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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거미만도 못해서야!

왕거미만도 못해서야!

언제부터였었는지 모른다. 8월 초순 어느 아침나절이었다. 빨랫줄에 몇 가지 세탁물을 널려는데 빨래줄 위로 커다란 거미집이 아침햇살을 걸러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반지름이 한 자쯤은 될 성싶은 거미집은, 처마 밑의 빨랫줄이 늘어지지 않게 4층 테라스에 동여맨 세로줄로 붙들어 맸는데, 그 직각을 이룬 공간에 보기에도 멋있고 시원하게 자리했다.

나는 세탁물이 좀 많아 무의식중에 거미집의 세로축인 거미줄을 끊었다. 거미집은 용수철처럼 오그라들어 한 쪽이 완전히 망가졌다. 옷가지들은 그렇게 한 후 널어졌고, 그 후에도 아내와 난 빨랫감이 많을 땐 거미집 부수기를 다반사로 했었다.

8월 하순 어느 날 오후, 아내의 심부름으로 세탁물 몇 가지를 갖고 마당에 선 난 희한하고 살벌한 곤충의 사투에 멍하니 빠져들었다. 잠자리 한 마리와 거미가 거미줄 위에서 곡예를 하듯 격투 중이었고, 올가미에 걸렸을 때 이미 승부가 난 게임이긴 했지만 잠자리의 몸부림은 거미줄 몇 가닥을 망가 놓아 집은 반파 되다시피 한 채 였다. 

거미의 은빛포승줄에 칭칭 얽히며 미라가 돼가고 있던 잠자리와 십여 분도 훨씬 넘길 사투를 끝낸 거미는 처마 밑으로 사라졌다. 난 오늘 놈을 처음 봤다. 짙은 갈색의 똥파리만 한 몸뚱이의 놈은 은신처에서 숨을 고르다가 시장기가 도지면 슬금슬금 다가와 가사상태일 미라잠자리에 독한 체액을 주입하고 액체화 시켜 빨아먹고 껍질은 버릴 것이다.

난 그길로 인터넷에서 곤충 아닌 거미의 일생을 훑었다. 머리와 목과 배로 구분 되는 곤충과는 달리 거미는 머리와 몸통뿐이고 다리가 여덟 개나 된단다. 인간의 역사는 놈의 역사에 비해 애숭이다.

지구상에 3~4만 종이 있는데 우리나라엔 약 700종이 살고 있단다. 우리집 놈은 왕거미다. 놈은 여름에 짝짓기를 하는데 수컷이 암컷집에 도적처럼 기어들어 집 가장자리쯤에서 기타를 치듯 거미줄을 튕긴단다.

은신처에서 노려보고 있던 암컷이 싱숭생숭 발정이 나면 은근히 나와 추파를 던지게 되는데, 방적돌기란 더듬이 촉수를 집어넣어 2~3일간 정사를 벌린단다.

해서 생긴 알은 겨울을 나고 봄에 부화하여 7~8월에 성숙하는 한해살이의 삶! 모기나 파리 등 해충을 먹이로 하는 사람에겐 이로운 동물인 거미! 어떤 종 수컷은 사마귀처럼 교미 후에 암컷의 영양식이 되기도 한다나?

암튼 그 생존의 신비를 엿 본 후론 난 거미집을 절대로 훼손 안하기로 작심했었는데 9월3일 아내는 빨랫감이 많다는 이유로, 더는 내가 거미집을 신주단지인양 감싼다고 빗자루로 쓸어 박살을 내버렸다.

마침 쉬파리 한 마리를 포획하여 지 집 중앙에서 식사를 하고 잇던 중이었는데 빗자루에 맞아 1층 어딘가로 곤두박질했으니 횡사했음이 틀림없었다. 찝찝했지만 까짓 거~? 하곤 다음 날 추석맞이 역귀성차에 올라 일찍 상경했었다.

그리곤 20여일만인 오늘 귀가했다. 마당 텃밭에 상추가 키가 꺽다리가 돼 꽃을 피워 열매를 익히고, 버린 푼수 수박씨가 어쩌자고 싹을 틔워 서너마디 줄기를 뻗었으며 억세고 질긴 채송화는 여태 한창 이였다.

아내와 난 집안청소를 하고 늦은 오후, 마당에 나와 점검(?)을 하는데 빨랫줄에 상상을 초월한 기적이 벌어졌다. 깔끔히 치워버렸던 거미집-그 자리에 그대로 가을바람에 춤을 추는지, 우릴 보고 오랜만이라고 반가워 인사를 하는지 번쩍댄다.

필시 죽었으리란 왕거미 그 놈이 살아서, 아내한테 박살 맞아 원통하지도 않은지, 어떻게 예가지 올라와서 지 집 자리라고 새집을 짓다니~! 칠전팔기가 아니라 십전십일기도 더 했을 것이다. 옛 구전 한토막이 생각났다.

역적의 누명을 쓰고 심산유곡에 숨어들어 바위굴에 은신했던 왕자는 굴 입구의 거미집을 치우며 출입하다, 쫓겨난 자신을 떠올려 나중엔 거미집을 피해 드나들었다. 그런 어느 날, 수색대가 동굴 앞에 이르렀는데 대장이 동굴수색을 명하자 부하가 ‘장군님, 입구에 이렇게 거미줄이 무성한데요?’라고 대답하자 그냥 철수했던 -거미줄 땜에 왕자는 목숨을 부지하였다는 일화. 거민 왕자의 생명의 은인이 됐던 것이다.

쫓겨난 왕거미가 다시 돌아와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우리집 수문장을 했을 것 같은 - 참으로 이로운 동물 아닌가! 놈은 이십여일간 울집에서 일어난 우리가 모르는 비밀도 훤히 꿰뚫어 봤을테다. 

놈은 지금 짝짓기를 끝내고 알을 낳은지도 모른다. 100여개의 알을 낳고 어차피 수명을 다한 놈은 그 정교한 집짓기와 귀소의 DNA를 지 알들에게 전수 했을 테다.

높은 곳에 올라 똥구멍에서 액체를 뽑아 뒷발로 늘어뜨리면, 순간 실로 변해 바람을 타고 어느 지점에 엉기면 놈은 곧장 줄타기곡예를 하며 집짓기를 시작하는 곡예사,

굵기가 같은 철사보다 강한 실로 허공에 집을 짓는 목수장인, 지구상의 어떤 동물도 흉내도 낼 수 없는 건축공학박사, 기타를 치듯 거미줄을 튕기며 세레나데를 불러 격렬한 사랑을 나누는 삼일간의 밀애쟁이,

아~! 진정 멋있고 아름다운 일생을 사는 동물이려니! 어디 거미만큼만 이로운 동물로 살기가 결코 쉽지만은 아닐 것 같다.

2013. 0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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