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전의 서울엘 가다 - 북악산

안국역2번 출구에서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성대후문에서 하차하여 잘 다듬어진 나무데크길을 오르다보면 와룡공원이 나타난다. 간밤에 내린 무서리는 오르막 데크길에 성애를 일궈 신경을 쭈빗 세우지만 농무 속에서 아직 잠을 덜 깬 서울의 꿈결을 엿보는 맛에 아침한기를 잊는다.

 

와룡공원서부턴 본격 성곽과 연애하며 꿈 속의 서울을 들춰보기로 했다. 내 키 두 배반은 될 성곽을 통과하여 외벽길로 나서면 북한산과 그 아래 성북동이 달려온다. 

 

두 여인이 저만치서, 이끼옷 입은 고색창연한 성곽과 그 만큼한 세월을 마주한 소나무 대열을 사열하는 듯한 산책은, 적요와 청량함과 엷은 안개를 안으며 시공간을 호흡하는 정경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행복해보이는 소풍이다.

 

Z자로 포갠 나무계단을 오르면 성곽위에 서는데 소나무숲에 숨어 성 안에서 겨울잠 자던 서울이 기지개를 펴며 얼굴을 내민다.  인구 천 만이 넘는 서울이 그 심장부가 이렇게도 조용하고 한갓진데가 있을 수 있을까 싶었다. 10분쯤 걸었을까?  말바위안내소가 빚장을 걸고  길을 막아선다. 인적이 없다. 가까이 다가서 푯찰을 읽는다.

 

동절기(11월~2월)엔 오전 10시 - 오후3시까지 입장. 하절기(3월~10월)엔 오전9시 - 오후4시까지 입장이란다. 시계는 9;40분 이었다.  소나무 숲에서  일어나자마자 얼쩡거리며 연애질을 하는 박새 한 쌍을 좇는다.

여기서  성벽을 수호하며 군복무를 하고 있는 장병들 만큼 박새들도 복받은 동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안내소 문이 열였다. 신분증을 제시하고 간단한 서명을 하면 안내푯찰을 준다. 북악산성곽길 답사동안 목걸이 장식품이다. 안내소 장병이나 간간히 입초 서는 장병들 모두가 참으로 친절했다. 성 안에서 시내촬영은 금지다. 나무데크 길엔 빙결을 막기위해 영화칼슘을 뿌려놨다. 간밤의 추위에 깔린 성애가 좀 미끄러운 탓일 테다.

 

15분쯤 오르면 숙정문이 나타나는데 멋지게 휜 소너무들이 엷은 안무를 뒤집어쓰고 병풍처럼 휘둘러 다가선다.  이 밑엔 삼청터널이라.

놈은 하루에 수 백대의 자동차를 먹었다가 내뱉곤 하는데, 동시에 소리란 소리는 모두 삼키는 통에 북악이 고요의 세계에 머물게 됨이라.

 

숙정문에 올라섰다. 숙정문은 한양도성의 4대문 중의 북대문으로 숭례문과 대치하는, '엄하게 다스린다'는 뜻의 이름이란다.

풍수학자 최양선이란 사람이 '숙정문과 창의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음으로 길을 내선 안된다'고 주장하여 태종13년부터 문을 닫고 소나무를 심어 통제했단다.

 

좀 오르면 일제가 우리정기를 쇠말뚝을 박은 촛대바위를 맞게 된다. 거기서 우측으로 튕겨난 급경사계단을 빡세게 오르면 갑자기 성곽이 옆으로 삐져나온 오르막계단을 한참 올라서는데 전망도 끝내주게 좋은 곡장(曲墻)이다. 이곳과  인왕산에만 축성됐다.

성벽을 쌓다가 요충지엔 ㄷ자형으로 돌출하여 쌓은 성을 곡장이라 한다.  적과 대적하기 좋은 험한 곳에 요충지로 쌓는 곡장에서 조망하는 북악정상이 코앞에서 가파르게 치솟았고, 좀 멀리 눈 앞의 북악스카이웨이 뒤로 북한산 준령이 장엄하게 펼처진다.

 

이곳의 성벽들은 잘 보존된 게 많단다.  태조이성계가 1394년 천도한 후 정도전을 시켜 1396년 1,2월과 8,9월에 쌓은 최초의 성(메주돌형)과 세종이 쌓은(장방형의 돌)성, 그후의 숙종때(정사각형 돌)의 성벽들을 한꺼번에 볼 수가 있다. 

태조때 4 개월간 20만 명, 세종 땐 32만여 명의 인부가 동원된 역사(현존성벽은 10km남짓)였는데, 이곳 성은 세종과 숙종때 축성한 성이란다.

우두커니 서서 600여 년전의 축성모습을 상상해 보려했지만 감도 안잡힌다.

