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맹이의 생일에 '마미 조은'을 생각한다.
오전9시, 둘째가 싱가포르 언니께 전화를 걸더니 현이를 바꾸란다.
“현이니? 이모야. 니 생일 축하한다.”
“생일 축하하러 전화했어? 비행기타고 와야지.”
“그래, 우선 전화로 축하 해줄게. 뭐 갖고 싶니? 엄마한테 돈 보내줄게.”
"비행기타려면 영어를 잘해야 되요."
“그렇구나. 너도 이제 영어 잘하니? 생일 축하한다.”
큰애네 둘째 현이는 오늘 일곱 살이 됐고, 우리보다 한 시간쯤 늦은 싱가포르로 전활 넣으면서 일어났을까? 하고 조바심 대던 둘째가 다행스럽게 통화를 했던 거다.
작년에 이사 가서 어린이집엘 다녔던 애가 영어와 중국어만을 상용하는 현지에 얼마나 적응했는지, 영어를 해야 비행기타고 올수가 있다고 주의까지 주고 있었다.
아들만 둘인 큰애가 애들 교육 땜에라도 부러 싱가포르로 이사를 간 셈인데, 명절이나 생일이 닥치면 뭔가 좀은 허전한 혈육의 그리움이 뭉클 솟는 우리들 이였다.
엊그제는 분당에 사는 막내네 은이도 생일이었다. 둘째가 식구들끼리 저녁이라도 먹자고 바람을 넣은 탓에 퇴근 무렵 막내가 은이를 데리고 왔었다.
그래 한경(한국경제신문)옆 골목에 있는 아구찜집에 방 하나를 예약을 했고, 둘째가 퇴근하는 길에 은이의 옷가지(3가지)와 쬐끔한 빵과자에 촛불 다섯 개를 준비해 왔었다. 하여 아내, 나, 둘째, 막내 넷이서 은이의 다섯 살 생일 축하연(?)을 열었다.
은이-(외)손녀가 얼마나 영특하고 야문 똑똑새인지 손수 쿠키에 촛불 켜 꽂고 소등했다가, 노래하고 ‘후~’하고 촛불을 끄며 우리들에게 박수치는 걸 유도하기까지의 원맨쇼를 장단 맞추며 지켜봤었다.
며칠 전엔 무슨 동요를 부르다 ‘나는 행복 합니다’라고 노래하기에 내가 그냥 지나치는 말로 싱겁게
“은아, 행복이 뭔데?”라고 물었었다. 근데 내 질문에 미리 답이라도 준비하고 있었단 듯
“마미 조은 거요.”라고 답하지 않는가!
노상 ‘행복’이란 단어를 입에 달고 사는 어른들도 막상 행복의 말뜻을 냉큼 답하기 쉽잖은데 말이다. 그런 손녀라 난 지네 엄마아빠 못잖게 장난질을 해대는 할아비가 됐다. 암튼 손녀 생일덕에 푸짐한 저녁외식을 즐겼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 아구찜집을 나와선 입가심을 해야 한다고 커피전문점으로 둘째와 막내가 들어간다. 아내에겐 아포카또, 내겐 까페모카. 지들은 독일생맥, 은이에겐 식빵에 생크림을 가득 부어 쿠킬 만들어 또 생일케익에 촛불 켜기 이벤트가 시작됐다.
애의 2차 생일파티가 된 셈이다. 커피숍 안주인까지 한통속 돼 야단법석을 떨고 은이는 지네집으로 떠났다. 오늘 늦게 퇴근한다는 아빠와 지네집에서 (케익을 준비해 놨단다)3차 축하를 해야 한다면서.
집에 들어서자 나는 둘째에게 ‘절제’에 대한 얘길 하려 막 입을 열려는데, 아내는 알아채고 자기의 꽉 다문 입에 검지손가락을 세워 십자가를 만들며 눈을 내리까는 거였다.
입 다물라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해 봤자니 그냥 지나치라는 눈치였다.
요즘 젊은이들은, 내 딸들은, 지네 자식들을 위해선 낭비란 개념에 애매모호한 핫바지 노릇을 할때가 있다. 다섯 살배기가 뭘 안다고, 하긴 ‘행복이란 맘이 좋은 거’라고 답하는 걸 보면 ‘생일은 장소 옮기며 식구들이 흥얼대며 노는 날쯤‘으로 인식될까 걱정 되는 거였다.
그때 문득 이웃의 불우아동과 아프리카의 꾀째째한 모습의 어린이들이 밤하늘의 개똥별처럼 스쳤다. 단순히 즐기기 위해 2~3차 먹거리 순례를 할참이면 이웃을 생각해 보라는 그런 투의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아내가 얼른 가로막았었다.
은이는 지네 집에서 엄마아빠와 또 생일파티를 할 것이다.
우리의 세 딸들은 언제부터 음주를 즐겼는지 모르겠다. 요즘 여자들이 술 두서너 잔 마신다고 흉이 되진 않겠지만 애주가 반열에 끼려한다는 건 지성을 찾으려는 여자에겐 품위문제다.
아마 애주가DNA는 아내네 집안에서 기인함이라고 곧잘 둘러대지만, 걱정은 싱글인 둘째가 애주가란 점이다. 술 마시는 시간과 돈을 보다 건전한 시간으로 때워야 후회되지 않는 삶을 산다고, 잔소릴 하는 나를 너무도 잘 아는 식구들이라 술좌석에선 모두 내 눈치를 살핀다.
음주에 쏟는 모든 건 정말 아까운 거다. 모든 걸 잃게 되기 십상이기 쉬운 땜이다.
“딸은 원래 범어(梵語)인 타라(TARA·多羅)에서 유래한 말로 관세음보살의 눈물방울 속에서 태어난 영원한 소녀를 뜻한다고 한다. 아름답고 슬픈 한 편의 시처럼 딸은 눈물방울 속에서 태어난 다라관음(多羅觀音)인 것이다. 딸의 눈물이야말로 사랑의 원천이요, 마른 땅을 적시는 영원한 강물이 되는 것이다. 흔히 인간의 역사는 저항의 역사라고 하지만 특히 여성의 역사는 더욱 치열한 저항과 도전의 역사임을 알 수 있다.”라고 시인 문정희는 말한다.
우리집은 딸만 셋을 둬서, 모두가 제 몫을 잘하고 있어서 행복하겠다고 주위 분들이 부러워하는 소릴 자주 듣는다.
딸이 셋이라 은이 말대로 ‘맘이 좋아야’ 하는데 요즘 둘째 땜에 속이 상할 때가 있다. 술 마시고 후회하며 흘리는 눈물이 아닌 아름답고 슬픈 눈물로 세상의 ‘맘 편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치유’해주었음 하는 기대를 하는 거다.
술에 쏟는 걸 불우아동들을 돌아보는 시간으로 말이다.
손자`녀가 자라면서 생일에 그런 감동의 눈물얘기를 엄마나 이모들로부터 듣는 시간이면 좋겠단 생각에 빠져보았다.
2013. 0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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