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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창덕궁 낙선재의 러브스토리

 창덕궁 낙선재의 비련

 

 

어제 비원을 탐닉했던 나는 오늘 다시 돈화문을 들어섭니다. 1392년 이성계는 조선을 세우고 이태동안 경복궁을 지어 1394년 수도를 한양으로 옮겨 본격 창업의 반석을 깔았지요.

 

태조(이성계)는 슬하의8남 중 막내 방석을 후계로 정하자 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석, 방번과 창업공신 정도전을 죽이고 방과를 정조로 앉힌 후 곧이어 용상을 꿰차 태종으로 등극하지요.

왕자의 난으로 피비린내 난 경복궁이 꺼림칙한 태종은 궁궐 동편에 이궁을 세우니 이게 창덕궁인 게지요.

 

 

창덕궁은 내시 박자청이 언덕과 계곡 그리고 숲이란 자연조건을 멋있게 이용한 건물배치로 공간미가 출중한 자연친화적인 궁전이 됐기에 현대에도 귀감이 된다지요.

 

 

이층누각에 종(통금)과 북(해금)을 매단 돈화문을 들어서면 왼편엔 높은 담장에 기대서서 현대도시가 내뿜는 온갖 공해를 걸러내느라 늙어버린 노거수들이 즐비하고 우측엔 궁궐의 젖줄이었던 금천물길이 말라 속창만 보여줍니다.

 

 

태종11년에 세운 금천교를 지나면 궐내각사와 구선원전 건물들이 저만치에 자리하고 있지요.

곧장 진선문을 향합니다. 백성들더러 억울한 일이 있음 북을 두드리라고 했던 신문고를 설치했던 대문 이였지요.

 

 

관리들의 까탈스런 운용절차가 백성들의 또 하나의 원성이 됐지만 위민정치의 발상이기에 6백년이 흐른 지금도 우릴 숙연케 합니다.

그때의 신문고나 지금의 국민고충위원회가 국민의 애로사항을 신속하게 해결해 주는지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합니다만.

 

 

좌우로 호위청, 상서원 등이 들어선 빨강열주들의 외행각을 사열하듯 어도를 걷다 좌측의 인정문을 들어서면 웅장한 인정전이 나타납니다.

태종이 1405년 이궁으로 건립한 인정전은 역대왕들이 정무를 행한 곳이지요.

 

 

박석마당 정중앙 어도를 좌우로 품계석을 세웠고, 왕의 즉의식이나 왕비책봉례, 과거시험 그리고 외국사절들을 접견할 때의 장소로 이용했지요.

인정전이 돋보이는 건 좌우로 회랑을 이룬 전각의 빨강열주들의 위용이라 할 것입니다.

인정전을 오르기 위해 2단의 윌대를 오르면 정면엔 봉황을 새긴 소맷돌과 귀퉁이에 드무란 커다란 무쇠항아리가 있습니다.

 

 

드무는 소방수를 담아두는 수조인데 화마에 취약한 목조궁궐을 보호하기 위한 방책이랍니다.

귀신 중에서도 가장 못생겨 추한 불귀신이 왕궁에 불을 지르러 가다가 느무의 물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보고 기겁을 하여 도망치느라 불 지르는 걸 깜박 잊게  위해서라는 군요.

선조들의 화재예방책이 절절하고 여간 유머러스하여 저절로 웃음을 머금게 합니다.

 

그런 드무도 인재가 빚는 화마를 어찌할 순 없었던지 광해군을 쫓아내던 인조반정 때 반군이 횃불을 들고 침전을 수색하다 불이 붙어 궁궐이 소진되기도 했었지요.

 

 

이층궁궐은 통층으로 높은 천정이 화려합니다. 금빛어좌 뒤의 일월오봉풍과 보개천정은 왕의 위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신기한 건 에어컨바람 같은 시원한 냉기가 가슴을 시원하게 씻어내는 거였습니다.

누대에서 인정문을 내려다보며 옛날 육조백관들이 박석마당 품계 뒤에 업드려 왕의 교시를 받던 정경을 떠올려 봤습니다.

 

만인지상이며 누리의 짐인 선조대왕은 임진왜란 때 밀려든 왜적에 황급하여 억수로 퍼붓는 비를 맞으며 여기서 말을 타고 몽진을 갔습니다.

