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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나쁜남자를 향한 엘레지 - 인왕산

나쁜남자를 엘레지- 인왕산

 

 

독립문공원에서 바라본 인왕산능선의 성벽은 흡사 흰구렁이가 꿈틀대며 오르고 있음이다. 나는 선바위입구에서 그 구렁이를 따라 인왕산엘 오르기로 했다. 지하철독립문역 1번 출입구를 나섰다.

 

마이산의 두 귀를 잘라 옮겨놓은 것만 같은 쌍`선바위는 바람이 쪼았는지 아님 우르르 몰려와 터잡은 비들기들의 보금자린지 움푹움푹 파인 자리가 멋진 설치예술품이라. 치성드는 여인네들이 예술품을 감상하는지 산신령께 기도 하는지 한참을 대면하고 있다.

 

그 선바윌 뒤로하면 기똥찬 바위들이 군집하여 훼훼 휜 소나무와 어울려 바위산 인왕산의 때깔을 한층 품격 높이는 거였다. 이곳의 풍광은 인왕산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독특한 진경을 이룬다 할 것이다. 더구나 서울도심을 가장 가까이 파고 들어 송림과 바위숲 사이로 조망하는 서울의 풍치는 전혀 별맛이다. 

 

 

 거대한 바위속에서 소나무가 빨다흘리는 눈물같은 석간수를 한 모금 받아 해갈 하는  바가지샘은 기가막힌다.  종지기타래박으로 한모금 목 축이고 인왕산성에 접근한다.  여기 소나무들의 일생을 생각하면 생존이란 게 얼마나한 질곡인지를 가늠할 수가 있을 것 같다.

 

 

간밤에 서설이 내렸던지 음지에 싸락눈이 엷게 쌓였다. 흰구렁이처럼 꿈틀대며 기어오르는 인왕산성은 옆에 계단을 끼고있어 산님들과 동행하며 역사의 각질을 한겹씩 벗곤 한다.  우측 절애 저만치 시내 고층빌딩은  안무를 휘두르고 있어 서울을 한폭의 몽환적인 수채화로 그렸다.

 

 

 

근데 쬠만 오르다보면 멀리서 본 산성이 흰구렁이 같단 표현은 잘못됐음을 시인하게 된다.  바로 성벽건너에 바윌 딛고 하늘을 향해 두 촉수를 허공에 들이밀고 있는 달팽이를 발견하기 땜이다.  그놈 참 잘 생겼다.

 

 

흐물하고 느깨질 것 같은 욕정의 몸뚱일 껄끄런 바윌 기어오르려 죽을판 살판 짜내는 육수의 흔적일가, 아님 짝짖기하느라 흘린 정액의 허물일까?  하연 흔적들은 달팽이의 분비허물이란  비유가 제격일 것이다. 어쨌던 그 욕정의 허물들,  살벌한 인생사의 추하고 아니꼬 운 걸 죄다 파묻겠다는 듯 농무는 한낮이 되도록 자욱하다.

 

 

난 오백년도 훨씬 지난 정말 찌질하고 치사한 한 나쁜남자가  타의에 의했다가, 나중엔 자의반 타의 반으로 누추하고 알량한  권세를 꽉 움켜쥐겠다는 별로 자랑스러울 것 없는 역사 한 토막을 생각하며 빡센  계단을 쉬엄쉬엄 오른다. 

 

 

5백여 년 전인 1506 음력9 월 초하룻날 밤, 연산군에  반기를 일단의  반정들이  말바굽소릴 요란스레 울리며 진성대군의 집을 에워싸자  심약한 그는 자결하려 했다.  이때 부인 신씨가 군사들의 말머리가 우리를 향하고 있으면 우린 의당 죽어야 하지만, 말꼬리우릴  향하고 있음  우릴 호위하기 위함입니다.' 라고  말하며 밖을 내다보니 말꼬리가 집을 향하고 있어 자결하지 않았고, 그 남자는 담날 뜬금없는 날벼락 속에 임금에 추대됐으니 바로 중종이다.

