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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내려놓는 우리명산 답사기

빨치산도 탐냈던 (불갑산)

★ 빨치산도 탐냈던 (불갑산) ★


불갑산(佛甲山) 품안에서 그가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고고(呱呱)를 울렸다. 아니, 불갑산 수도암이란 암자에선 내가 어머니 뱃속에 잉태하기 전부터 어머님께선 부처님 전에 치성 드리셨고 그 기도에 나는 생명을 얻어 태어났다고 했다. 부모님 슬하에 딸만 아홉을 두셨으니 나를 얻기 위하여 뭔들 못하셨을 거냐는 생각이 든다. 하여 내가 태어나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도 수도암에선 나의생일에 어머님이 못가시면 스님께서 불전에 공양하고 기도하셨기로 나의 모태 산이기도 하다. 그런 불갑산을 난 10여 년 전에야 지척에 근무하던 불알친구 M(동갑에 조카뻘 되는 그는 서해안고속도 건설시 도공군산사무소장)과 고향 불갑산을 처음으로 탐방케 됐고, 그 후에 다시 그리고 오늘 홀로 찾게 되니 세 번째가 되는 셈이다.

불갑사 입구 주차장에서부터 길 양편엔 초록빛깔 선연한 꽃무릇들이 옹기종기 무리를 지어 산골짜기를 기어드는 여린 겨울 햇살을 맞아 유난히 번들거린다. 왼편의 불갑사를 외면하고 꽃무릇들의 안내를 받아 발길을 옮기는데 퇴색한 낙엽이 두텁게 쌓인 갈색이불 위를 꽃무릇들이 지천으로 널려 검푸르게 채색하고 있었다. 너무 짙어 금방 녹아버릴 것 같은 진초록의 꽃무릇은 마주한 저수지의 물빛보다 더 농하다. 어쩜 꽃무릇이 멱 감고 흘러 보낸 물들이기에 저수지물도 그리 초록빛인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꽃무릇은 그의 색깔만큼이나 처연한 슬픔이다.

9월, 여름내 달궈진 대지를 뚫고나온 푸른빛 도는 하얀 꽃대(20~30cm)에 태양보다 뜨거운 선혈 같은 빨간 꽃잎을 찢어 터뜨린다. 그 열정적인 꽃잎이 시들면 그때야 비로써 초록이파리가 꽃대를 받쳐 돋아나는데 그 이파리는 엄동설한을 꿋꿋이 이겨내고 태양이 불덩이가 되기 전에 초록빛을 거둬 사라진다. 하여 빨간 꽃과 초록이파리는 평생을 마주치지 못한다[화엽불상견(花葉不相見)]하여 상사화(相思花)라고도 한다.

바위같이 무겁게 짓누르는 눈 덩이 속에서도, 눈 녹은 물이 얼음이 되면 그 속에 갇혀 같이 어름알갱이가 되어도 동사하지 않고 생생히 생존한 이파리는 미상불 보지도 못할 꽃을 피우기 위한 형극의 삶이었으니 얼마나 안타깝다 할 것이다.

그 질긴 생명의 상사화 뿌리[球根]를 빻아서 여러 색소에 희석시켜 사용하면 색상이 불변된단다. 사찰 단청의 고운 원색이 오래도록 제 빛깔을 유지하는 것은 꽃무릇의 신비성 땜이라. 그런 꽃무릇을 보전하고 기리기 위하여 9월 초순엔 이곳에 ‘꽃무릇 축제’가 열린다. 여인의 속살보다 매끄럽고 윤기 나는 그들 이파리를 마주하며 걷기를 30분쯤 하면 동백골에 닿는다. 옛날엔 동백나무가 울창하여 명명된 골짜기인데 분별없는 벌목(정원수나 분재용)으로 수십 구루만이 쓸쓸이 명목의 허세를 잇고 있다.

타원형의 상록이파리속의 꽃망울이 꽃받침을 살짝 열고 빨간 혀끝을 내 보이는가 하면 어떤 조숙한 놈은 진홍꽃잎을 수줍은 처녀입술같이 살짝 벌리고 금빛 수술을 내보인다. 그 진홍빛 꽃을 피우기 위해 봄, 여름, 가을을 무시로 지나치고 겨울에 홀로 순백의 세계에 핏빛을 토한다. 다른 모든 꽃이 사라지기를 기다리고, 싱그럽게 나풀대는 활엽수들이 죄다 떨어져 나가 하얀 눈이 온 세상을 덮을 때에 그는 빨갛게 피어난다. 해서 내 어릴적엔 결혼식이 거행되면 혼례의식엔 의례 동백꽃과 대나무로 꽃동산을 만들어 전통혼례식을 치렀었다.


꽃이 귀한 겨울철이기도 했겠지만 상록의 이파리와 진홍의 꽃처럼 불변의 사랑을 불꽃같이 하라는 의미가 더 했으리라. 동백꽃처럼 불꽃같이 살다가 미련 없이 낙화하는 동백꽃처럼 삶을 마감하는 일생이라면 성공한 인생이 아니겠는가!

