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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담대한 수묵화의 전당 - 남덕유산

담대한 수묵화의 전당 - 남덕유산

 

결코 상팔자가 아닌 터라 서울서 외손들과 뒹굴고 있는데 만수 변회장이 남덕유산행을 알리는 메시지를 줬다. 그날부터 난 상고대에 미쳐버리는 데자뷰에 빠져들었는데 소이는 십여 년 전에 남덕유산에서 난생 첨으로 상고대의 신비경에 홀딱 반해버린 탓이다.

짙은 코발트색 하늘바다 속에 무성하게 핀 산호초 군락은 난생 첨으로 겨울산에서 맞는 황홀경이었던 것이다. 난 그때의 감상을 <남김없이 내려놓은 우리명산 답사기>란 책에 어쭙잖게 그려놨는데 이번 겨울 들어 상고대를 접할 행운을 잡질 못해 남덕유산행 메시지는 나를 싱숭생숭 달뜨게 했던 것이다.

 

 

엊그제 잠시 귀가한 난 오늘 남덕유산행에 끼어들었다. 근데 날씨가 너무 푸근하다. 오전 9시 반에 영각사 들머리에서 파고든 남덕유산자락은 재킷을 벗어야할 정도여서 상고대꿈은 아예 접어야 했다. 반시간 쯤 오르다 빙판등산길을 아이젠에 의지해야 했다.

다시 반시간 남짓 헉헉댔을까? 싸한 한기가 목덜미를 파고들고 시야가 확 트였다. 푸른 하늘에서 쏟아지는 강열한 햇살은 나목들을 숯 검댕이칠 하고 눈을 음지로 몰아부처 흑백의 콘트라스를 일으켜 능선을 만들어 파도를 일군다.

 

 

동행한 고문님, 달봉님, 저녁노을님과 장대한 수묵화에 빠져드는데 저녁노을님이 운무에 등걸만 내보인 백두대간 속의 산들을 가리킨다. 허나 내겐 흑백의 산능이 무수한 파도를 일궈 하늘끝을 향하다가 거대한 흰 띠를 만들어 사위를 빙 둘러치며 땅덩이는 둥글다는 걸 입증시키고 있나 싶었다.

실로 담대한 수묵화에 압도된다. 겨울산은 단순 담백하다. 그 간결한 무색무성(無色無聲) 땜에 태초의 우주에 타임머신 타고 들어서는 기분이어 신비하고 장엄하다.

오늘같이 청명한 날엔 무한대의 시공마저 푸르게 착시할 정도여서 하늘은 더더욱 코발트빛을 띈다.  군더더기를 여지없이 떨어버린 맨얼굴의 자연은 겨울산만이 선물하는 특권이다.

무색무성의 절대고독한 자연의 담대함에 미쳐버리는 산님들은 그래서 고난스런 겨울산행을 하는 것일 테다. 남덕유산은 철계단의 험로다. 아이젠에 스틱에 중무장한 산님들껜 지난한 코스이기도하다.

 

 

정오쯤 정상(1507.4m)에 서자 비로써 소리하나가 귓가를 때린다. 무딘 칼바람이다.  산님들 등쌀에 인증샷도 포기했다. 바람을 피해 옹색한 눈밭에 엉거주춤한 채 시장기를 때운다.

파도가 푸른 하늘과 맞닿는 사위는 두꺼운 흰 띠를 들러 여기가 지구(地球)라고, 그래 지금 난 그 한 중심에 있다는 걸 덕유산정은 지각시켜주고 있는 거였다.  상고대가 아니어도 남덕유산은 쾌청한 날씨로 또 다른 우주의 신비경을 연출하고 있었던 거다.

월성치를 향하는 북벽 하산길은 눈사태다. 걷기 반 미끄럼반이다. 흰 솜이불 두텁게 덮고 선 덩치 큰 나목들의 자태가 빼어나도 뒤따르는 산님들 등쌀에 완상할 겨를이 없다.

 줄곧 고문,저녁노을,달봉님 세분과 동행하는 오늘의 산행도 내겐 별나다. 더구나 난 오늘은 디카도 없다. 스마트폰에 그 비경을 담아본다.

풍광을 담는 일에 프로페셔널 달봉님은 셔터를 누르고 싶어도 마땅치가 않나보다. 까닭 없이(?) 우릴 세우고 까탈 없이 우린 그의 모델이 됐다.

 

 

이고문님 말따나 새까만 얼굴이 설국에 어울리려나? 하긴 하얀 설국의 물체는 모두 까맣다보니 괜찮을 성싶었다. 오늘 난 사람 좋은 달봉님 모델이 돼 산행 중에 가장 많이 쌍통을 드밀었던 것 같다.

월성치에서 월성계곡을 탄다. 골짝이라 적설은 무릎까지 덮친다. 한 시간쯤 눈과의 싸움질을 하니 소리하나가 찾아왔다. 눈 속에서 바윌 미끄럼 타는 골짝물소리였다.

가장 춥다는 소한날에 남덕유산의 풍정이니 그 또한 별미라! 소한에 고드름을 주렁주렁 달고 땀 뻘뻘 흐르는 남덕유산골짝 바위의 팔자도 결코 상팔자는 아닐 성싶었다.

오후2시 반쯤 황점날머리에 닿았다. 오백년을 남덕유 지킴이 하면서도 아직 미끈한 고욤나무 아래 비닐하우스에서 캡틴님의 환대를 받았다. 오랜만에 뵌 진정한 산꾼인 그녀는 고욤나무처럼 미끈했다.

그녀가 "늙었죠?"라고 물었다. "아뇨!"라며 예뻐졌다고 답했다. 그녀가 모두의 잔을 부딪쳤다. ‘씨’자로 운 때는 그녀의 기상천외한 건배사는 아껴두겠다.

그런 모든 산님들의 얼굴은 해맑다. 모두 건강히 즐산이어갈 갑오년이길 빌어본다.                                2014. 01. 05

 

 

 

 

 

 

 

 

#. 위 그림 5컷은 달봉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