 

 

부인 신씨의 영특하고 담대한 위기대처가 낳은 행운인 셈이었. 그 총명하고  대범함 땜에 신씨는 폐비란 올가미덫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되지만 말이다.

중종반정때 신씨 친정아버지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으로 반정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고, 신씨자신마져 반정공신 박원종 등으로부터 (총명한 탓에)후한이 두렵단 핑계로 폐위되 인왕산 기슭으로 쫓겨난다.

 

 

꽥소리도 못한 심약하고 찌질한 중종은 경회루에서 인왕산을 처다보며 신씨를 그리워했는데, 그 소식을 접한 신씨는 궁중에서 입었던 붉은치마를 바위 위에 펼처놓고 일구월심 애뜻한 연심을 전하려 했다. 그 바위, 인왕산정상 밑 주름진 바위가 있는데 이름하여 치마바위의 유래다.

 

 

중종은 신씨 폐위 뒤 장경왕후 윤씨와 결혼했으나 9년 후 장경왕후가 죽었을 때 신씨복위가 거론 됐지만 모른채 하며(나중에 단경왕후로 봉임 됨) 되려 상소를 올린 박상과 김정을 유배보냈다. 이때  (중종10년)사간원 정언에 임명된 조광조가 "생이별한 부부를 다시 맺게 함이 지극히 옳은 일인데 귀양보냄이 잘 못이니 간언한 사간원과 사헌부 관리들을 해임하라"고 요구하여 윤허를 받아냈다.

 

중종은 조광조를 앞세워 공신파를 내첬지만 신씨를 복권시키진 않했다. 조광조를 중용해 왕권만 튼실하게 챙겼던 치사한 남자였다. 이젠 배따시고 잠자리 푹신한 왕인데 인왕산의 붉은치마는 거추장스럽고 긍색맞다고 여겼을 게 뻔했다. 

 

 

자결하려던 자신을 구해줘 왕이 되게해준 부인의 애끓는 순정을 끝내 내쳤던 중종은 나쁜남자였다. 애초 남자의 사랑이란, 왕의 아랫도리는 쫙 깔린 궁녀들의 물건인지라 믿을 게 못된단 걸 신씨라고 모를가 만 일말의 재회를 꿈꿨을 테다.  당시엔 헛 똑똑일 수 밖엔 없었을 테지만-.

 

 

그 나쁜남자가 어쩌다 여기 바위에 펴논 홍치마를 힘끔쳐다봤다는 경회루가 멀리 아스름이 보인다. 범바윌 밟고 인왕정상(338m) 아래 주름진 치마바윌 찾아 바라보면서, 나쁜남편을 향해 일말의 연정을 삭히며 회한의 넋을 저 넓은 바위에 새긴 채 망부석 됐을 단경왕후신씨를 그려봤다.

 

 

한참을 치마바윌 처다보다가 성곽을 끼고 하산하다 자하문쪽 갈림길에서 기차바위쪽으로 하산하기로했다.   바위산에 하도 길고 요상한 기차모양의 바윌 타고 홍제역에서 전철을 탈 속셈으로 방향 튼 하산길인데 산님이 별로 없어 초행길이라 다소 부담스러웠다.

 

 

북악산 준령이 자하문에서 잘려 인왕산이 별산이 된 셈인데 어디서 산행을 시작했거나간에 두 시간 반남짓이면 완주할 것 같아 산님들께 딱 좋은 코스란 생각이들었다. 더구나 유려한 풍치 못잖케 애틋한 러브스토리까지 품은 산이라서 서울사람들의 연인산이라 할 것이다.

 

요즘 세상엔 나쁜남자 못잖은 여자도 많다. 아쉬울 땐 아양  다 떨다가 배따시고 등 따시면 까도녀 되는 건 시간문제고, 최고위층 여성도 예왼 아닌성 싶어서다.  갖은 것 다 털어 청기와집 전세들게 해주니 귀 막고 지 잘난 채만 하려는 골든`걸을 보면서 치마바윌 다시 한 번 돌아봤다.

 2013.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