아직 채 시들지 안했는데, 꽃잎 하나씩이 아닌 꽃봉오리 그대로 몽땅 낙화하는 동백꽃은 여느 꽃과 다른 아까움과 절박한 신묘함이 분분하다.
그 동백숲길을 30여분 오르다보면 해불암이 반긴다. 가파

른바위 돌산 8부 능선 자락에 요사체를 안치고도 일용할 텃밭이 있는지라 수도승들에겐 명당자리가 분명 하렸다.

암자의 석간수로 목을 축이고 20여분 가파르게 숨 헐떡거리다보면 정상인 연실봉(516m)을 밟게 된다. 발밑에 1600여년의 세월을 켜켜이 안은 고찰 불갑사가 고즈넉이 자리하고, 서북쪽엔 호남에서 둘째라는 불갑저수지가 방마산 자락에 허리를 잘려 하반신만 내보이고 있다. 화창한 날씨엔 나의 고고의 터울(방마리 봉동)인 방마산 넘어 아스라이 서해가 안무 속 그림처럼 펼쳐지는데, 백제 침류왕 원년(384년)에 인도승 마라난타가 불법을 전하러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오기위해 서해를 건너다 표류하여 닿은 곳(법성 나루 곶)이 어림 잡힌다. 그가 이곳에 불토를 정해 최초로 세운 사찰이 불갑사란다.

동남쪽으론 광주시가지가 신기루처럼 떠오르는데 눈길을 팔다 정상에 자리를 깔고 타임머신을 타고 있었다. 연실봉은 제법 품이 넉넉한 바위여서 6.25전란 땐 헬기가 앉느라 한참을 팽이 돌며 굉음을 내던 광경을 너 댓살 됐던 난 두렵고 신기하게 지켜보았던 기억이 가물가물 떠오른다.

그때 지리산에서 쫓긴 빨치산이 여기 불갑산에 아지트를 만들어 활거 하여 주변의 촌락과 주민들이 입은 폐해는 상상을 절했단다. 최후까지 버틴 그들을 소탕하기 위해 지핀 산불로 해서 불갑산은 황폐화됐었고 지금의 수목은 전란후의 자생수라 거목이 눈에 잘 띄질 않는다. 그들까지 보듬으려다 벌거숭이 알몸이 된 산 이였다.

‘불갑산 하면 빨치산’이라는 불명예를 짊어지고 한때를 회자 됐었는데 돌이켜 생각하면 6.25가 남긴 아픈 역사의 덤터기였다. 부처님 소식이 맨 처음 전해진 성스런 불토에 무뢰한 공비들까지 기어들어 안주하려 했으니 부처님 품안은 아군과 적군의 경계도 없음을 공비들은 악용 했음일까.

하기야 선종(禪宗)의 거목인 고봉선사(禪要의 저자) 가라사대 “모든 중생은 본시 완성된 부처다”라고 갈파했으니 아군과 적군 하는 개념은 불온한 시대가 강요한 우리들 마음의 비극적인 경계일 뿐 고귀한 생명이고 나아가 부처임엔 틀림이 없겠다.

식사시간만 빼곤 늘 걸어 다니면서 화두에 진념했다는 고봉선사의 행선(行禪)을 생각하며 하산길에 들었다. 북쪽으론 노루목, 투구봉, 법성봉, 노적봉, 덫고개로 이어지고. 남서방면으론 용봉, 용천봉, 도솔봉, 수도암으로 향하는데 잰걸음으로 하산하지 않아도 공히 한 시간 반쯤이면 족할 코스라.특히 수도암쪽엔 간간히 긴 의자와 쉼터를 만들었고 길도 완만하여 산책길로 연인이 애용해도 절대 만족하리라.

아니면 앞에 얘기 했듯이 쉬엄쉬엄 숲길을 거닐며 이것저것 눈여겨 의문점 찍어 화두삼아 행선 시늉이라도 내보는 게 불갑산에 걸맞은 산행이지 싶다.

사람팔자 모를 일은 행선 중에 고봉선사가 말했듯이 진짜 본래의 자기(부처)를 찾게 될지도 모르잖은가. 그런 생각에 하산 길은 더 가벼워졌다. 불갑사는 한창 중보수중 이였다. 내 어릴적에 보았던 절 입구의 사천왕은 어찌 그리 무섭고 웅장했던지 지금도 그때의 토끼가슴을 기억한다. 어느 산이나 다 그렇지만 불갑산엔 찾을수록 매력이 샘솟는 것은 비단 나만의 편안한 모산(母山)이어서가 아닐 것이다.

높지도 낮지도 않는 그는 아기자기한 수풀(천연기념물 112호인 참식나무와 비자나무, 고로쇠나무 등)과 기암과 깊은 골과 고찰을 품고 있기 땜일 것이다.

07.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