었지요. 때는 1798년12월3일 정조즉위22년 이였습니다.

정조는 신하들과 자제들을 이곳에 불러 화고를 만들어 놓고 연회를 베풀곤 했는데 술이 남았고 처음 온 신하에겐 다 들고 가도록 권했을 정도로 애용한 존덕정 이었지요.

 

 

‘냇물마다 빛나는 달은 오직 하나다. 그 달이 곧 자신이니 모든 백성과 신하들은 나를 따르라.’라고 왕권강화와 개혁정치에 매진했지요.

그 기상을 연못 가 수백 년을 지켜온 은행나무가 이었는지 하늘을 뚫습니다.

한편 순조는 유생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강의도 했답니다. 참으로 멋진 풍류의 정치였지요.

 

 

돌다리 아래에 일영대가 있는데 시각을 쟀다고 하지요. 맞은편에 조그만 전각이 폄우사입니다.

어리석음을 경계하여 고쳐준다.는 폄우(砭愚)는 효명세자가 독서삼매를 즐겼던 곳이랍니다.

 

 

여기엔 효명세자가 정조의 폄우사四詠이란 시를 차용해 지은 추월(秋月)이란 시가 있습니다.

“맑은 이슬 뜰에 내리고

하늘 아래 온 땅이 온통 맑구나

영롱한 온 누리에 온화한 기운 감돌아

늦은 밤 글 읽기에 밤공기 알맞도다”

영민하여 조정의 신망을 받았던 세자는 스물두 살에 아깝게 저승길에 듭니다.

 

얕은 언덕숲길을 올라 꺾어 내리서면 옥류천에 아기자기한 정자와 마주칩니다.

인조는 거대한 소요암을 깎아내 홈을 파고 물길을 끌어 폭포를 만들었으며, 수로를 곡선으로 만들어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벌였습니다.

바위에 새긴 옥류천 글자는 인조의 어필이지요.

 

“백 줄기 푸른 샘물이 솟으니

증기가 낀 구름은 감히 날지를 못 하누나

우연히 작은 모임 이루어

늦은 서늘함을 나누어 보내노라”

라고 정조도 곡수시를 읊었는데, 신하들을 일 없이 불러 주연을 베풀고 망중한을 즐긴 곳입니다.

 

또한, 숙종은 옥류천 위에 오언절구시를 새겼습니다.

“폭포물길이 삼백 척을 흘러

아득히 먼 하늘에서 떨어진다

보고 있으니 흰 무지개 일고

온 골짜기에 천둥과 벼락이 친다” 는

유명한 숙종의 어시의 발심도 이곳 이였지요.

 

애련지와 옥류천은 임금들이 애용한 자연공원이었던 셈입니다.

정조가 화성행차를 준비한 곳이 여기 농안정이고, 실제 여기서 농사짓는 일도 해봤을 만큼 터가 넓습니다.

소요암과 청의정 사이에 샘물이 솟는데 인조가 판 이 작은 어정(御井)에서 옥류천이 발원하나 지금은 큰 덥게 돌로 덮어놨습니다.

 

 

시심과 풍류를 즐긴 어진 인조가 청나라의 침략을 받아 남한산성에서 삼전도를 올린 굴욕을 유추해 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왕 이였지요.

소요정, 태극정, 취한정등의 작은 정자들이 요소에 안치하여 옥류천일대를 오밀조밀한 요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손바닥 만한 논을 끼고 있는 청의정은 볏짚으로 이엉을 해 뜬금없음이 되려 정취가 솟습니다.

태극정에 잠시 앉아 안압지 포석정처럼 유상곡수연을 했을 풍류를 상상해 봤습니다.

 

다시 한참을 숲을 헤치고 연경당을 찾아 솟을 문인 장락문을 듭니다.

효명세자가 어머니(순원왕후)의 마흔 살을 기념하고, 더는 아버지 순조를 위해 1828년에 지었다는 120칸짜리 사저는 사대부집을 흉냈으나, 선향재는 청나라풍 벽돌에 동판을 쒸운 처마지붕이 특이했답니다.

 

고종이후엔 외국사신들을 접견하고 연회를 베푸는 장소로 이용했다네요.

안채, 사랑채, 선향재(독서당), 화계 등의 건물이 있는데, 화계위의 농수정은 날렵하여 부~웅 떠있는 누각 같습니다.

 

 

안채 뒤엔 음식과 빨래 등의 온갖 허드렛일을 하는 반빗간(飯婢間)이 있습니다.

사랑채 누마루엔 누다락을 두어 조선 사랑채의 백미를 보여주며, 선향재는 서재겸 응접실로 사용했다지요.

 

 

근세사에 유명한 사건인 갑신정변(1884)때 청군에 쫓긴 박영효, 김옥균, 홍영식 등이 고종을 모시고 피난 왔던 장소며, 이후 고종은 자주 여기서 연횔 베풀었다지요.

 1908년에 순종은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일본 인사들을 여기서 접견했답니다.

 

 

영명한 효명세자는 11세때(1827.2.18)에 왕위에 올라 순조의 대리청정으로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왕실을 반석에 올리려했지만 재위 3년만인 22살(1830.5.6)에 희정당에서 요절하고 맙니다.

정약용을 불렀으나 이미 어쩔 도리가 없었다는군요.

 

 

발길은 적요한 숲을 한참을 걷습니다. 만약 왕들이 이 길을 산책 겸 걸었다면 심신연마에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역사의 비극이 물신 베인 신선원전에 닿았습니다. 원래 임난 때 파병한 명나라 신종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대보단을 설치한 곳이지만, 일제가 1921년 대보단을 철거하고 선원전의 어진들을 이 깊숙한 곳에 옮겨 중국을 내치고 조선왕실의 위엄을 약화 시켜려 한 음흉함이 내재된 슬픈 장소지요.

 

 

태조부터 순종까지 12명의 어진이 있었는데 6.25때 소실됐다 네요.

여기엔 두 개의 정자가 있는데 1759년 훈련대장 김성웅이 군사용 누각으로 몽답정을, 군영 활터에서 활 쏘는 걸 감상하던 괘궁정이 있습니다.

 

 

선원전 주위의 조경이 뛰어난데 괴석과 소나무와 화목을 적당히 배치했습니다. 특히 향나무와 측백나무는 선전원의 자랑이라 할 거목 같군요.

 

 

두 시간에 가까운 비원탐방 이였으나 주마간산입니다. 제한된 시간이라 아쉬움이 너무 컸지만 다음을 기약해야지요.

대게 정원이 앞에 있음인데 창덕궁의 정원은 뒤에 있고 자연을 훼손 않고 안빈낙도의 풍류를 즐겼다는 선현들의 예지가 감동케 합니다.

 

 

‘내가 곧 달이니 나를 따르라’ 던 정조도 자연을 사랑했듯 자연은 왕의 것도, 백성의 것도 아닌 우리들 후손의 것으로 잠시 위탁 관리할 의무만 있단 걸 절감하게 했습니다.

공직에 몸담고 자기 이름세자 새기겠다고 국토를 난 개발하는 고위직들은 비원을 한 번 탐방해야 할 거란 생각을 해 봤습니다.

 

내일 다 못 본 창덕궁내를 탐방할 셈으로 오후 다섯 시에 다시 돈화문을 빠져 나왔습니다.

아수라장 같은 회색도심으로 말입니다.

2014. 04.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