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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아

오키드 & 스티글리츠의 사랑과 예술

오키드 & 스티글리츠의 사랑과 예술

"그를 한 인간으로서 사랑했지만, 나를 그의 곁에 붙잡아둔 것은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내게는 그의 장단점이 모두 보였다. 맑고 선명하며 아름다운 것들이 존재했기에 수많은 모순된 헛소리를 말없이 참았다."고 조지아 오키드(Georgia O'keeffe,1887~1986)는 남편 스티글리츠를 말한다.

"그들은 예술만큼 사랑에서도 창조적이었다."며 "독특한 결혼생활이 요구한 대가에 놀라고 때론 낭패를 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자기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미래를 추구하기 위해 작품을 만들고 창조성을 발휘했다"고 오키드는 술회했다.

그녀의 인생은 1916년 사진작가인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1864~1946)를 만나면서 새롭게 시작되었다. 스티글리츠는 '사진은 예술을 모방할게 아니라 당당히 예술을 파먹고 살아야한다' 며 스트레이트 포토(Straight Photography)와 사진 분리파 운동을 주장하며 미국사진계의 거장으로 떠오른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1905년부터 뉴욕에 '291갤러리'를 열고 유럽의 선진적인 거장들 - 파블로 피카소, 폴 세잔느 등 - 의 작품을 미국에 소개하며 철저한 사실주의에 입각한 은유적 세계를 전개하며 추상적 표현의 가중성을 연 현대사진예술의 효시였다.

눈에 보이는 현실세계의 단순묘사에서 벗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이고 감정적인 경험의 묘사를 통해 표현의 한계를 확장하는 ‘아퀴벌런트(Equivalent)’란 사진예술의 장을 열었다.

1916년의 어느 날, 오키프의 친구였던 아니타 퓰리처(Anita Pollitzer)가 그녀 몰래 오키프의 작품들을 스티글리츠에게 보여주었고, 그는 작품들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스티글리츠가 이름도 낯선 이 여인의 작품들을 '291화랑'의 가장 좋은 장소에 전시해 대단한 성공을 거두자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오키프는 그에게 달려가 자신의 그림들을 떼어줄 것을 요구했다.

스티글리츠는 강력하게 항의하는 그녀에게서 묘한 매력을 느껴 그녀를 설득하여 그림을 계속하여 전시하도록 한다. 그녀의 독특한 그림은 비평가들의 찬사 속에 화단의 주목을 받게 된다. 스티글리츠에 의해 평단에 소개된 이후 생애의 전환점을 맞은 오키프는 미국의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명성을 얻게 된다.

이때 그녀의 나이가 불과 30세였고 스티글리츠는 52세였다. 스티글리츠는 아내와 6년여에 걸친 이혼소송 중에 오키프와 동거생활을 하다 1924년 결혼한다.

스티글리츠가 보여준 오키프의 사진들은“비록 픽토리얼리즘(Pictorialism)시대에 그가 여성의 표현 양식을 연구한 것이지만 오키프의 사진화된 이미지는 인간의 형태(Human Form)를 묘사하는데 있어서 뚜렷이 구별되고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한 것”이었다.

그런 두 사람의 열정은 때때로 작품 속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스티글리츠는 그녀의 작품들이 지니고 있는 세계가 특히, <꽃> 시리즈에서 느낄 수 있는 섬세함, 예리함과 동일한 느낌을 자아내도록 했다.

사진비평가 자네트 말콤은 오키프의 포트레이트 작품들에 대해서 '엄숙하고 섬뜩하며 수수께끼 같은, 젊지도 늙지도 않았지만 신비스러운 아름다움과 이상하고 음침하며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여자의 이미지'라고 말하고 있다.

스티글리츠는 예술가로서의 오키프와 그녀의 작품들이 지니고 있는 예술성에 대해 때로는 남편으로, 그리고 때로는 사진작가로서 기록하였다.

1946년 스티글리츠가 죽자 오키프는 뉴멕시코의 사막으로 떠나 은둔 생활을 시작한다. 황량한 사막풍광은 그녀가 1917년 기차 여행 때 매료된 곳이었다. 그 후 1929년부터 여름을 뉴멕시코에서 나기 시작했으나 스티글리츠는 한 번도 동행하지 않았다. 다만 둘이 나눈 편지는 11,000페이지에 이르는 끈끈한 연정을 수놓으면서도.

 

1949년에는 아예 이곳에 정착하여 1986년 산타페에서 숨질 때까지 '애비큐(Abiquiu)'의 집과 ‘고스트 랜치’ 목장을 오가며 작품 활동에 전념했다. 오키프는 이 곳 사막에서 수집한 특이한 바위들과 햇빛에 말끔히 육탈(肉脫)된 동물의 뼈·해골·뿔 등은 작품에 즐겨 묘사하곤 했는데 그녀가 특히 사랑한 풍경의 일부분 이었다

그녀는 자기 작품에 사인을 하지 안했는데 이유는 자신의 얼굴에 사인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녀는 자신의 임종 때(1986년)도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자신이 평생에 걸쳐 작업한 2000여점의 작품과 65억 달러 재산의 3/2를 자신의 조수이자 친구였던 후앙 해밀턴(Juan Hamilton)에게 유산으로 남긴 것이다. 후일 해밀턴의 부인인 안나 마리는 그녀의 수집품과 책, 옷 등 유품을 산타페에 있는 오키프박물관에 기증한다.

 

미국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모더니즘의 여류화가와 현대사진예술의 거장이 커플로 생전에 남긴 예술계의 혁혁한 족적은 ‘예술가를 인생의 동반자로 두는 것은 강한 매력과 묵묵한 인내를 동시에 필요로 하며, 부부가 둘 다 예술가일 때는 예술적 성공과 개인의 행복을 동시에 추구하는 '창조적 관계'가 요구된다는 사실을 다짐한 결과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