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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내려놓는 우리명산 답사기

우아하게 가난해져 얻는 기쁨 (선각산)


✰ 우아하게 가난해져 얻는 기쁨 (선각산) ✰


왔다 가기나 한 걸까? 입추의 그림자의 그림자도 없다. 열 받은 해님은 부아가 풀리지 않은 채 구름이불을 털고 푸석한 얼굴을 내밀고 있다. 그를 보기가 뭣해 차창의 아침커튼을 내렸다. 커튼사이로 선뵈는 길섶 풀잎은 간밤에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눈물 한 방울씩을 안고 있다. 눈물이 햇빛에 닿자 영롱하게 빛난다. 그 빛의 떨림이 폭염에 그을린 나의 심안(心眼)을 씻어낸다. 상쾌하다. 커튼을 좀 더 젖히니 초록바다가 밀려오고 버스는 미끄러지듯 초록물결을 가르고 있다. 폭염에 까맣게 탄 마이산의 두 귀가 하늘을 가리키며 오늘도 태양은 염천(炎天) 할 것임을 묵시하고 있다.

am9시를 넘겨 진안군 백운계곡에 들었다. 바지런한 피서객들의 자가용이 비좁은 계곡길가에서 졸고 있다. “금강산”이란 새 이름표를 단 버스는 육중한 몸체로 길을 메우며 기고 있다. 어쩌다 마주친 승용차가 겁먹고 움츠리며 아슬아슬하게 비키는데도 도통 멈출 기미가 없다. 아니다. 안주할 터가 없다. 20여분을 어슬렁 기다 그도 몸을 구겨 갓길에 개구리주차라도 해야 했다. 앞에 길게 주차한 차와 뒤따르는 차 땜에 빼도 박도 못할 신세가 됨이라.

우린 조마조마한 맘을 챙겨 금강산에서 탈출한다. 내 딴 그가 진종일을 어찌할지 답이 떠오르지 않아 기사께 “어떻게 하신데요?”라고 위로한답시고 뱉었는데, 그는 천연덕스럽게 미소 짖고 있었다. 금강산과 그의 직업적인 넉살(?)까지를 뒤로하고 산행을 시작한다. 백운동계곡은 벌써 물소리와 사람소리가 반반으로 소음공화국이 됐다. 10여분을 소음 속을 헤매니 갈림길이다.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본격 임도에 들었다. 임도는 염천을 고스란히 안고 있어 따가워도 묘수가 없어 갈지자 오르막을 고즈넉이 밟아야 했다. 그래도 땡볕아래서 매미는 7년여를 내공들인 목소리로 아리아를 뽑고 있어 위안이 됐고, 더는 ‘새싹’을 만남 이였다. 그녀를 만나자마자 나는 묻고 “누리장나무”란 답을 그녀에게서 들었다. 들깻잎 같은 이파리를 단 가지를 펴고 긴가민가한 붉은 꽃 나부랭이를 듬성듬성 달고선 나를 줄곧 쫓아오고 있어서였다. 냄새를 맡아보려는데 흔들어보라고 새싹이 일러준다. 가지를 흔드니 누릿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10여분 갈지자 민둥길을 오르니 고개 마루라. 드디어 왼편 숲길로 몸을 날렸다.

숲 터널아래 산죽이 나의 겨드랑이를 간질거리다 코밑까지 만지려든다. 앞 선 산님이 심마니일까? 연신 더덕을 발견하곤 뒷 분에게 일러줘 캐게 한다. 1~2년생 어린 더덕은 뿌리 채 뽑혀 진한 냄새를 토한다. 더덕이 대단한 것은 산죽 밭엔 어떤 풀도 살아남지를 못하는데 그가 뿌리를 내리고 생명을 키우고 있음이라.

반시간을 산죽 경사로를 오른다. 산죽 길가에 언제부턴가 소녀들이 초록빛 머리를 곱게 빗곤 내 발등을 애무하고 있다. 참으로 청초하고 섬세한 머리칼이다. 또 새싹을 불렀다. “그늘사초풀이에요.” 망설임 없다. 또 물었다. “수목원 같은데서 애들에게 수풀 얘기를 해주곤 한다.”였다. 직업은 아니고 취미삼은 공부란데, 진정 늦깎이 공부는 현재 사회복지학과에 적을 둠이란다.

그늘사초풀은 낮엔 산님들 발을 씻곤 밤엔 다시 곱게 머리 빗어 산님들 맞는 게 직업(?)일까. 그 소녀들의 머리칼에 정신 뺏다보니 헬기장이 나왔다. 부아 난 해님의 성깔은 여전했다. 그래도 모두 덥석 주저앉아 염천 하에 해갈을 하고 있다. 해님을 더 열 받게 함은 아닐는지!

건너편 선각산 정상이 지척이다. 그만큼 협곡이 깊다는 뜻인가. 벼랑길을 혼자 걷는다. 떡갈나무를 비롯한 활엽잡목이 숲실을 이뤘다. 그늘사초풀이 가끔 새우란(새싹이 나의 무식 하나를 덜어냈다)에게 터를 빌려주고 있다.

정오를 넘기니 선각산(仙角山)정상(1.142m)도 발아래 깔린다. 저기 뭉실한 오름이 덕태산인가. 능선이 하늘을 가르고 품에 안아 호남정맥을 이었다. 옹색한 표지석을 감싼 산님들을 가두려다 나까지 끼어 가두곤 셔터를 누른다. 곧 내리막을 내달린다. 완만한 내림 길에서 노란 좁쌀 수십 개를 모아 꽃을 취하려는 마타리(새싹이 지식 하나를 내게 선물한다)에 눈을 팔던 참 이였다. 뒤따르던 마태오님의 얘기가 나의 귀를 뻥 뚫고 있다.