그런 비극의 마당이 광해 땐 전시(殿試)를 거행하고, 잔치를 열다보니 궁안이 더러워져 광해는 병조에 명하길 “오줌 싸는 일을 엄금하라”고 했답니다.

 

행사를 치루다보면 먹은만큼 배설을 자주 해야되고, 화장실은 턱없이 모자라 후미진 곳에서 카타르시스를 즐겨야 했으니 궁궐이 악취가 진동해 골치 아픈 건 동서양이 다르지 않했던 모양입니다.

루이왕조때의 베르사이유궁전도 연일 연회가 벌어지면 시종 하나는 오강을 들고 주인을 따라다니며 배설을 받아 정원에다 쏟아버려 골을 때렸답니다.

 

턱없이 모자란 화장실 땜에 귀부인들은 자기의 패티코드에다 질금질금 싸면서 무도회를 즐기느라 빙빙 춤췄다나요.

향수와 배설물의 냄새가 혼증하면 어떤 향기(?)가 될까요? 상상을 절 합니다.

고상한 척하는 사람들의 숨은 구린내 말입니다. 요즘 고위층의 사회를 부폐시키는 부조리한 비리보다는 그때의 악취는 애교로 봐줄 수도 있겠지요.

 

진선문에서 숙장문까지의 마당이 사다리꼴 형이라고 태종은 공사총감독인 박자청을 하옥시키기도 했습니다.

허나 그의 자연친화적인 심미안과 공간활용이란 탁견은 이후 많은 궁 건축을 하게 됐고, 내시란 신분으로 공조판서에 이르게 되지요. 건국초 그를 기용했던 태조의 안목은 탁월했던 겁니다.

 

 

숙장문을 나서면 꾀 너른 마당 좌측에 선정전이 있습니다. 왕은 매일 고위직 신하들과 일상 업무를 봤던 편전이었던 셈입니다.

왕의 양쪽으로 문무대신들이 줄지어 정좌한 채 국사를 논하고, 예문관의 사관과 승정원의 주서는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기록했지요. 그렇게 하여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가 태어난 게지요.

 

 

처음엔 조계청이라 했는데 세조는 ‘베푸는 정치여야 한다’ 는 뜻에서 선정전으로 개명했다지요.

성종의 비 공혜왕후는 매년 9월 팔십세 이상의 노인들을 불러 양로연을 베풀곤 했고 계비 정현왕후는 누에치기도 했다네요.

하지만 성종은 1479년 6월2일 신하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왕비윤씨를 폐비시킵니다. 연산군의 생모 말입니다.

 

 

선정전건물지붕은 유일한 청기와로 조선판 청와대였던 셈입니다. 바로 옆에 왕의 침전으로 사용한 희정전이 있는데, 선정전이 비좁고 각종 행사장으로 쓰여 편전의 기능을 하게 되면서 1917년 화재로 소실됩니다.  

 3년 후 복구하면서 쪽마루와 카펫, 유리창문, 천장의 샹들리에 등 서양식으로 바꿨습니다. 예문과, 사헌부, 사간원, 홍문과 등의 관리들과 언관들이 주야로 왕과 정사를 논했던 ‘궐내각사’였었지요.

 

 

뒤의 대조전은 왕비의 생활공간이었습니다. 왕권을 잇는 세자를 낳는다 해서 대조전이라 했다죠.

왕비는 겉옷을 두 번 다시 입지를 않고 보관했다가 궁중행사가 열리면 양반가의 부인들에게 하사했답니다.

희정당과 대조전은 행각으로 통한 건물인데 왕의 침전이 있어 용마루가 없습니다.

 

 

대조전우측의 흥복헌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던 경술국치의 장소이기도 했지요.

뒤의 경훈각등의 건물이 유기적으로 잘 연결된 채 옆의 희정당 전각들과 복합적인 공간구성을 이룬 행각과 복도는 절로 감탄사가 나오게 합니다.

 

 

특히 궁궐 뒤뜰의 굴뚝과 천장문, 추앙문, 화계에 괴석과 굴뚝과 꽃의 정원은 궁내여자들의 단조로울 일상에 얼마나한 열락을 갖게 했을 건축미라 할 것입니다.

대조전은 왕의 침전이 있고 왕비의 거주지인 만큼 창덕궁에 전기가 최초로 들어온 전등과 드무가 있는 곳입니다.

