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산-선암사-순천갈대밭 해넘이
오전 10시, 국도 22번 승주읍접치에서 호남정맥 산등성이를 오르자 조계
산이 팔 뻗어 반기는 건 바람과 나목들 뿐 이었다.
바람은 철도 잊었는지 엉엉 울고 있다. 울면서 달려드는 놈들 땜에 덩
달아 나도 눈물이 앞을 가려 손수건 꺼내기를 나잇살만큼은 했을 테다.
나일 먹으면 눈물도 헤픈가?
그나저나 저렇게 슬피 우는 바람은 어디서 온 놈들일까?
다대포구에서 지금쯤 미친년처럼 머리채 풀어헤치고 있을 갈대의 설
음일까. 윙윙 울어대는 바람결에 덩달아 나무들도 운다.
깨 홀라당 벗고 말라비틀어진 가랑잎 한두 개 어쩌다 달고 몸부림치며
울고 있다. 파뿌리 돼버린 그늘사초들이 나목밑둥치에 창호지 도배를
했는데, 그 위를 낙엽들이 우루루 몰려다니며 배회를 하고 있다.
아니 제 자릴 찾느라 부스럭대며 바람한테 묻고 있나? 낙엽이 바람등
에 탔나보다. 제 할 일 다 한 낙엽도 마지막으로 가야할 곳이 있는가?
놈은 싹 틀 때부터 예쁘게 살아가는 길을 안다. 여리고 여린 채 햇살과
싸우고, 미친바람에 맞서며, 뿔난 폭풍우에 몸까지 내맡긴다.
맨몸으로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내야 이쁜 낙엽으로 삶을 마감하는 생
애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순간순간을 게으름피우지 않고 오롯하게 살아야 고운낙엽이 돼 어미
발부리에서 겨울이불로 체온 나누다가 지 동생들의 젖줄이 됨을 알기
땜이리라.
해서 낙엽은 그의 일생만큼 아름답다. 아름다운 생이라 죽어서 썩어가
면서도 냄새마저 향기롭다.
낙엽은 바람과 마지막 허니문을 하면서 나를 조계산정(884.3m)에 안
내한다.
정오 좀 못미처 잔챙이나목들이 에워 싼 아늑한 자리에 배낭을 풀었다.
나비아타신랑과 여주, 나 셋이 건성으로 요길 했다.
바람마저 쉰 굴목재 쉼터부턴 만추는 절경을 뽐내는데 선암사는 울울
고고한 편백 숲으로 우리를 마중하고 있다.
아까 얼마나 훔쳐냈던지 눈물도 멎고, 눈물이 마르자 바람도 자지러들
었다. 가람은 고즈넉했다. 기품있는 서기가 우릴 경건하게 했다.
눈물이 나걸랑 기차를 타고, 아니면 걸어서라도 선암사 해우소를 찾으
라는 정호승님의 시의 무대인 ‘선운사 뒤 ㅅ간’ 앞에 섰다.
나는 흘릴 눈물이 없다는 듯 뒷간 앞에 맹맹하게 서서, 펑펑 쏟아내겠
다고 들어간 나비아타신랑을 한참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뒷간 앞에 쪼그리고 앉아 쪼그라든 울움보를 찾는 거였다.
가난타고 울고 싶걸랑 선암사 가라
선암사 뒷간에 가서 엉엉 울어라
뒷간서 웅크리고 앉아 신세 한탄하고 있음
천년동안 똥오줌 받아먹는 뒷간 빙그레 웃고
산사바람은 ‘개운하게 쏟소’ 하며 속삭인다
육백오십 년 된 소나무뿌리가 꿈틀대며
걸러낸 석간수로 속 훑어내면
육백 살 먹은 매화향에 ‘방하 착!’ 한다
방하 착, 하고 싶걸랑
오늘 기어서라도 선암사 뒷간으로 가라
-선암사 뒷간에서 詩 ‘선암사’를 흉내 내다-
실컨 퍼냈던지, 울었던지 나비아타신랑이 만면에 웃음 가득 한 채 어슬
렁대며 나오는 거였다. 그도 방하 착! 한 걸까.
그가 말 한다. 방하 착의 반대는 ‘착득거(着得去)’라고.
