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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내려놓는 우리명산 답사기

계룡산의 만추 속 이야기

★계룡산의 만추 속 이야기★


원우인들의 산행에 낀 내가 갑사 해탈문을 지나쳤을 땐 am9쯤 이였다. 갑사를 몇 번째 왔던지는 모르겠으나 그때마다 갑사계곡엔 물이 넘쳤었다. 그 물소리는 계곡을 울렸고, 울림의 하모니에 이끌리다보면 일탈도 빨랐지 않나 싶었다. 근데 오늘은 계곡이 말랐다. 돌도 마르고, 나무도 말라 풍요가 마르면서 가을도 벌써 만추의 끝자락에 들었나싶었다.

물은 생명이다. 만물은 물이라 해도 될까! 생명에서 물을 빼면 남는 건 마른 껍데기 한조각일 것이다. 대성암 갈림길에서 연천봉 오르는 산길은 가뭄으로 윤기 잃은 나목가지들에 말라 삐뚤어진 갈색이파리 몇 개가 떨고 있다. 햇빛마저 없어 퇴퇴한 골짝은 조락의 스산한 기운이 물씬거리며, 단조로운 시계는 급경사 빡센 오름길을 더 지치게 하고 있다.

한 시간을 오르니 연천봉(738.7m)이 소나무들을 폼 나게 키워 바위얼굴을 화장하곤 나를 맞는다. 그 멋들어진 소나무에 기대고 바위얼굴에 앉았다. 저 아랜 신원사가 자리하고, 동쪽 지척에 관음봉과 천황봉이 달려오고 있는데, 발밑은 등운암자가 꽤 넓은 터울을 거느리고 청정수를 맘껏 솟아내고 있다. 내려가 석간수 한 모금을 맛본다.


문필, 관음봉 가는 길은 8부능선 옆구리인데, 황갈색 캔버스위에 검회색 나목들을 무수히 그리곤 나지들 띄엄띄엄 온갖 색깔의 이파리들을 그려 넣었다. 그러다 화가는 신경이 날 섰던지 노랑과 빨갛 크레파스를 뭉텅 붓에 묻혀 나목위에 문질러 놓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화가는 나무보다는 바닥에 더 맘을 쓴 것 같다. 캔버스 바닥[땅]이 검주황 갈색의 신묘한 조합으로 따스하고 볼륨 풍성한 은근함 속으로 나를 빨려들게 하고 있어서였다. 거기 그림에 반시간을 빠져들다 보니 관음봉(765m)에 이른다.

산정은 입추의 여지가 없는 사람봉이 돼 있었다. 디카에 어찌 한 장쯤 담았는지-. 삼불봉을 향했다. 길은 벼랑이고 철제사다리가 대신했다. 인파로 지체되는 길목에서 관망하는 삼불봉을 잇는 바위 산릉을 계룡산의 비경이라. 바위산은 허리굽혀펴기를 심하게 하고 있고, 참으로 멋들어지게 소나무들을 키우고 있었다. 그 능선을 ‘자연성릉’이라 하는데, 바위능선은 소나무를 키우느라 영양실조 된 듯 앙상한 뼈대만 남아 깊은 협곡을 만들었고, 그 협곡 아래엔 갑사와 동학사가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다.

능선은 남쪽에서부터 황적, 천왕, 천황, 관음, 문필, 연천, 삼볼, 신선, 장군봉으로 어깨를 맞대며 계룡의 신비를 자아낸다. 일찍이 수도 터 답사에 나섰던 이성계을 동반한 무학대사는

여기 산세를 보고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요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이라”고 명산임을 말했는데, ‘계룡’은 여기서 따 온 이름이다.

그래 설까. 지관의 ‘지’자도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아기자기한 산 능과 품안의 갑사, 동학사, 신원사의 터울이 안온하다. 암벽을 오르내리면서 마주치는 소나무의 용트림과 모두가 지척간인 산정의 위용에 취하다보니 정오가 지났다. 삼불봉 면전에 점심자리를 폈다. 그리곤 뾰쪽 봉우리(삼불;777.1m)를 정복했다. 이제 하산코스다. 신선봉쪽을, 천정골을 단념해야한다는 아쉬움을 달래며 오뉘 탑을 향해 내리막길에 들었다.

하산 길은 꽤 넓은데 인파로 흐른다. 오뉘탑 마당도 상당하지만 인해성시를 이뤘다. 사실 오뉘 탑은 어설품과 황당함의 산물이다. 구전(口傳)이란 게 원래 픽션이기 십상이지만 오뉘 탑의 구전은 그저 입담일 것 같다. 망한 백제 왕가의 사내

가 여기서 구도를 하는데, 함박눈 쏟아지는 밤에 느닷없는 호랑이가 색시를 업고 와서 사내 앞에 내려놓고 사라졌다. 색시는 오늘 결혼하여 신방에 들었다 볼일이 있어 잠깐 문밖으로 나왔다가 호랑이에게 보쌈 당한 터였다. 호랑인 얼마전에 목에 뼛조각이 걸려 사경을 헤맸는데, 그때 사내가 이를 발견하고 목에서 뼛조각을 빼주었었다.

