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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울쩍한 제삿날 불망기

우울했던 제삿날 不忘記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사람도 딱 하나 할 수가 없는 일이 있으니 그건 세월을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늙는다는 게 두려운 건 죽음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의지대로 따라주질 않는 슬픔일 것이다.

죽음이 얼마나 아픈지는 추측일 뿐이지만(죽었다가 살아난 자가 없으므로)  늙어가며 의식이 깜박거려 부지불식간에 정신을 놓아야 하는 치매기는 피할 수가 없는 가장 처참하고 몹쓸 아픔이다.

음력 정월 열여드레 날이 선친 제삿날이다. 선친보다 늦게 돌아가신 어머님제사까지 합제 하여 모시니 우리 집의 일 년 家禮 중 가장 중요한 비망일인 것이다.

제삿날엔 피붙이는 모두 모여 생전의 부모님을 기리며 얘기꽃을 피우고, 더는 지난 일 년 동안 살아왔던 각자의 삶의 편린들을 얘기하며 혈육의 정을 돈독히 하는 잔칫날이기도 하다.

그 축복의 날이기도 한 제삿날이 해를 거듭하며 점점 우수의 날로, 씁쓸한 날로 변해 감을 어쩌질 못하고 있다. 당장 살아계신 한 분의 자형님도 치매로 요양원에 계시고, 아홉 누나 중 일곱 분이 생존해 계시지만 노구로 금년엔 두 분만 참례했다는 세월의 무상함이다.

더구나 오늘 참석한 두 누나 중에 유순(여섯째)누나는 어제 우리를 얼마나 애통하게 했던지?  이렇게 뵐 수 있다는 건만으로도 모두를 눈시울 적시는 자리가 됐다.

여든한 살인 유순누나는 어제 뜬금없이(오늘 정읍누나와 정읍터미널에서 만나 오시기로 약속을 했었다) 우리 집엘 오신다고 길을 나서 세 번이나 버스를 갈아타고 묻고물어 원대 앞까지 오셨단다. 학교 앞 벤치에 몸을 가눈 누나는 머리만 띵 하곤 아무 생각이 나질 안했단다. 내 집을 못 찾으신 게다. 찾을 수가 없었던 거였다.

내가 이곳에 집을 짓고 산지 27년차고, 누난 한 번도 제사에 빠진 적이 없으니 최소한 27번은 집엘 오신데다, 당신의 휴대폰엔 1~7번까진 자식들의 전화번호를, 8번엔 나의 전화번호를 입력해 소지하고 계시기에 설사 깜박하여 집을 못 찾는다 해도 걱정할 일은 없는 셈이었다.

근데도 누나는 원대 앞 의자에서 몽롱한 정신에 가위눌린 채 하루 종일 무심한 시간과 추위와 시장기에 맞서다가 해넘이가 가까워지자 되돌아 집으로 가셨단다.

어제저녁식사를 끝낸 우리부부는 그 황당하고 슬프고 짠한 정황을 어둑해져 귀가하신 누나로부터 전화를 받고야 알았던 것이다.

얼마나 기가 막힌 노릇인가? 제사에 참석하시겠다고 버스를 갈아타며 두 시간여를 달려오신 누나께서 집을 못 찾아 다시 귀가하셔야만 했던 처량하고 낭패한 심정을 어찌 헤아릴 수가 있으리오.

종일 애간장 녹았을 누나의 하루를 생각하며 고작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짠한 생각마저 어떻게 말할지 묘연했던 거였다. 어제 밤, 애태우다 지친 누나께선 오늘 못 오시겠다고 전화에 대고 단념하시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제삿날에 빠질 수가 없다고 오늘 다시 노구를 이끌고 오신 것이다.

휴대하신 전화로 1~8번까지 아무데라도 전활 했음 자식들이 수소문해서 내 집을 찾을 수가 있으련만, 그 생각마저 나질 안했다니 늙어감도 서러운데 생각조차 깜박 놓아야 한다면 얼마나 무서운 비통함인가!

지금도 ‘독도는 우리 땅’이란 길고 긴 노랫말의 가요를 3절까지 음·박자 똑 소리 나게 맞추며 노래하시고, 일본어로 노래를 연창하실 만큼 총명하신 당신께서 아무데나 전화할 생각조차 못했다니 늙음이 간단없이 수반하는 비애는 상상을 절함이다.

누나를 응시하며 치매를 생각해 봤다. 이번 설을 서울자식들 집에서 맞으셨는데 그렇잖아도 깜박하는 정신머리가 걱정이 됐던지 자식들이 치매검사를 위한 종합검진을 했었는데 별 이상이 없었다고 질녀(누나 큰딸)가 전화로 알려줘 안도했으나 정신 놓는 걸 어쩐다?

늙는 것도, 죽는 것도 무섭지 않단다. 정말 무서운 건 치매라고 누나들은 말씀하셨다.

건강이 안 좋아서 이젠 겨우 두 분 누나만 참석하는 제사에 그나마 정신까지 깜박 놓아야 하니 아니다, 낼 모래 언제라도 몸과 마음의 이상(병)이 내게도 찾아올 것이란 생각에 우울해지고 오싹해진다.

가는 세월 속에 늙어 쇠해지는 심신은 어쩔 수가 없고, 그 시간은 무지 빨리 달려와선 달아나가는 것 같아 허무감까지 드는 제삿날이 됐다.

‘아버님, 어머님, 누님들 죽는 날까지 건강만이라도 지켜주세요.’라고 차례 상에 재배하며 기도했다.

축복의 날 - 제삿날이 슬픈 불망의 날이 되지 않기를 빌었다.

2013. 02. 27 (음력 1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