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고 고팠던 안산 달동네 뒷길의 추억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공원-
지난 6월말에 경기대 뒤 냉천동 센트러빌아파트를 번갯불에 콩 튀겨먹듯 급구매한 둘째가 아파트단지 뒤에 안산이 있으니 우리내외더러 트레킹을 한 번 해보면 어떻겠느냐? 고 제안을 해왔다.
진즉부터 동부센트러빌아파트단지 내 204동을 눈도장 찍어놓고 복덕방에 매입의뢰를 했던 둘째였기에 이것저것 자랑삼을 게 있었던지 상경한 우리내외에게 안산산책을 종용했다.
아내와 난 간단히 도시락을 싸들고 안산을 향했다. 서소문로와 충정로를 횡단하여 경기대 뒷벽이나 인창중고 담을 타고 좁고 가파른 길을 오르면 안산에 이를 것 같아 브라운스톤·서울을 나섰다.
경기대 앞 왕복 2차로에 들어선 난 잠시 서서 씁쓸한 기억을 더듬었다. 결혼이듬해 무책임하고 찌질 했던 나는 어떤 일로 빗 더미에 빠졌고, 뒤늦게 방위병소집을 받아 북아현3동 병사계에서 복무를 했는데 이미 큰애(싱가포르 거주)까지 있어 가난에 째질 살갗도 없는 춥고 배고픈 막장인생 이였다.
그때 북아현동달동네 골방에서 막막한 생활을 하던 참 이였는데, 절친 M이 중앙정보부(국정원)시험에 합격하여 입소·연수하면서 거의 한 달치의 중국집 식권을 주었었다.
M이 중앙청 옆 풍문여고 근처 독서실에서 수험준비를 하며 구입한 식권이었는데, 식권 한 장은 짬뽕이나 자장면 한 그릇을 먹을 수 있었고, 째지게 가난했던 내게 아니, 당시엔 중국집음식은 서민들에겐 특별한 별식이기도 했다.
그 별식을 먹으러 북아현동 달동네에서 급경사내리막길을 내려와 경기대앞길을 타고 서대문로타리-광화문-중앙청-한국일보 앞- 풍문여고 옆 중국집을 십여 번 내왕 했었다.
스산한 초겨울, 큰애를 등에 업은 아낸 내 뒤에 바짝 붙어 외식(?)을 하러 반시간도 넘게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는 행군을 해야 했고, 그렇게 포식을 하고 집에 들어서면 배가 꺼져 다시 허기가 돋았다.
그 초겨울의 스산하고 허기진 외식 아닌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내왕했던 길목에 서서 처량했던 기억을 반추해 봤다. 아낸 정녕 모르는 낌새이길 다행이다 싶어 짐짓 나는 딴청을 부리며 태연해 했다.
시골에서 갓 상경했던 아내이기에 당시의 길들을 - 산전벽해가 된 시가지의 모습을 분별할 순 없을 터라 나는 시치밀 때고 경기대 담벼락을 타고 좁은 골목길을 오른다.
아내가 이 길을 알아채고 비참했던 기억을 되살리면 어떤 말을 할지? 그리고 난 뭐라 대꾸할지 잠시 멍해졌다. 좁고 가파른 골목길을 한참 오르자 센트러빌 아파트단지가 나타났다. 보다 정확히는 204동이 단지 벽돌담에 쪽문을 앞세우고 마주섰다.
둘째가 눈도장 찍었던 바로 그 아파트가 단번에 맞설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일천세대를 넘는 단지 내 아파트 중 204동은 단연 조망과 좌향이 좋았다. 게다가 안산 산책길과 경기대학후문쪽 캠퍼스를 정원처럼 애용할 수가 있었고, 서대문전철역도 아까의 경기대뒷길을 지름길로 사용할 수 있어 둘째가 욕심 낼만 했다. 출퇴근시 반시간남짓은 부러 운동삼는지라 시청 앞까지는 덕수궁돌담을 지름길로 택하면 가능할 듯 싶었다.
경기대와 아파트단지 사이 계단을 빡세게 오르면 냉천동 언덕빼기의 신일교회가 나타난다. 아파트단지 위로 독립문과 그 너머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공원이 보였다.
안산나들목을 목전에 두고 금방 무너질 것 같은 금화아파트가 누더기 옷을 걸친 흉가로 다가서, 저 아래가 옛날 와장창 무너졌던 와우아파트 자리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났다. 어쩜 센트러빌 단지가 그 자리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왼쪽아랜 북아현3동쯤일 텐데 내가 방위병으로 군복무 했던 동사무소는 어디쯤일까, 감이 잡히질 않는다. 가난도 사치일 정도로 몸뚱이 의탁할 변변한 방 하나 없었던 결혼 이듬해, 동사무소병사계에서 최초의 방위병으로 근무를 했었는데 병무담당K주사는 나에게 그깐엔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했었다.