 

 

대조전을 나와 애틋하고 슬픈 불같은 사랑이 가슴 저미는 낙선재를 향합니다.

조정과 백성들의 뜨거운 신망을 펴보지 못한 채 22살이란 나이로 요절한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이 24살로 비명하며 아내를 위해 지은 사랑의 선물인 낙선재에 들어섭니다.

 

 

24대 헌종은 문예에 조예가 깊은데다 미남으로 섹스도 여간 밝히는 왕 이였습니다.

왕비(효현왕후)가 16세로 세상을 떠나자 자식이 없던 헌종은 서둘러 왕비간택을 하게 되는데, 이때 두 번째 왕비 효정왕후로 홍씨가 선택됩니다.

 

 

그러나 헌종의 마음을 불사른 여인은 홍씨가 아니라 마지막까지 홍씨와 같이 경합했던 경빈김씨였습니다.

대비인 순헌왕후 김씨가 홍씨를 간택하자 헌종은 대비의 뜻을 따랐을 뿐, 마음은 경빈김씨에게 이미 빼앗긴 거지요.

 

 

효정왕후 홍씨와 결혼하여 2년이 되도록 자식이 없자 헌종은 그걸 빌미삼아 17세의 경빈김씨를 후궁으로 정식 간택하여 연정의 불꽃을 태우게 되지요.

1847년 헌종13년의 일입니다. 헌종은 창덕궁대조전에서 좀 떨어진 곳에 경빈김씨를 위해 낙선재를 짓고, 거기에 ‘석복헌’이란 집을 지어 허니문에 들었습니다.

 

  "그대의 눈빛이 되려, 그대의 마음이 되려, 내가 여기 이 자리에 왔나 보다. 무엇이 나와 그대를 만나게 했는가. 나는 그 뜻을 따르리라."

헌종이 독백이라도 하는듯한 시는 경빈김씨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가늠케 합니다.

조선의 임금이 아니, 근세사에서 남정네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낙선재만한 누각을 지어 선물한 적이 있었던가요?

 

 

인도무굴제국의 황제 샤 자한이 부인 몽타즈 마할이 애를 낳다가 죽자 아내를 추모하기 위해  22년 걸려지은(1648년) 타지마할도 죽은 왕비를 그리워해 지은 궁전이라지요.

더구나 헌종은 나이도 어린대다, 재위기간도 짧았으며, 사색당파가 기승을 부리던 때라 소신껏 개혁정치를 펴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런 어려운 여건 속에서의 헌종과 경빈김씨의 밀월여행은 참으로 안타깝게 끝납니다. 결혼 이태만인 1849년 헌종은 요절하고 맙니다.

기원하던 후사도 남기지 못하고 말입니다. 경빈김씨를 너무 사랑한 탓일까요? 아님, 궁녀들 치마폭 헤집는 육림산책을 워낙 즐긴 까닭이었을까요.

반반한 궁녀들을 가만 두질 않했던 현종이지만 정작 정비인 효정왕후 홍씨는 독수공방 한숨 속에 지겨운 밤을 지세우게 만들었습니다. 

 

 

과부가 된 후궁은 궁을 떠나 사가로 가야합니다.

경빈김씨는 남편이 선물한 낙선재에 더 이상 머물 수도 없어 사저에서 독수공방하다 1907년 77세로 헌종의 뒤를 쫓아 이승을 하직하지요.

 

허나 경빈김씨는 먼발치에서나마 사랑의 선물-낙선재를 보며 꿈같던 2년을 추억하며 애련을 기쁨으로 승화했었는지 모릅니다.

짐짓 죽은 후에 아름다운 타지마할궁전을 선물 받은 몽타즈 마할 보다는 행복한 여자겠단 생각을 해보게 합니다.

 

그토록 사랑해준 헌종을 생각하며 경빈김씨는 반세기 넘도록 독야청정 후궁으로써 귀감 되는 삶을 살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낙

선재 뒤뜰을 걷다보면 좁은 공간을 얼마나 아기자기하게 자연과 버무려 내명부들이 단조로운 일상을 잠시나마 잊게 했는지를 가늠케 합니다.

 

이후,  2012년에 보물(제1764호)로 지정된 낙선재(樂善齋)는 갑신정변(1884년) 직후 고종의 집무소로 사용했고, 이후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 이은이 1963년부터 1970년까지 살았으며, 1966년부터 1989년까지는 이방자 여사가 기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