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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위암, 병상병기

뜨거운 여름을 안아야 내일이 있다.

뜨거운 여름을 안아야 내일이 있다.

2013. 07. 05. 오전 11시, 서울삼성병원 위센터 1층 301진료실 1번방에서 손태성교수를 기다렸다. 예약 6개월 만에 마주하는 손교수는 언제나처럼 모니터에 시선을 둔 채 “강대화님 삼 년차네요. 위, 대장, 혈액, 폐 모두 깨끗합니다. 건강관리 잘하고 계십니다. 이제 일 년 후에 뵙지요.”

예상은 했지만 기뻐 우쭐한 마음도 잠시, 일 년이란 말에 약간 당황하여 나는 “일 년 후에요?”라고 의아해하자 “예, 삼 년 동안 별 이상이 없을 땐 정기검진을 일 년으로 늘려 하게 됩니다.” 라고 설명하면서 축하한다는 듯 만면에 미소를 띈 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채증 하나를 더는가 싶어 순간 마음이 가벼워졌다. 6개월마다 그를 마주쳤기로 수술 후 여섯 번째 대면이었지만 오늘의 손교수는 고마웠고 무한정 신뢰가 솟는 거였다.

진료실을 나오면서, 한껏 고무된 표정으로 나는 아내에게 “예상한데로야. 기분 좋네~!”라고 의기양양해 하자 “또 자신만만해 한다.”라고 아낸 웃으며 핀잔했다.

3년 전 위암수술 때도 건강에 대한 나의 오만에 가까운 ‘자신만만’ 탓에 안할 고생을 한 내력을 상기시킨 거였다. 수술 1년 전 정기건강검사 후 위에 이상 징후가 발견 된다고 정밀진찰을 요하는 의사의 의견을 묵살하여 병을 키워 결국 수술대에 올랐기 땜 이였다. 그때 그날이 빠르게 스쳐갔다.

수술 후 일주 째, 수술동기 환우들이 퇴원하던 날, 내겐 아무런 통보가 없었다. 누구보다도 수술예후가 좋다고 스스로 뽐내고 있었는데, 늦은 오후에 손교수는 나를 불렀었다.

‘수술은 완벽하게 하여 퇴원해도 괜찮다. 하지만 만에 하나 암세포가 임파선 어디엔가 침투했을지 몰라 그 미심쩍은 것까지를 깨끗이 치료하기 위해 6개월간 항암주사와 방사선치료를 병행하면 좋겠다.’라고 피력하며 결정은 내 스스로 하라고 안타까워했던 모습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벌서 3년이 훌쩍 지났다. 불현 어떤 회한이 한 모금 마신 사이다가 식도를 타고 위까지 이르는 그 싸하고 움찔한 쾌감처럼 가슴을 훑었다. 그런 손교수가 오늘따라 미쁨이 가고 그래 고마웠다.

나는 원무과에서 1년 후의 재진을 예약하면서 모니터에 그를 강력히 추천했다. 언젠가 넘 사무적이라 섭했던 그와의 대면을 병상일기와 카페에 올렸었는데 그걸 어찌 읽었던지, 예후가 좋은 환자에겐 굳이 말을 아껴 촌음이라도 다른 환자에게 시간을 더 활해함이 (의사의)직분일 것 같아 그리함이니 이해해 달라던 손교수의 모습이 겹쳐 떠오르는 거였다.

2014년 6월 27일(금) 오전 10시를 예약하면서 1년 후의 금요일을 눈 깜짝 사이에 알려주는 스마트폰의 환장할 세상에 건재함을 기뻐했다. 금욜을 택일해야 서울서 애들 연휴를 같이 할 수 있어서다.

정말 좋은 세상이다. 옛날 같음 난 지금 대학병원의대생들의 마루타가 돼 있던지 이미 (실습)효용가치가 끝나 한 줌의 재로 변했을 테다. (여태, 아니 죽는 날까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안할)아내의 표정이 그리 밝아 보였다. 며칠 전 아내는 둘째에게 ‘요즘처럼 행복한 때가 없었다.’고 했다고 둘째가 내게 고자질 했었다.

아낸 그럴 만했다. 내가 위암수술 후 귀촌하겠다고 하자 불만이었던 아내의 앙다문 입은 닭똥구녕 마냥이었는데 고향에서의 집짓기를 포기하고 신축아파트를 청약해 놨으니 입은 째져 귀밑까지 갈 만했다.

새집 짓고 넓은 터에 이것저것 뭘 하다 보면 육신이 피곤할 건 빤해 투병중인 나를 위해서도 귀촌을 극구 반대했었는데 포기하고, 평소에 아파트에 살기를 노래 부른 아내의 소원대로 되가니 속맘이야 얼씨구 할 게 틀림없으리라.

늙을수록 아내 말 따라야 따순 밥 얻어먹는다는 속언이 아니어도 내가 귀촌을 포기한 건 옆집과 견원지간이 되어 살 것까진 더더구나 없고, 아내한테 찬밥에 오리알 신세가 되지 말란 법도 없어 귀촌의 로망을 접기로 했던 것이다.

(예후가) 아주 좋다고 손교수도 기쁜 표정이었으니 우리내왼 여생을 즐길 일만 남은 셈이다. 집이란 게 죽음을 향한 장도의 베이스캠프 역할 이외의 것이 될 땐 삶 자체는 어쩜 집의 노예가 될 수도 있다. 위암수술 후 집을 팔기로 한 건 덩치 큰 집의 노예가 된 그간의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늙어갈 수록 짐을 가볍게 해야 한다. 내려놓기를 즐기며 소유욕에서 헤어날 때 만족감은 배가 될 거란 생각이 절실해 지는 요즘이다.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어떤 일을 하며 즐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함이다. 내게 주어진 시간과 허락 된 재화와 건강 속에서 가능한 일을 말이다.

타는 햇살이 잿빛 구름을 뚫고 아스팔트에 쏟아져 여름 한 낮을 달군다. 타는 목마름 뒤엔 뭔가를 해내야만 하는 갈증으로 삶을 멈출 수가 없다. 여름은 살아남기 위한 뜨거운 몸부림이다. 여름을 뜨겁게 안을 줄 아는 자에게만 말이다.

2013. 07 .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