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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아

나를 위해 해준 게 뭐 있는데?

“나를 위해 해준 게 뭐 있는데?”

며칠 전 어느 동호인모임이 끝나고 나오는데 평소에 흉허물 저당 잡히고 소통하던 J이가 나를 불러 세우더니 바쁘지 않다면 할 얘기가 있다는 거였다.

인근 커피숍에 마주앉은 J는 “강샘, 시덥잖은 얘길 해도 괜찮죠?”라고 말하는데, 웃음기를 머금긴 했지만 자조적인 어떤 처연함이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J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 눈길을 피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몇 년간 사귄 남친이 있다는 거였다. 서로가 가정이 있는 시쳇말로 불륜이긴 하지만 서로를 향한 마음만은 진솔한 애정이었다며 나를 쳐다보며 동의를 구하는, 미뻐해주길 바라는 은근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J는 50대를 코앞에 둔 직장녀다. 몇 년 연상이란 남친도 조그만 사업을 하고 있어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는 성실한 중년인데 어떤 모임에서 우연히 마주친 게, 자석같은 흡인력에 이끌려 만남이 시작 됐는데 J이가 더 몸살을 앓았단다.

중매로 만난 남편과 결혼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연애란 걸 몰랐던, 그래선지 어쩜 사랑이란 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하기 힘든 감정인지를, 그것이 남몰래하는 불륜이란 긴장감 탓일까 싶으면서도 타임머신을 타고 삼십년도 훌쩍 거슬러 소녀시절로 빠져드는 그 짜릿한 감정이입에 마냥 빠져들고 싶었다고 고백하는 거였다.

한 달에 한두 번 주말에 남친을 만나는 약속과 그 기다림을 위해 모든 스케줄을 비워두었다는, 그래 시외를 드라이브하고 식사에 이은 정염 불사르기의 행각에 올인 한 지난날들이 너무나 행복해서 후회란 걸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는데, 반 년 전쯤 문득 회의의 순간에 곧잘 빠져들고, 내일에 대한 불확실성이 수반하는 불안감이 엄습해 와서 남친으로부터 떠나야한다는 자성에 안절부절 고뇌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러면서도 그게 갱년기 현상인가? 그럼 자신도 갱년기에 접어든 겐가? 갱년기에 나타나는 징후가 어떤 것인지를 인터넷에서 훑기도 했다는 거였다.

남친으로부터 연락이 와도 응답하지 않으려는 갈등과 씨름하는 지난 반년은 자기고문이이였단다. ‘도대체 왜 그러는지? 한 번만이라도 만나서 얘기를 하자’고 메시지를 보내는 남친에게, 무응답으로 꼭꼭 숨어야(?)하는 자기학대란 괴로움은 고스란히 혼자 삭히며 끙끙 앓아야만 해 한동안은 몸무게도 엄청 줄었다고 실토하고 있었다.

수려한 외모에 지적인 남친은 J이가 사랑이란 열병에 몰입하게 하여 그를 위해선 아까울 게 없이 모든 걸 다 주고 싶었단다. 그토록 사랑한 그를 잊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틴 반년의 시간이 십 여일 전 더 처참한 낭패감에 스스로를 내동댕이치고 말았단다.

예기치 못한 만남, 걷고 있는데 왠 승용차가 갓길에 정차하고 자기를 부르는, 남친 차에 어쩔 수 없이 동승하여 한적한 공원에서 그의 힐책성의 ‘왜?’란 물음에 미안하고 더는 마땅한 변명거리도 떠오르질 않아 자신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궁색한 말이 “그동안 내게 해준 게 뭐 있느냐?”고 역습아닌 역공을 했다는 거였다. 그 말을 해놓고 J는 곧 자기의 주둥일 찢고 싶었단다.

남친은 의외의 일격에 J를 뚫어지게 응시하다 차창에 시선을 꽂은 채 한참을 말문을 닫고 있다가 “그래, 내 불찰이었어. 미안하다. 짠돌이 짓 앞으론 않고 잘 하면 안 되니?”라고 물질적인 방향으로 스스로를 몰아세워 자책하고 있었단다.

그런 남친을 보면서 J는 자신이 얼마나 치졸하고 처량한 기분이 들던지 숨을 수만 있음 숨고 싶었단다. ‘뭘 해 줬냐?’는 그녀가 여태 몰입했던 순수한 애정의 부정이고 곧 자기모멸인 셈이였단다.

그들은 애당초에 서로를 부담감 느끼게 하는 어떤 핑계의 물질적인 주고받기는 없기로 약속한 바였고, 그렇게 충분히 만족했음인데 뜬금없는 언공(言攻)을 한 자신이 얼마나 구차하고 치사하게 비추었겠나싶어 빨리 자리를 모면하고만 싶었다고 했다.

J는 눈시울을 적시고 있었다. 남친이 절대 싫은 건 아니란다. 또한 남친이 잘못한 게 없단다. 모든 원인은 자신의 심경변화에 기인함이고, 그런 자성이 옳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남친을 떠나기로 마음 다짐한 게 이유란 거였다.

더 이상 만나지 않음이 서로를 위한 또 하나의 사랑일 것 같기에 그 고통이 지금까지 살면서 감당한 어떤 고통보다도 더 클지라도 감내하겠다면서 자기편이 되 달라는 거였다.

만남에서 애인으로 관계 맺어지는 서로를 향하는 마음엔 사랑이란 순수성 이외의 어떤 물질적인 욕심이 내재 했담 그건 참사랑이 아닐 것이다. 지고지순한 사랑은 나를 상대에게 주면서 얻는 기쁨일테다. '나를 위해 해준 게 뭐냐?'고 투정부리는 건 사랑을 빙자한 자기애(自己愛)일 뿐인 것이다. J는 그래서 자신이 처참해진 순수한 여자였다.

문득 유안진님의 <지란지교를 꿈꾸며>란 에세이가 생각났다. 자기의 남편, 아니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는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로 나를 택한 J가 난 그지없이 고마웠다.

나는 J에게 ‘지금 마음먹은 대로 하라’고, ‘남친도 J가 불쑥 뱉은 말에 맘 아팠더라도 나중엔 용납할 거라.’고 위로해 주는 것 외의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었다.

아니, ‘중년에 누군가를 몸살 나게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얼마나 행복한 삶이냐! 그 잠시 동안의 외도로 누군가에게 미안했다면 이제 그 쪽에 좀 더 잘해주면 될 것이다.’라고 격려해주면서 ‘나도 J같은 여성과 사랑의 외도를 잠시 동안 해 봤음 행복하겠다.’고 부럽다며 웃었다.

J는 정말 순수한 여성이다.

그녀는 제 자리를 곧잘 챙기는 여자이기도 하다.

겸손하고 묵직한 자기낮춤의 생활의 자세는 뭇사람들로부터 미쁨을 받게 한다.

그녀의 부군은 복 받은 남자며 그녀의 식솔들도 행운의 가솔들일지니!

J가 곧장 평상심을 갖고 아름다운 추억위에 건강한 삶을 영위하기를 기원해 본다.

2013.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