그즈음 설상가상으로 고향후배 H의 감언이설에 속아 애먼 아내만 죽을 고생을 했었다. 서대문형무소 뒤 현저동 산동네에서 금은 세공업을 하여 금은방에 납품하던 브로커 H의 그럴싸한 허풍에 홀딱 반한 나는 방위근무로 생계가 어려워 그가 톡톡히 이윤을 챙겨주겠다는 꼬드김에 빠져 고리대금 빗까지 얻어 투자를 했었다.
두 달 후쯤 사기당한 걸 알고 죽을 상이 된 아내는 큰애를 업고 날마다 북아현동에서 현저동까지 안산 아래 산동네 길을 왕복하면서 신산한 한숨을 씹어 삼켜야 했었다.
섬처녀의 로망-서울생활은 아내에게 지긋지긋한 한숨의 세월이 됐고, 서울은 피 말리는 도시로 각인 돼 그 후 방위근무를 마치고 지방으로 삶의 터울을 옮긴 뒤 아낸 다시는 서울생활은 입에도 담지 않으려 했다.
저 아래 그 달동네, 북아현에서 현저동까지의 길고 긴 달동네골목길은 아파트단지로 탈바꿈했기 망정이지, 만약 옛 모습이 남아있다면 아내는 심난하고 처량했던 허탈의 발길을 추억하곤 눈물 훔칠지 모른단 생각을 해봤다.
역시 난 모른 채, 혹시 아내가 눈물의 길목을 알아챌까봐 곁눈질로 아내의 표정 읽기에 힐끔거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암울하고 지난했던 절망의 날들 이였다. 그런 2년을 어찌 극복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섬처녀였던 아낸 얼마나 많은 눈물로 애태움을 달래고, 그 태운 마음속은 얼마나 새까맣게 타서 속앓이를 했을까? 하긴 그 찢어지는 가난의 아픔이 있었기에 단 돈 몇 천원도 감격의 눈물보자기로 싸 모았을 테다.
그 순진무구덩어리 아내가 지금은 악녀(?)가 되가는지 자기만 따르란다. 내가 하는 건 미덥지가 않다는 게다. 아니다, 따쑨 밥 얻어먹으려면 나이들어 남자들은 무조건 아내를 섬겨야 된다는 식이다. 옳거니~! 하면서도 난 마이동풍하기 일쑤다. 알량한 자존감이다.
그나저나 둘째가 내후년엔 센트러빌에 입주하고, 우리내외가 상경하여 이 안산을 날마다 트레킹 하다보면, 아낸 이곳 지리에 눈이 트이고 그래 상처투성이 기억이 되살아날 텐데 그때의 복수(?)를 나는 어찌 감수할 수 있을까?
“여보, 참 미안했어. 그래도 그땐 자장 한 그릇이 우릴 얼마나 뿌듯하게 했어!”라고 얼버무릴까보다.
한 시간 반쯤 걸린 트레킹은 우리내욀 봉수대정상에 서게 했다. 인왕산이 무학재로 꼬리를 치켜세운 자리가 바로 안산이고 능선은 홍은동까지 안아 서대문구의 모태산인 셈이다. 북한산, 북악산, 인왕산, 도봉산, 남산, 관악산의 초록숲이 서울의 허파노릇 하여 그나마 서울은 아름답다. 정상에 서니 고층빌딩과 아파트가 밀집한 사대문 안 도심이 한눈에 조망된다.
봉수대 아래 나무그늘 아래 점심자릴 폈다. 안산은 산책길 거대공원에 다름아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도, 아물지 않을 것 같은 아픔도 내일이란 시간의 당의정을 씹으며 성실이 나를 투신하다보면 기쁨의 미소는 눈과 입가로 다가온다.
안산이란 이름도 몰랐던 산, 그 아래 달동네와 미로처럼 얽혀졌던 골목길들, 그 길목을 눈물로, 한숨으로 얼쩡거렸던 처연했던 몸짓, 식권으로 가난한 우리부불 외식데이트 시켰던 절친M과 가난한 우리부불 빚더미에 빠지게 했던 고향후배 H, 병사계근무를 내 편의대로 하라고 베풀어 되려 민망하여 안절부절케 했던 병사계K주사, 앞으로 내가 안산을 오르내릴 때면 나를 살찌울 그리움이라!
가난은 허물이 아니다. 가난은 행복해 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길목이다.
2013. 09. 27
-인왕산의 꼬리 안산자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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