 

사대문안의 서울의 모습이 뿌연 안개 속에 빌딩숲으로만 다가선다. 바로 아래 경복궁이 희미하게나마 모습을 들어내고, 남산타워가 피뢰침처럼, 인왕산이 대머리로, 북한산이 힘차게 준령을 거느린 채다. 무식한 내가 일별해도 참 멋있단 생각이들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 "백악산을 보고 하늘을 꿰뚫는 목성(木星)이궁성(宮城)의 주산(主山)이 될 것이다."라고 기술했다. 또한 도선국사도 '왕씨 뒤를 이어 이씨가 임금이 되고 한양에 도읍한다'고 했다.

 

풍수지리에  까막눈인 나도 백악산 청운대에서 조망하는 서울은 배산임수의 명당자리란 생각에 미치는 거였다.

1395년 이성계의 명을 받은 정도전은 한양에 궁궐과 종묘를 짓고 그해 10월 5일엔 경복궁도 완성했었다.

 

 

청운대를 내려와 백악마루를 향하다보면 늘씬한 소나무 한 그루가 흰 반창고를  십여 군데  바르고 있다. 

1968년 1월21일 북한공비 30여 명이 청와대를 습격하려 기습했다가  군경과 교전한 상처를 애꿎은 소나무가 대신하고 있는 거였다. 북한에 대한 트라우마는 소나무도 진저리 날참-.

 

그나저나 참으로  심난한 것은 북한이 준 트라우마를 이젠 우리끼리 못마땅한 상대에게 뒤집어씨워 종북놀이를 즐기고 있나 싶은 게다. 

해바라기성향의 똑똑하고 잘난 지체높은 양반들이 말이다. 내 잘 났다고, 내 구린 것 감추겠다고 상대를 몰아치는 불쌍한 메카시언들이 말이다. 그들에게 1`21소나무의 반창고를 떼다 덕지덕지 붙여주고 싶다.

 

백악마루에서 창의문을 내려오는 계단은 넘 가파르다. 해서 뒤돌아보면 성벽의 위용이 대단한 절벽인,  요세화의 천부적인 지형이한 걸 어림하게 된다. 600여 년전에 성 쌓기에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872명이 성 쌓기 노역하다가 죽었다니 그럴 만하다고 수긍이 간다. 정작 임진난땐 제대로 방어해보지도 못하고 내주며 도망가기 바빴었고, 이괄의 난 땐 인조임금은 말 타고 허겁지겁성 도성을 빠져 우면산고갯길에 닿자 호위병들이 팥죽을 끓여 올리니 말위에서 먹었다해서 말죽거리라 했다는 허탈했던 성 이였던 거였다. 불쌍한 건 백셩이라.

 

저 아래 사직동엔 온갖 행사때 동원 돼 부역을 했던 나례군과 연회의 도우미였던 악인이 살았고,  내자동엔 노동잡부,  혜화`명륜동엔 백정,  충신동과 돈의동엔 공장과 방물업자,  종로엔 상인,  다동엔 기생,  천엔 중인,  동숭동엔 갓바치들이 살았다.

옥인동과 궁정동, 율곡로 일대에 사대부 양반들이 거주했다고 한다. 서민들 집이라야 담장이 어른 키를 넘지 않아야 했고, 집 처마끝은 담장보다 낮게 해야했으니(택리지에서)  당시 동네란 게 납작집이 다닥다닥 붙은 개딱지였을 테다.

 

서민들은 얼굴빛도 달랐으니 마포새우장사는 얼굴이 까맣고, 왕십리미나리장수는 목덜미가 새까맣단다. 장사차 본정에 나올 때  새우장사는 해를 정면에서, 미나리장사는 등뒤에서 받은 탓이리라. 

저기 경복궁 옆은 옛 시냇물이 흘렀는데 북악과 인왕의 계곡물이 하도 맑아 청계천이라 했고, 그 물길은 다시 중량천과 만나 한강으로 흘렀다.

개딱지 집들만 아니었담 그때의 한양시가지도 참으로 아름다웠으리란 생각이 든다.

 

가파른 계단을 한참 내려와야 창의문에 다다른다. 탐방안내소에서 푯찰을 반납하고 창의문에 들어섰다. 4대문 안의 북쪽으로 난 소문인 셈인데 가장 잘 보전 된 성문이란다. 그 대문을 왕복하고 돌난간에 앉아서 어림도 없는 그때로 타임머신여행을 떠나고싶어 했다. 

쉬엄쉬엄 오지게 해찰했어도 두 시간의 답사길이었다. 넘 고즈넉하고 옛스럽고, 돌담 하나하나에 굴곡의 역사가 이끼마냥 끼어있는 서울성벽은 필히 한 번쯤 걸어야 할 길이란 생각이 들었다.

600년 전의 우리선조들의 열정과 한숨이 서린 역사의 숨결을 이곳만큼 느낄 수 있는 곳이 어디 또 있겠는가!  수도 한 복판에 이토록 한갓진데서 한량처럼 유유자적할 곳이 있 던가!

2013. 12. 10

 

 

 

 

Posted by peppuppy(깡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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