아침에 집 나오면서 마누라에게 뽀뽀뽀를 세 번은 해 주고 왔다는 거다.

그건 비단 오늘뿐이 아니라 출근 시 일상인 인사란다. 그 짓(?)을 34년 동안 궁상맞게(?) 해오고 있단다. 궁상맞다고 여긴 나는 그 분에겐 지지리도 못난 옘뱅이가 아닐른지. 하여튼 난 감명 받았다. 그를 빤히 쳐다보며 재차 확인하는 촌극을 벌렸다. 감동은 저 전번에 이미 받았었다. 몇 번 마주하지도 않은 처지지만 나는 그의 인후한 인품을 훔쳐보고 있었다.

그가 좋아 오늘의 그를 따르는 산행(둘째 일요일이 그가 꾸리는 원고동문산악회의 정기 산행일이고 그의 꼬리 흔듦에 난 이끌려 첫걸음을 땠다)을 시도했음도 솔직한 고백이다.

그는 가난하다. 그의 가난은 우아하다. 가톨릭인 그는 선천적인 온유성까지를 더했다고 여겨진다. 그의 가난은 빈 마음이다. 빈자에겐 일상의 거의가 감사함으로 다가올 것 같다. 그는 하루하루가 감사생활일 거란 생각이 든다. 그러게 아침마다 궁상맞게 뽀뽀를 두서번씩 나누며 34년을 살아오고 있음이리라.

알렉산더 쇤베르크는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방법>중에서 “가난해지는 순간 맘먹기에 따라 우아하게 사는 길이 열린다.”고 했다. 그에게 걸 맞는 금언 같다.

우아하게 가난해져 얻는 행복을 생각하며 계곡 깊숙이 빠져들었다. 한 시간을 골짜기 청정수 웅덩이에 부려놓았다. 간단히 씻고 서간수로 목을 축이고 자리를 떴지만 난 뒤처졌다. 시샘이 나서 억지춘향노릇이라도 해보고 싶다. 아니다, 지금 나도 가난하다.

물 한 병과 도시락 하나 달랑 배낭에 넣고 집을 떠나 깊은 산록을 찾아드는 산행은 참으로 우아한 피서길 일 것도 같다. 뜨거운 햇살마저 두터운 녹음 속으로 숨어들어 숲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쉴 자리를 기웃거리는 숲실의 산행은 흐르는 땀만큼 갈증을 잉태한다.

그 잉태의 농도에 비례하여 초록 숲의 상쾌함을 절감케 하는 만족감은 빈자(貧者)만이 갖게 되는 충일이고 행복이라 할 것이다. 물가에 앉아 그러게라도 위안한다.

맨 후미 총무님을 만나 산길을 마무리한다. 금강산이 요술을 부렸는지 자리를 떠 좀 아래 조그만 주차장에서 잠자고 있다. 아래 계곡으로 내려갔다. 산님들 모두 삼삼오오 앉아 식도락에 빠졌다.

김대장과 마태오님이 손짓한다. 널따란 바위 한켠에 엉덩이를 얹곤 푸짐한 삼계탕 잔치에 끼어들었다. 갖고 온 도시락은 얼굴 내밀처지가 아니었다. 군데군데 살점 뜯겨난 닭들이 널려 있다. 20여 마리를 삶았단다. 한 참을 뜯으며 주위를 살피니 계곡 수중보 아래 거암 대여섯 개가 흐르는 물을 가둬 웅덩이를 만들고 수백 년은 살아온 적송이 그늘 막을 친 명당자리였다. 포만감에 할 일 없는 산님들이 하나둘씩 웅덩이로 모여든다. 이내 물장난을 친다. 성에 안찬지 자맥질을 하여 더위를 물린다. 사내들은 거의 다 물귀신이 됐다. 이제 여자들 차례라. 사내들이 여자들을 정중히 모셔(?)다 물침대에 눞이고 있다. 괴성이 자지러든다. 여자들도 물맛 들렸던지 웅덩이주변에서 어슬렁거린다. 물싸움이 ‘물 난타’ 한마당을 연출하고 있다. 사발이 나오더니 프라이팬이 등장하고 쟁반에 스티로폼 아이스박스 뚜껑까지 물을 두들겨 끼얹고 있다. ‘물 난타!’ 오늘의 주제는 <주방장들의 깨복쟁이 시절>~!


3.40년을 훌쩍 되짚어 타임머신 타고 물 난타 짓에, 괴성과 웃음과 고함이 물 흐르는 소리와 함께 튀기는 물방울을 타고 골짜기로 퍼질러간다.

그들의 맘은 지금 텅 비었을 터. 오직 물 난타 짓에 매몰된 늙은 애들일 터. 더럽게(?) 가난해 져 있을 터. 순간의 즐김에 충일할 터. 그것들 모두가 우아한 가난이 가져다주는 기쁨이라고 생각해 보고 싶었다. 쇤베르크는 말한다. “부자들은 부의 천박한 속성 때문에라도 우아해지기 힘들다.”고.

기름기 유들한 뱃속에 목엔 깁스를 하고 머리통은 내일 무슨 거짓말을 할까 궁리하는 투기꾼 졸부와 아부 출세꾼들에겐 그 천박한 속성이 대단한 위신인 땜에 우아해 지기 어렵다. 천방지축 날뛰는 산님들의 우아한 알몸을 보면서 바위에 앉아 입이 째져라 웃기만 해야 했던 나는, ‘첫손님’이라는 핑계의 옷을 입고 지지리도 못나게 가끔은 공중을 선회하는 고추잠자리를 힐끗힐끗 훔쳐보아야 했다.

솔직히 그들이 무진 부러웠다.


08. 08.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