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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가을도둑 & 산 도적

가을도둑의  도적(山盜賊)

가을도둑놈 되기를 작정하고 아내와 난 아침 일찍 걸 맞는 옷차림하느라 바빴다. 닳거나 구닥다리 등산복으로 차림새를 하고 간식을 배낭에 챙겨 숭림사를 향했다. 절 입구 주차장에서부터 진입로 주변 상수리나무 숲에 기어 든 우리부부는 숲에서 딍굴어도 괜찮을 도적놈차림새였다.

낙엽 위에 반질반질한 물건들이 여기저기서 눈짓을 하고 있다. 난 숨소리를 죽여 가며 눈동자 따라 발걸음과 손놀림하며 그것들을 줘 담느라 멘붕상태다.몇 십 개를 줘 천주머니에 담았을 때다.

무슨 소리가? 어디선가 고함소리 같은 게 들렸다. 허릴 펴고 두리번거린다. 저쪽 화장실 앞에서 웬 부인이 나를 쳐다보며 “여긴 스님들이 관리하니 빨리 나가세요.”라고 소리치며 나가라는 손짓을 하는 거였다. 일순 당황한 우리내왼 황급히 숲을 빠져나왔다.

도둑질이 그리 쉴리야 없지!? 쫓겨난 개새끼마냥 힐끔힐끔 대며 사찰 뒤 등산로를 따라 지천인 상수리나무 숲으로 오른다. 아까완 달리 물건들이 안 보인다. 필시 우리와 같은 도둑들이 선수 친 모양이라.

눈 씻어가며 흑갈색낙엽 위를 열심히 훑지만 물건들은 가뭄에 콩 나듯했다. 해도 연노랑갈색의 물건이 숲을 삐집고 들어온 햇살에 윤기 자르르 빤질대는 걸 발견하여 줍는 재미란 형언할 수가 없다.

청설모 한 마리가 놀라 달아난다. 놈은 잽싸게 나무에 기어오르더니 나를 보고 한참을 삿대질 하더니만 어디서 나타난 동료 한 놈과 사라진다. 아마 공룡같은 도적놈이 나타났다고 동네방네 경계령을 내리려 달아났나 싶었다.

등산로에서 벗어나 상수리나무 숲으로 들어서니 엊 밤에 떨어진 듯싶은 싱싱한 알밤이 심심찮게 발견 된다. 그걸 한 알씩 줘 담는 재미란 형언할 수가 없다.  내 발자국소리에 상수리나무가 놀랬던지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위~잉”소리를 내서 우릴 쫓아낼 셈일까? 좀만 생각해보면 나의 도적질에 분통터져 골낼 놈은 청설모보단 상수리나무 일 테다. 푸나무들은 애초에 열매를 만들 때 숲의 동물들이 포식하고도 남을 만큼의 수량을 빚는다.

겨울나기 위해 숲 여기저기에 열매를 저장해 놓고 배고플 때 꺼내먹다가 깜박 잊었던 열매가 봄에 발아 새싹을 돋게끔-그렇게 한두 그루의 후손을 만들어 숲을 이뤄간다. 푸나무와 동물은 그렇게 상부상조하며 살아간다.

허나 난 그들에게 백해무익한 도적놈일 뿐이다. 숲의 동물들은 지네들 먹이를 빼앗겨 억울하고, 상수리나무는 인간이란 도적의 반찬거리까지 만들어야 해 얼마나 등골 휘는 한해를 살아야 하는지 분해 환장할 판일 게다. 하다못해 동물들은 그걸 먹고 똥도 비료로 남기지만 인간도적은 환경오염으로 사회적낭비만 할 뿐이다. 

그렇더라도 내가 그런 자비심으로 상수리 줍는 쾌락을 그만 둘 위인이 아니다. 나의 도적질은 도토리묵 먹는 맛에 있는 게 아니라 낙엽 속에서 한 알씩 발견해 줍는 일념의 열락에 솔깃 취하기 위해서다.

도적질의 묘미에 빠져들기 벌써 한 달이 됐다. 추석 때 서울에서 막내가 영화<관상>을 쏘겠다고 해 우리 다섯 식구는 9월14일(토욜 예매표가 매진 돼 아침프로를 봤었다) 오전에 관람을 하고 오후엔 한양cc크럽 뒷산으로 트레킹을 갔었다.

등산로갓길에서 발견한 상수리알밤이 이내 우리식구들에게 보물찾기게임(?)으로 비약 됐고, 그렇게 해서 주은 알밤이 1리터는 넘었다. 애들 집에 강력믹서기가 없어 우리내왼 그걸 깡그리 갖고 귀가했었고, 뭘 만들기가 어중간하다는 아내의 구시렁에 도적질을 하기로 의기투합했다.

도적질이란 게 얄궂긴 하지만 여간 신명이 나는 게 아니다. 공짜 소득도 매력이긴 하지만 남 몰래 하는 행위의 스릴은 무탈하기만 하면 여간 쏠쏠한 게 아니었다. 더구나 그 행위의 일념의 시간들은 스님들의 좌선의 경지에서 이르는 무아지경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도 하게 했다.

도적질한 상수리알밤을 마당 한 쪽 햇볕에 말리면서 상수리 다섯 개를 화단에 심었다. 봄에 발아의 새싹을 맞는 재미도 여간할 것 같아서다. 조그만 씨알에서 껍질을 뚫고 나온 싹은 꼬불꼬불 허공을 향하다가 어느 순간 연둣빛 떡잎 두 개를 피어낼 거다.

그보다 더 신비한 건 작은 씨알 속에 그 긴 새순이 꼬깃꼬깃 어떻게 웅크리고 있었나? 싶은 자연의 신비다. 무릇 생명은 경탄해 맞을 탄생의 비밀을 갖는다. 하나의 싹을, 후손을 키워내기 위해 상수리나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량의 알밤을 만드느라 봄여름가을을 처절하게 몸부림칠 테다.

단 하나의 싹을 틔우기 위해 때론 뜨거운 태양과 폭풍우와 온갖 해충과 얼마나한 쟁투를 벌였을까? 명년 봄에 화단의 씨알이 새싹을 발아하면 나는 산야 양지바른 곳에 이식할 참이다. 도적질에 대한 사죄의 길이기도 할 것 같아서다.

꼭 튼실한 싹을 피우라고 기도한다.

2013. 10.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