우린, 육백오십 년 된, 그 까마득한 세월동안 사람들이 뒷간에 쏟아 낸
오물을 빨아먹으며 허리 구부정한 채 오늘도 정정한 우람한 와룡송 앞
에 섰다.
절로 합장을 하게한다.
사람들의 뒷물 다 빨아 먹으며 마음을 비운 소나무는 그렇게 걸러낸
청정수를 옆에 석간수로 만들어 다시 우리들에게 보시하고 있었다.
바가지 가득 받아 꿀컥꿀컥 목구멍으로 넘긴다.
오장육부가 시원하다. 나비아타신랑은 얼마나 시원할까?
조계산 오르면서 바람 땜시 죄다 흘린 눈물이 아깝다.
여기 뒷간서 ‘실컨 울고’ 방하 착! 하는 건데~?.
육백 살 먹은 매화나무 앞에서 우리는 옷 벗은 매화살 냄새라도 맡으려
고 방정을 떨었다.
조계산 장군봉이 사대천왕노릇 하여 천왕문이 없고, 대웅전 가운데 어
간문이 깨달은 부처님 외엔 출입 못한다 해서 만들지 않아 없으며, 본
존 옆에 협시보살상이 없으니 삼무(三無)가람이라는 선암사 대웅전을
뒤로하고 삼인당거울에 쌍판 보러 간다.
일주문을 나서면 삼인당인데 명경지수에 나타난 난 도둑놈처럼 새까
맣다. 그 옆에 세 그루의 전나무를 비롯한 몇 백 년씩 된 노거수들이 산
사를 에워싸 가람의 위엄은 켜켜한 세월마냥 돋보이게 한다.
선암골짝을 아취형으로 건너는 승선교 아래서 강선루는 액자 속의 그
림처럼 다가서서, 공간을 선으로 잇는 건축미의 극치를 맛보게 하는데
시간 없어 지체할 수가 없다.
순천만 갈대밭으로 숨어드는 해님 얼굴 보러가야해서다.
서들러 저녁을 먹고 순천만을 향했다.
순천만 갈대숲은 황금빛 너울춤을 추고 있었다.
땅거미 내릴 무렵이면 여느 관광지든 썰렁한 파시이기 십상인데 순천
만 갈대밭은 거꾸로 문전성시다.
다대포구를 어슬렁거리다 얼슬렁어슬렁 달려 온 사각바람은 갈대와
만나 사각사각대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대체 무슨 대화를 하기에 그렇게 지겹지도 않을까?
해님 맞느라 수다를 떠는가.
소곤거리다가 갈대는 일제히 고갤 흔들어대고 사각바람은 하얀 갈
대머리칼을 사뿐이 밟고 멀찍이 붉으스레지는 하늘금을 향해 달려
간다.
하늘금 사이로, 갈대 숲 너머로 붉은 햇덩이가 숨어들며 쏟아내는 편광
은 자연만이 연출하는 황홀이라! 언어도단-.
텅 비는 순간이다.
방하착까지는 아니라도 뭔가 하나쯤은 욕심 버리는 순간이다.
황금갈대숲이 어둠에 사위어들자 내 뒤통수에 걸친 하늘금에선 희멀
건 달님이 청승맞은 인사를 한다.
난 여태 그렇게 큰 달님얼굴을 뵌 적이 없다.
또한 오늘처럼 그의 모습이 청승맞다고 여겨본 적도 없다.
지금처럼 달빛이 가까이서 내려와 옷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서 내 살갗
을 닭살 돋게 한 적도 없다.
뭔가 허허롭다. 어스름천지가 휑하니 구공이다.
이렇게 많은 갈대가 밤과 낮의 경계에서 속닥거리며 하얀 머리채로 파
도를 일구는 황금파도도 본 적이 없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땅거미 속에 검정두건을 쓰고 침묵의 엑서더스
를 펼치는 퍼포먼스를 본 적도 없다.
위대한 자연 앞에선 인간도 위대해지는가 보다.
조계산을 사랑하고, 선암사를 사랑하고, 순천만갈대밭을 사랑한다.
그들이 연출하는 위대한 자연을 사랑한다.
2013.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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