--<오뉘탑>

호랑이 딴엔 보은 한답시고 신부를 도둑질 해온 셈이니, 혼주집엔 날벼락을 준 셈이다. 그놈은 그때 뼈조각에 목이 뻥뚤려 죽었어야 했다.

해동이 되자 사내는 색시를 귀가시킨다. 근데, 색시부모는 색시를 사내에게떠맡기며 “목숨을 살려줬으니 끝까지 같이 살라”는 거였다. 하여 남녀는 동거에 들었다. 한 이불속에 살면서도 살을 섞지를 않고 구도에 매진하여 성불을 했단다. 그걸 기념하는 탑이라 했다. 어설프고 황당한 뻥튀기 입담일 것 같다. 허나 각박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겐 다소 엉뚱하고 어설픈 빤히 들춰 보이는 허망한 틈새에서 위안을 얻는 해방구일 때가 있다. 바보(?)같은 사내는 혹시 살을 섞으면 득도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을까. 그런 법이 없음인데, 살도 섞고 도도 깨침 좋았을 텐데····. 호랑이 땜에 평생 살맛도 못본 색시의 애간장이 얼마나 탓을지 상상을 절한다.

그래도 오뉘 탑이 매력인지 사람들은 보고보고 또 보고 찍고 또 찍어댄다.

오뉘 탑 아래 골짜기에 당단풍이 오뉘 탑의 색시였든지 핏빛으로 타고 있다. 그녀의 애타던 마음을 발갛게 태우고 있는 거다. 그 당단풍 앞에 풍개나무가 사내처럼 푸르디푸르게 철도 모르고 서있다. 타는 당단풍과 진녹색의 철부지 풍개나무는 어설픈 궁합이려니-. 오뉘 탑의 애간장 끓임을 생각하며 동학사아래에 이르렀다. 풍개나무는 사라지고 애 닳던 당단풍만 붉게 물들어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동학사골의 붉은 단풍은 오뉘의 색시피렸다.

난 또 오늘도 후미다. 잰 걸음으로 버스정류장엘 도착했다. 기다리고있던 마태오님과 빅토리오님께 나는 넉살좋게 “저 아래 자작바윌 보고 오겠다”고 밑도 끝도 없는 말을 건네고 외도를 떠났다. 500m 이상을 뜀질하다시피 했다. 도중에 대여섯 분께 ‘자작바위’를 물었으나 자작바윈 저기 앞산 봉우리에 있는 바위라고 가리킨다. 어느 가든 주인장이 ‘요 아래 ‘울바위는 있다’고 한다. 마을

이름이 자작마을이지만 정작 ‘자작’이란 유래는 아는지 모르는지?

‘울바위’가 ‘자작바위’임엔 틀림없겠다. 수양이 동학사에 초혼각을 세우고 제를 지낸 후 떠나면서 비틀비틀 자작걸음을 걷다 뒤돌아보곤 울먹인 장소가 그 바위였으니 말이다. 어떻든 그 울바위에 닿았다. 바윈 낮고 펑퍼짐하게 상가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울바위 위엔 다섯 명의 여자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혹여 알고나 있는가 싶어 난 “이 바위를 아세요?”하고 물었다. 동문서답이라. 얘기 할 짬이 없어 사진 두장에 담기로 했다.

근데, 여자 한 분이 기념사진 한 장을 찍어 보내달란다. 시간 없어 낭패한 나는 대뜸 “한국의 산하 사이트를 보세요?”라고 물었다. 그리곤 “거기서 찾아 가세요.”하곤 그녀들을 모델로 삼아 다시 찍곤 되달려왔다. 뛰면서 생각하니 내가 너무 야박하게 군 것 같았다. 수양처럼 뒤돌아보았다. 눈물을 글썽이진 않고-.

생각하면 수양대군은 단종을 폐위시키고 등극하기까지 반정을 하며 희생자를 많이 낸 것만 빼곤 선정을 베푼 성군 이였다. 수양은 독한(개국초기의 나라를 반석에 올리기 위한명분) 이면에 인자한 심성도 있었기에 자기로 해서 희생된 280명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초혼각을 세우고 친히 제를 올린 거였다. 그 사연을 알아 자작바위를 찾아보고 싶어 꼴지 주제에 욕먹을 외도 짓을 한 게다. 동학사엔 홍살문이 있다.



홍살문은 신성하고 엄숙한 터전임을 말하는 출입문이다. 동학사엔 수양이 세운 초혼각(超魂閣) 외에 고려 3은(포은,목은,야은)을 뫼신 3은각(三隱閣)과 신라 박제상을 기리는 동계사(東鷄祠)가 있다. 나는 오늘 그 자작바위를 보기위해 원우인들 산행에 더 끼고 싶었던 것이다.

모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개숙이고 도둑처럼 기어들었다.<자작바위의 강원녀>
계룡의 만추는 나를 또 다른 맛에 빠지게 함 이였다.

08. 11. 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