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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영웅의 두 얼굴

영웅의 두 얼굴 (펌글)

             성 베르나르 협곡을 넘는 나폴레옹-자크 루이 다비드-

나폴레옹의 인기는 혁명 이후 최악이었던 총재 정부의 평판과 맞물리며 이 코르시카 출신의 ‘꼬마 하사관’에게 권력의 무게중심이 쏠리는 상황을 몰고 갔다. 정부는 이를 경계했으며 나폴레옹을 이집트 원정길에 들게 한것은 그를 파리에서 멀리 떨어트려 놓으려는 속셈 이었다. 허나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와 라인 강 전선에서 프랑스군이 밀리고 있으며 총재 정부가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집트에서 비밀리에 귀국한다. 그리고 1799년 브뤼메르(11월) 18일,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다

제1통령에 취임한 나폴레옹은 1800년 5월에 다시 한 번 이탈리아를 제압하려 알프스 산맥의 생베르나르 협곡을 넘는다. 험준한 지형과 보급 문제, 바드 요새를 비롯한 철통 같은 요새지를 근거로 한 오스트리아군의 저항에 직면한 그는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라는 말은 없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불가능에 도전하라!”고 외쳤다. 그리고 퍼붓는 빗속에서 몸소 대포를 설치하고 사격하는 등의 분전 끝에, 알프스를 넘어 밀라노를 점령했다. 그리고 6월 14일의 마렝고 전투에서는 하마터면 패배할 뻔 했지만 드세 장군 덕에 신승하였고, 운 좋게도 드세의 전사로 모든 전공을 독식한 채 이탈리아 북부를 탈환하려던 오스트리아의 의지를 꺾고 파리로 귀환할 수 있었다. 이듬해에는 오스트리아를 거듭 쳐부순 다음 뤼네빌 조약맺어 이탈리아 북부는 물론 라인강 연안과 벨기에, 룩셈부르크까지 손에 넣었다. 그는 점령한 이탈리아를 하나로 묶어 ‘이탈리아 공화국’으로 만들고, 스스로 그 대통령(나중에는 왕)을 겸임했다.

프랑스에서는 국민적 인기가 최고로 높아진 나폴레옹이었지만, 그만큼 그를 의심하고 반대하는 무리도 많아져서 암살 시도가 잇달았다. 이는 나폴레옹 주변의 사람들에게 ‘그가 후계자 없이 갑자기 죽는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그리하여 1802년, 영국 등과 아미앵 조약을 맺어 일시적인 평화를 확보하고 종신 통령이 된 다음, 1804년 5월에 황제임을 선언하고 12월 2일에 노트르담 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세습 군주가 됨으로써 후계자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고, 제2의 샤를마뉴가 되어 유럽의 지배자가 된다는 나폴레옹의 욕망을 ‘정치예술’에 특출했던 화가 다비드는 주군을 위한 성화(聖畵)를 그렸다. 주군이 탄 말발굽 아래 바위엔 보나파르트를 새겼고 그 아래엔 알프스를 넘었던 전설의 두 영웅 한니발장군과 샤를마뉴대제를 희미하게 새겨 넣었다.

   1814년3월31일, 퐁텐블로의 나폴레옹 -폴 들라로슈-

 1812년부터 나폴레옹의 운은 하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1812년 봄 나폴레옹 1세는 러시아를 위협하기 위해 폴란드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6월 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군에서 빼내온 부대를 포함해 총 45만 3,000명 가량의 병력과 함께 나폴레옹은 니에만 강을 건넜다.

9월에 모스크바에 입성하지만 별 전과가 없었고, 복귀 과정에서 엄청난 한파로 큰 재앙을 맞이한 것이다. 그후 유럽의 대부분 나라는 나폴레옹에게 등을 돌리고 오히려 대항하기 시작했다. 1813년 벌어진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연합군과의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가을에 벌어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크게 패배했다. 설상가상으로 파리는 나폴레옹의 반대파가 득세하고 있던 실정이었다.

이 그림은 이렇게 운이 쇠하고 있던 나폴레옹의 모습을 포착했다. 나폴레옹의 비서였던 루이 드 부리엔(Louis de Bourienne)이 쓴 회고록에 의하면, 1814년 전쟁 당시의 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전투에서 여러 번 승리한 후 나폴레옹은 파리를 점령하기 위해서 다시 길을 되돌려야 했다. 나폴레옹의 적들이 이미 파리를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이 드 부리엔의 회고록에 의하면, “1814년 3월 30일, 나폴레옹은 퐁텐블로로 향했다. 아침 6시, 퐁텐블로 성에 도착하자 그는 자신이 좋아하던 집무실에 틀어 박혀서 3월 31일까지 이틀 내내 나오지 않았다.” 라고 썼다.

밤새 타고 온 말에서 내린 나폴레옹은 새벽 안개에 젖어 축축해진 잿빛 코트와 흙이 묻은 부츠를 벗지 않은 채 지친모습으로 자신의 의자에 앉아있다. 이 놀라운 그림에서 들라로슈는 처음으로 나폴레옹을 ‘자신의 몰락이 곧 다가올 것을 알고 운명과 마주하고 있는 외로운 남자’로 표현하고 있다. 며칠 후인 4월 6일 나폴레옹은 퇴위 각서에 사인하고 4월 12일과 13일 밤사이에 자결하려고 독약을 먹었으나 실패 “죽음의 신은 내가 침대에서 죽는 것보다 전쟁터에서 죽기를 더 바라므로 나는 살아야겠다.”고 파리를 향하지만 끝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1815년 워털루전투에서 패해 엘바섬으로 유배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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