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벌레와 초콜릿
새벽5시 반쯤 화장실에 다녀오던 난 주방으로 통하는 응접실 바닥에 웬 커다란 바퀴벌레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는 걸 발견하고 의자에 벗어놓은 나의 반바지를 들어 힘껏 내리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달아나는 놈을 잡으려면 촌음도 지체할 사이 없이 뭔가로 때려잡아야한다.
놈의 민첩성과 적응력은 지구상에서 가장 빼어나 모든 곤충 중에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만물의 영장이란 사람보다 까마득히 유구한 생명체가 아니던가.
반바지자락에 맞은 놈은 발랑 뒤집혀 허공에 발길질을 하느라 용을 쓰는데 머리통에 웬 뿔이 두 개가 있질 않는가. 아뿔사! 놈은 바퀴가 아닌 사슴벌레였다.
밤중에 날벼락 맞은 놈의 놀람 못잖게 당황하고 무안해 호들갑을 떤 나로 인해 아내까지 잠자릴 박찼다.
놈은 며칠 전 아내와 함라산등산로에서 우연케 포획한 사슴벌레였던 것이다.
놈이 억세게 재수 옴 붙은 건 끝없이 넓은 산 숲에서 하필 우리부부의 눈에 띄어 - 아니다, 사슴벌레를 키우는 서울 외손자만 아니었다면, 키우던 한 쌍 중에 한 놈이 죽지만 안했어도 놈을 생포할 생각을 안했을 터였다.
놈을 비닐봉지 속에 넣고, 엊그제 폭풍우에 쓰러진 오리나무고목 삭정이를 세 조각 뜯어 넣어주며 식용버섯 네댓 개와 막 돋아난 어린맹감나무 두 그루를 채취하여 귀가했었다.
두 뼘짜리 프라스틱 상자에 톱밥을 깔고 삭정이나뭇조각으로 은신처를 만들고 소라껍질 속에 맹감나무를 심어 버섯과 같이 넣어 놓으니, 좁긴 하지만 자연운치가 돋는 놈의 집이 그럴싸하게 완성돼 입소를 시켰었다.
인터넷을 뒤져 먹이로 우선 집에 있는 오이와 수박조각을, 재리 대신 초콜릿을 넣어 주었다.
감옥 속에서도 놈은 목구멍이 포도청 이였던지 먹이를 빨판 더듬이로 핥곤 했다.
나는 무료한 시간엔 놈을 들여다보는 재미에 빠져들곤 하는데 예정대로라면 오늘 아내가 상경하면서 갖고 갔어야 했으나 일정이 미뤄졌다.
다섯 살배기 손자는 오늘(약속날짜를 잡을 때 12일 말고 요일로 말하라고 하였었다)이 사슴벌레 오는 날로 알고 기다리기나 했었는지 외할미가 일방적으로 날짜를 미뤄도 군소리가 없었단다.
상자감옥에 갇힌 놈은 포로가 됨만도 치가 떨칠 텐데 그동안 입 다물고 탈출로를 찾다가 야행성인 기질을 십분 발휘하여 밤에 맹감나무를 타고올라 천정 공기구멍을 통해 탈출했나싶었다.
사막보다 삭막하고 살벌한 응접실을 배회하다 잠시 숨 돌리던 차 포악한 집주인한테 벼락보다 더 무서운 옷 폭탄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재수 옴 붙은 놈치곤 병신 안 된 건만으로도 행운이다.
얼마나 놀랬던지, 아님 몸이 아팠던지 오전 내내 삭정이 사이 톱밥 속에 처박혀 꿈쩍도 안던 놈이 오후엔 넣어 준 초콜릿을 움켜잡고 냠냠하고 있는 거였다.
당분음식을 먹다가 이상이 올까봐 시름되기도 하지만 단식투쟁하는 것보다야 보기 좋았다.
녹은 초콜릿이 더듬이에 묻혔던지 자주 비벼대다가 응덩이를 들더니만 물총을 쏘듯 배설물을 찍 쏘는 게 아닌가. 틈만 나면 머리맡에 놔둔 놈의 사생활을 훔쳐보는 재미에 빠지곤 하는데 초콜릿에 얽힌 관음증(Peeping Tom)의 유래가 떠올랐다.
11세기 영국에 레오프릭3세 백작이 꾀 넓은 코번트리 영토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욕심이 많아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거둬 원성이 높았었다.
아내 고디바부인은 맘이 걸려 백작에게 세금을 깎아주자고 간청을 했다.
코웃음만 치던 백작이 하루는 아내에게 제안을 했다. ‘알몸으로 말을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돌면 청을 들어주겠다.’고.
고민하던 아내는 결심하고 알몸으로 말을 탄 채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이때 마을사람들은 부인의 성심에 감복하여 모든 창문에 커튼을 드리우고 내다보지 말자고 약속을 했었다.
물론 부인에겐 비밀로 했는데 양복점 재단사 톰이 약속을 깨고 창 틈새로 말 탄 부인의 알몸을 훔쳐보았던 것이다. 톰의 비겁한 관음증은 곧 벌을 받아 눈이 멀게 되었다.
부인 고디바의 희생정신을 고디바이즘(Godvaism)이라 칭하게 됐고, 벨기에의 초콜릿회사가 사명을 ‘고디바초코릿’이라 정하고 말 탄 부인의 나체사진을 상표화하여 세계적인 초코릿회사로 성장했다.
사슴벌레한테는 나도 비열한 톰과 다름 아닐 테다. 물총 쏘듯 똥구멍을 들고 배설을 하는 놈을 훔쳐보며 히죽대는 나의 관음증 말이다.
놈은 뿔 같은 두개의 집개 발을 앞세워 돌진한다. 낮엔 삭정이나무 사이 톱밥 속에서 지내다 밤엔 어슬렁거리며 활동을 하는데 프라스틱상자를 뿔로 받는 소리가 심야의 정적사이를 빠져나와 귀청을 울린다.
어쩜 나의 머리맡에서 놈은 내가 잠들었는지를 염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탈출을 위해서 말이다.
놈이 불쌍하고 측은하단 생각에 자유를 찾아줄까 번민을 하기도 했지만 손자의 기대를 저버리기 뭣하단 핑계로 붙잡아 놓고 있다.
그래도 놈이 천연기념물인 장수벌레가 아니길 다행이라고 포로로 잡아 놓음을 자위한다.
모든 죄를 다섯 살배기 외손자에게 전가하며 난 관음증쾌감에 빠져든다.
별난 음식에 배탈 나지 말고 건강하여 오랫동안 외손자의 친구노릇 하기를 바랄뿐이다.
2011. 08. 12
'느낌~ 그 여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장이 가져다 준 행복 (0) | 2011.11.28 |
---|---|
오짐마려운 계집년 무시 썰듯한 산행 (0) | 2011.11.20 |
베르사유궁전에서의 배설 (0) | 2011.08.08 |
여성최초의 문학카페를 연 山님 (0) | 2011.06.27 |
100만 그루를 심은 나무꾼 (0) | 2011.0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