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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북한산서 훔친 상수리묵 맛이라니!

북한산서 훔친 상수리묵 맛이라니!

 

추석전전날 오후, 중부지방엔 가끔 국지적인 소나기가 오겠다는 일기예보가 있었지만 아침나절의 서울의 하늘은 청정가을하늘 이었다.

아내와 난 빵과 과일을 싸들고 11시쯤 북한산둘레길 트레킹에 나섰다.

불광역에서 내려 구기터널공원지킴이터에서 족두리봉 밑 계곡을 휘돌아 탕춘대공원지킴이터 쪽을 향하는 깊은 골을 택했다.

아직 여름의 미열이 도사린 햇살은 따가웠고 그 태양을 가린 푸른 숲은 바위계곡을 흐르는 잔잔한 물소리를 담아 더없이 싱그러웠다.

울창한 숲 사이로 비추는 파란 하늘조각들 속에 향로`비봉의 바위얼굴이 언뜻언뜻 윙크를 하는 트레킹은 너덜길이 수반하는 긴장감에 청량제역할을 한다. 그렇게 한 시간쯤 즐겼을 테다.

숲이 어스름해지고 있었다. 골이 깊고 숲이 우거저서만은 아니라는 듯 후드득 나뭇잎 때리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났다. 짙은 숲 장막틈새로 내민 하늘이 온통 잿빛인 거였다.

장막을 노크하던 굵은 물방울은 산발하여 뿌옇게 안개로 변하고 그 알갱이는 이내 쏟아지는 소나기에 혼비백산하여 계곡은 순식간에 아수라장 소음난장판이 됐다.

우린 우산을 꺼내들고 어정쩡 멈춰 섰다. 우뢰가 수리봉바위에 부딪쳐 콩 튀기듯 골짜기를 부순다. 부스는 건 콩이 아닌 상수리알밤으로 그들 한 무리가 숲을 이룸이라!

튀기는 알밤에 정신을 뺏기다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수리를 주웠다. 우산을 쓴 채 상수리알밤 줍기에 빠져든 우린 기상천외의 무아지경에서 공포의 숲을 즐기고 있었다.

반시간쯤 그 짓거릴 하다 보니 소나기도 사라졌고 조그만 비닐봉지에 알밤도 반쯤 채워지고 있었다. 실개울 가에서 시장기를 때웠을 땐 오후 1시가 지났다.

탕춘대성암문 입구를 통과한 트레킹을 접고 귀가하여 상수리알밤을 씻어 말릴 때까지도 그것들이 산짐승의 먹이란 것도, 그곳이 북한산국립공원이란 사실도 우린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오직 상수리 묵을 만들어 입을 즐긴다는 생각뿐 이였다.

추석다음날, 우리는 상수리묵 만들기 작업에 들어 딱딱한 껍질 벗기느라 머릴 짜다가 펜치를 생각했고 펜치구멍에 알밤을 넣고 으깨는 방법으로 한나절을 또 무아지경에 들었다.

벗긴 알밤을 짤게 쪼게 온수에 담가 이삼일 충분이 떫은맛을 울어내야 했는데 조급한 우린 하루 만에 건져 분쇄기로 빻았다. 그걸 채에 처 고운가루를 물에 풀어 휘젓고 저온 불에서 시작해 고온으로 삶는다. 이때 솥바닥에 눌어붙지 않게 잘 저어야하고, 충분이 삶아 된풀이 됐을 때 꺼내 빈 그릇에 부어 식히면 갈색의 야들야들한 묵이 된다.

윤기 자르르 흐르는 탱글탱글한 묵의 뒷맛은 떨떠름하고 쌉쌀했다. 아마 상수리를 분쇄하기 전 충분히 떫은맛을 울어내지 않은 탓이리라. 하지만 그 쌉싸름한 떫은맛이 되려 상수리묵 맛의 진미감을 오랫동안 간직하게 했다.

묵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수공의 과정은 복잡하고 섬세하여야 하며 그 공들인 만큼의 담백한 맛깔과 감칠 나는 식감이란 형언할 수가 없다. 갖은 양념장에 찍어 막걸리 한 잔에 걸치는 맛이란 술꾼이 아닌 나도 감탄하는 바였다.

북한산자락의 벼락 소나기가 선물한 상수리를 산짐승 아닌 집짐승인 우리식구들이 식탐하며 추석연휴 한나절을 풍요롭게 보냄이라.

쫀득쫀득하고 야들야들한 식감에 빠져든 후의 그 쌉싸름한 뒷맛이라니 그 누가 함부로 ‘담백하다’는 음식 맛을 남용한단 말인가?

국립공원 산짐승의 먹거리를 훔쳐 먹는 도심(盜心)의 맛까지 버무렸으니 별미일 것은 틀림없겠다.

                             2012. 10.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