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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왜 임금은 외자이름을 썼을까?

 ■왕(고려~이조)의 이름이 외자인 까닭

“<춘추>는 존귀한 사람과 친한 사람, 어진 사람의 이름을 숨겼다.(春秋爲尊者諱 爲親者諱 爲賢者諱)”

유교(동양)문화의 특징은 서양문화와 달리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존경하는 자와 친지 그리고 현자의 이름자와 호를 부르지 않는데 이를 ‘기휘(忌諱)’ 혹은 ‘피휘(避諱)’라 했다.

친한 사이에도 별칭이나 아호, 별호 등을 지은 뒤에야 마음껏 불렀다. 웃어른은 물론이고. 황제나 국왕, 심지어는 공자와 주공, 주희, 노자 등 성인으로 추앙하는 사람들의 이름자를 저촉하기만 하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아니 실제로 멸족이라는 극형을 받은 사례도 비일비재했다.

대구(大丘)를 대구(大邱)로 고처 쓴 사연은 1759년(영조 26년) 경상도 대구부의 유학자 이양채의 간곡한 상소문 “대구의 ‘구(丘)’자는 바로 공자의 이름인 구(丘)이니, 제사 때마다 공자의 이름을 함부로 침범하게 됩니다. 이름을 바꾸도록 조치해주십시오.”(<영조실록>라고 올렸었다.

매년 대구향교에서 공자의 제사를 올릴 때 축문식(祝文式)에 ‘대구(大丘) 판관’이라는 직함을 쓰는데 그것은 망령이고 불충 이라는 것이었다. ‘대구(大丘)’는 결국 정조-순조 시대를 지나며 슬그머니 ‘대구(大邱’)로 둔갑했다. 삼국시대부터 ‘넓은 공간(達)의 마을(伐)’, 즉 달벌(달구벌)의 한자이름이었던 대구(大丘)는 결국 공자의 이름을 범했다는 이유에서 글자가 바뀌었다.

1419년(세종 1년)엔 우의정을 지낸 류관(柳觀)의 아들 류계문이 충청도 관찰사(충청도지사)로 임명돼 가문의 경사였으나 부임을 매우 꺼려했다. 이유는 관찰사(觀察使)의 ‘관(觀)’자가 부친의 이름과 같아 아버지의 이름을 범하는 격이니 도저히 직무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아버지(柳觀)가 이름을 ‘觀’에서 ‘寬’으로 바꾸고 나서야 아들이 임지로 떠났다. 

세종대왕(본명 이도)이 즉위하자(1418년) 이름을 바꾸는 사례가 속출했다. 개성 유후 이도분(李都芬)은 이사분(李思芬)으로 고쳤다. 충청도공주의 ‘이도역(利道驛)’도  ‘이인역(利仁驛)’이 됐다.<세종실록>

왕의 이름자가 달라도 음이 같다는 이유로 이름을 바꿔야했다. 또 경복궁의 3개 문 가운데 중문의 원래이름은 ‘예(禮)를 널리 편다’는 의미에서 홍례문(弘禮門)이었다. 하지만 1867년(고종 4년) 흥선대원군이 청나라 건륭제의 이름(홍력·弘歷)을 피해야 한다며 ‘흥례문(興禮門)으로 고쳤다.

최초의 주자학자인 고려왕조의 안향(安珦·1234~1306년)은 140여 년이 지난 조선조 문종 때부터 안유(安裕)로 일컬어졌다. 왜냐면 문종의 초명이 향(珦)이었기 때문이었다.

고려왕조 475년 동안 34대의 국왕의 이름은 모두 외자였다. 1대 태조(건·建), 2대 혜종(무·武), 3대 정종(요·堯), 4대 광종(소·昭)….

이조에선 3대 태종(방원)과 6대 단종(홍위·弘暐)를 뺀 나머지 25명의 국왕 이름이 외자이다. 이 가운데 태조(이성계)와 2대 정종(방과), 3대 태종(방원)은 조선 건국 이전에 지은 이름이므로 두 자였다.

그것도 태조는 조선을 건국한 이후 성계→단(旦)으로, 정종은 방과→경(日+敬)으로 각각 바꿨다.강화도령 이원범은 철종으로 즉위하자 외자인 ‘변(日+弁)’으로 개명했다. 또 초명이 이명복이었던 고종은 왕위에 오르자 역시 ‘희(혹은 형)’로 바꿨다.

역대 국왕들이 외자를 택한 이유는 바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씨’였다. 백성들의 입장에서 황제나 임금, 옛 성현의 이름을 피해야 했던 ‘기휘(피휘)’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제도였다.

임금으로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거나 희귀한 글자를 골라 썼고, 그렇게 하여 백성들이 피해야 하는 글자를 한자라도 줄여 편의를 돌봐야 했다. 왕은 일부러 사전에도 없는 한자를 새롭게 만들어 썼고, 선조는 아예 역대 임금들의 이름을 대신하는 글자를 제정하기도 했다.

'짐이 곧 법이고 국가'인  왕조시절에 우리의 임금들은 백성들이 이름지을 때의 고충을 생각해 작명을 했다. 백성이 주인이라는 민주주의 한국에서 작금엔 대통령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폄하했다간 문초를 받는 세상이 됐다.  오호 통재라!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에서 간추림>-  2013.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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