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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엘리자베스 키스의 한국사랑

엘리자베스 키스 & 한국의 풍경 [펌글]

엘리자베스 키스는 한국의 빼어난 자연풍경에 빠저 “너무도 아름다워 어떤 예기치 못한 프로젝트가 그 오래된 땅의 매혹적인 풍경을 망가뜨리지 않을지, 혹은 파괴하지 않을지 걱정스러워 한시바삐 그곳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동경을 느낀다.”고 기록했다.

<엘리자베스 키스. 1922> - 이토신수이 작품.

1920년대 초, 서울에서는 한국 미술사상 작지만 놀라운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서양의 여성 화가가 한국의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그린 그림 전시회가 열린 것이다. 지금이야 그림 전시회가 낯선 것이 아니지만 당시는 화가가 자기 그림들을 모아 전시회를 갖는다는 것 자체가 화젯거리가 되는 시절이었다. 그것도 전시회를 연 주인공이 한국인이 아닌 서양인, 남성 아닌 여성이었음에랴. 주인공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키스, 30대 초반의 영국 여성이었다.

                         <달빛 아래의 서울동대문. 1919>

엘리자베스 키스는 서울에서 전시회를 열기 전, 이미 1919년 일본 도쿄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한국을 소재로 한 그림 전시회가 외국에서 열리기로는 역사상 최초였을 것이다. 그 후 런던, 파리, 호놀룰루, 그리고 미국의 여러 도시에서도 전시회를 열었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장막에 가려진 채 신음하고 있을 때, 엘리자베스 키스는 한국의 순수한 모습을 담은 그림으로 구미 각국에 감동을 선사한 문화의 외교사절이었다.

<아침안개. 1922>

엘리자베스 키스는 1887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1898년 런던으로 이사했다. 집안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부모는 특별히 그의 미술적 재능을 알아주거나 키워주지 않았다. 독신이었던 엘리자베스 키스는 화가의 길을 힘겹게 걸었지만 천부적 재능을 지닌 키스는 독학으로 화가의 길에 들어선 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기는커녕 자부심을 가지고 말하곤 했다.

<아낙들의  아침수다. 1921>

영국에 있는 동안에는 그녀의 내면 깊이 잠재되어 있는 창작욕을 불러일으켜 재능을 실현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계기는 동방에 있었다. 여동생 덕분에 떠나게 된 일본 여행이 그것이었다. 여동생 엘스펫은 ‘뉴 이스트 프레스’의 편집인으로 있던 로버트슨 스콧과 결혼하여 일본에서 살게 되었는데, 아자부라는 곳에 널찍한 집을 마련하였다.

1915년 엘리자베스는 잠깐 다녀오리라는 생각으로 길을 떠났고, 그때 엘리자베스의 나이 28세, 미혼이었다. 동양은 금세 엘리자베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동양의 신비로운 색채에 매료된 그녀는 영국으로 돌아가는 배표를 팔아버리고 일본에 머물기 시작했으며 그것이 십 년이란 세월로 이어졌다.

<시골 결혼잔치. 1921>

5년 동안 일본에서 머문 엘리자베스는 동생 제시와 함께 ‘코리아’를 찾았

다. 두 사람이 한국에 도착한 것은 기미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된

지 한 달이 채 안된 1919년 3월 28일이었다.

서울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감리교 선교부에 거처를 정했다. 한국문화를 이

해하고 한국사람을 가까이 접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선교사

들, 특히 30여 년간 한국에 머문 제임스 게일 목사의 안내를 받아 그림의

모델을 구하는 한편, 한국이 처한 사정과 일본의 잔학한 식민지 정책을 파

악하게 되었다.

<원산. 1919>

주로 엘리자베스가 그림을 그리고 제시가 글을 쓴 자매의 합작품인 <올드

코리아>는 그래서 화가의 여행기인 동시에 일본의 야만성을 지적하고 한국

을 세계에 알리고자 한 인도주의자의 양심서라고 할 수 있다.

3개월 뒤 여동생 제시는 일본으로 돌아가고 엘리자베스는 계속 남아 그림

을 그렸다. 그리고 그해 가을 도쿄에 돌아가 한국에서 그린 그림들로 전시

회를 열었다. 전시회에는 일본 목판화 출판계의 대부 와타나베 쇼자부로도

참석했다.

그는 키스의 수채화 ‘달빛 아래 서울의 동대문’을 가리키며 이를 목판화로

만들면 크게 성공할 거라고 강력히 권했다. 바로 이것이 키스로 하여금 채

색목판화가가 되게끔 한 계기였다. 목판화 ‘달빛 아래 서울의 동대문’은 폭

발적인 인기로 매진되었다. 일본의 루브르라 할 수 있는 우에노 박물관 뿐

만아니라 영국 미술관에서도 구입했다.

이 그림으로 환영받은 키스는 자신이 그린 동양의 모습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매체로 목판화만큼 좋은 것은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

후 30년 넘게 와타나베와 친분관계를 유지하면서 키스는 100점이 넘는 그

림을 목판화로 남겼다.

 

                                                    <서당>

그 후로도 엘리자베스 키스는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하여 서울, 평양, 함

흥, 원산, 금강산까지 여행하며 그림을 그렸다. 통역을 동반하거나 한국말

하는 선교사 친구들의 도움을 받으며 험한 벽지도 마다않고 돌아다녔다.

교통이나 숙박시설, 음식이 불편한 건 둘째치고 가장 난처했던 것은 그림

을 그리려고 캔버스를 펼쳐놓으면 서양 여자 화가를 보려고 순식간에 몰려

드는 구경꾼들이었다. 그래서 숙소로 갔다가 해 뜨기 전 새벽에 다시 그림

그리러 나간 적도 여러 번이었다.

                               <과부>

 

키스는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건물과 풍경화를 그리기도 했지만 그녀의 화

필을 움직이게 한 것은 일상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솔한 모습이었

다. 때문에 키스의 그림에는 인물화든 풍경화든 상관없이 사람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녀는 왕실의 공주, 고위 정치가, 학자, 양반댁 규수와 자제들

로부터 길에서 만난 할아버지, 농사꾼, 가게주인, 우두커니 앉아있는 노인,

주막에서 식사하는 나그네, 애기 업고 빨래하는 아낙네, 노는 아이들에 이

르기까지 과장도 폄하도 없이 화폭에 옮겨 담았다.

                                                       <평양동문. 1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