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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아

프리다 칼로의 사랑의 족쇄

프리다 칼로의 사랑의 족쇄

                     <칼로의 자화상>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는 어릴 적에 소아마비를 앓다 장애인이 되었는데, 설상가상으로 18살 때 타고 가던 버스가 전차와 충돌, 철막대가 옆구리를 뚫고 척추와 골반을 관통하며 허벅지뼈를 부셔 사경을 헤매다 기적적으로 살아났었습니다.

척추수술 7번에 회저병으로 오른발가락 절단, 골수이식 중 세균감염으로 6번의 재수술을 받으며 침대에 누워 할 수 있는 일은 그림 그리는 일이었지요. 거울에 비친 자신을, 인고의 아픔 속의 자의식을 그리는 자화상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난 곧잘 혼자이기에, 또한 내가 잘 아는 주제가 나라서 그린다.”라고 말했지요.

칼로는 자신의 그림에 대한 열정과 소질을 평가받고 싶어 멕시코의 천재화가인 디에고 리베라를 찾아갑니다(1927년). 그림을 본 리베라는

“강열한 표현과 명쾌한 묘사, 감각적인 관찰로 일궈낸 어떤 힘과 생동하는 관능성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 소녀는 분명 진정한 예술가다.”라고 평하며 칭찬했지요.

“나는 병이 난 게 아니라 부서졌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행복하다.”라고 칼로는 자위합니다. 리베라는 칼로의 화가로서의 재능과 결심을 굳건하게 후원하며 둘은 사랑을 꽃피워 갑니다.

2년 후, 43살의 리베로는 21년 연하의 22살 칼로를 3번째의 아내로 맞아 결혼을 합니다.

                                   <칼로의 자화상>

칼로의 운명적인 사랑은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멕시코에 리베라와 사상적동지로 공산당에 입당하여 사회활동과 예술활동을 하며 성공하지만 결코 행복하지만은 않은 결혼생활 이였지요.

강철코르셋을 입어야 가까스로 앉을 수 있었던 그녀가 임신이란 애초부터 무리였지만 임신과 출산이 진정한 여성성이라고 믿었기에 집착과 열망은 더 했지요.

리베라가 난봉꾼인데다 칼로의 여동생인 크리티나와 동거를 하자 질투와 분노와 상실감에서 벗어나려 애를 갖으려고 애썼으나 여러 번의 유산으로 절망합니다.

그래서 몇 번 자유연애를 시도하기도 하다 소련의 망명정치인인 트로츠키와 가깝게 지내며 리베라에게 이혼을 요구 1939년 헤어졌습니다.

“일생동안 나는 두 번의 심각한 사고를 당했습니다. 18살 때의 교통사고로 몸을 부서뜨렸고, 또 리베라를 만나 결혼으로 정신마저 망가지게 했습니다.”라고 회한을 씹었지요.

<디에고리베라의 벽화>

칼로에게 있어 척추의 고통과 자즌 재수술은 심신을 피폐해 질대로 져 망가지게 했고, 그런 모든 역경의 탈출구는 그림 이였습니다. 멕시코전통 속에 자신의 고통을 녹여 독특한 화풍을 일궈냈지요.

미국에서 수술한 칼로에게 이혼한지 1년 된 리베라가 찾아왔습니다.

1940년 우측다리를 절단한 채 다시 한 척추수술도 악화일로였으나 그림을 포기하진 안했습니다. 그해 두 커플이 재결합한 게 또 하나의 위안이었다고나 할까요.

1953년 메시코에서 칼로 개이전이 처음 열립니다. 다음 해는 그들 결혼 25주년인데 결혼기념일 한 달 전 칼로는 리베라에게 선물을 줍니다. 바로 다음날 새벽, 폐렴증의 악화는 칼로의 파란만장한 삶을 47세의 나이로 막 내리게 하지요.

교통사고로 입게 된 철재코르셋과 리베라를 향한 사랑의 족쇄에 갇혀 평생을 ‘사랑과 증오’ ‘우주와 인간’을 성찰하며 절망과 상처의 트라우마를 극명해가는 자화상은 칼로의 열정과 의지가 낳은 예술의 꽃입니다.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이라고 칼로는 마지막 일기장에 썼습니다.

3년 후, 11월24일 프레스코벽화의 거장, 멕시코의 천재화가, 칼로의 남편이자 바람쟁이인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도 칼로의 뒤를 따르지요.

“내가 그림을 계속해서 그리려는 이유는 당신이 나를 이해하기를 바라서”라고 입버릇처럼 뇌인 칼로를 이해해 주려 후딱 따라갔는지도 모릅니다.

이 세기의 걸출한 사랑놀이는 예술이란 꽃을 피우기 위한 소묘였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