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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내려놓는 우리명산 답사기

사월의 파스텔톤 (가야산)


★ 사월의 파스텔톤 (가야산) ★


오늘 아침 사(4)월이의 품은 유난히 따스하고 싱그러웠다.

산야엔 아직 검회색겨울의 때깔이 드문드문 남아있긴 하지만 아기연초록빛깔이 번져가고 있는 누리란 캔버스엔 성글게 산 벚꽃이 하얀 덧칠로 뭉뚱그리고, 진초록 뚝뚝 묻어나는 청보리밭 끝자락 산비탈 밭뙈기에 배와 사과가 소복을 입었나하면 고속도로 언저리엔 줄차게 조팝(반국수나무)나무가 때늦은 흰눈을 흠뻑 뒤집어쓰고 있었다.

짐짓 사월이만이 선물하는 파스텔톤의 풍경화라. 그 풋풋하고 싱그런 파스텔톤에 몰입하길 3시간 반, 가야산 백운동 매표소 주차장에 버스를 때놓아 버렸다.

가야산은 들머리부터 호락호락하지 않는 경사를 이루었고, 길은 돌너덕에 이어 무릎 팍팍하여 숨 몰아쉬어야만 할 계단으로 줄곧 이어지고 있었다.

나를 영접한답시고 늘어선 졸참나무들도 아직 청년티를 벗지 못한 체 고만고만한데 30여 분을 오르다보니 산죽이 지난겨울에 상체기 입은 얼굴로 인사를 해오고 있다. 아니다. 반갑게 웃으며 인사하는 놈은 산죽 밑에서 수줍어 갈피 못 잡는 하얀 제비꽃의 앙증스럼과 보랏빛의 고혹스런 미소를 짓는 얼레지였다. 연보라 꽃잎을 초롱처럼 오므리고 있나 했더니 이파리를 여섯으로 갈라 활짝 벌려 뒤로 말아 제킨 화사한 얼레지는

나리꽃 새끼의 새끼새끼 같다. 이놈들이 이젠 무리지어 나를 유혹한다. 그가 정녕 기다리는 매파(媒婆)가 내가 아니란 걸 모르는 모양이다.



난 내 앞뒤를 훑다 보는 이 없어 그를 하나 꺾어 도둑질한다. 결혼하고 싶어 안달인 처녀[암술]가 가운데 초록 씨방에서 튀어나와 자주색 루즈 가루를 흠뻑 묻힌 입술을 내밀고, 주위엔 총각[수술]다섯이 못난이처럼 보디가드 노릇을 하느라 빙 둘러 있었다. 또한 기묘하게도 보랏빛 이파리 안쪽 깊숙이 씨방주위를 구절초 꽃문양을 문신했음이라.

얼레지를 감싼 산죽의 세는 지표를 여지없이 뒤덮었고, 그들 위엔 졸참나무가 소나무 몇 그루에게만 터를 전세 놓곤 빽빽 울창하다. 헌데 요놈들 아직 동면비몽사몽인지 가지 끝에 새싹이 솟질 안했다. 제비꽃과

얼레지가 난분분한데 말이다.

<얼레지>

서성재를 넘는다. 사숙제(강희맹 : 이조초의 문신으로 ‘양화소록’의 저자)는 얘기했다.

“너의 그 맑은 향기로 해서 천지의 봄임을 깨달았느니-.”라고.

그는 꽃을 볼 때 아름다움만 보지 말고 그 꽃의 덕목을 살피기를 권했다. 국화에선 은밀한 품성을, 난초에선 그윽한 운치를, 창포에선 외로운 절개를 감상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사숙제가 인근 지리산자락개울가에서 노년을 살 때 그의 집안은 사시사철 울타리 밑에 온갖 꽃들이 피었다. 그는 그 꽃들을 기르느라 피곤한줄 모르고 푹 빠졌다. 그런 그를 주위사람들이 “꽃 기르는데 너무 무리하여 몸이 쇠하고, 꽃의 아름다움에 빠져 마음까지 빼앗기는 게 아닌가?”하고 물었다.

“천지가 그윽한 만물을 보니 나름대로 다 오묘한 이치가 있더라. 그들의 덕을 본받아 나의 덕으로 삼는데 어찌 이로움이 많지 않겠는가. 이른바 사물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겠지.”라고 대답한다.

그런 경지야 얼토당토지만 마음이라도 한 번 추스르고 꽃을 대하자고 나는 얼레지한테 말한다. 산죽의 텃세는 여전한데 졸참나무가 이젠 세월에 찌든 옹두라지인지 울퉁불퉁 기형을 이뤄 고목의 자태를 의시 댄다. 칠불봉 밑자락, 거대한 바위를 병풍삼은 졸참나무가 두 아름은 능히 될 거목둥치에 뱃속은 텅 비우고 사지를 쭉 뻗곤 제법 넓은 마당을 소유하고 있었다. 우린 거기에 자리를 깔았다. 정오를 지나치고 있었다. 점심으로 나는, 어제 밤 햇쑥으로 빚은 개떡을 꺼내 이죽이죽 씹었다. 사월이의 쑥 향이 입안 가득하다. 식탐을 끝내고 바윗길을 더듬어 칠불봉에 발을 디밀어 넣었다. 바람이 막아서였다.

한사코 막아서는 그를 어찌할 순 없어 냉큼 되돌아와야 했다. 상왕봉이 지척인데 바윗길이 지랄이다. 허긴 암벽을 오르고 내려야 산행 맛이 솔깃한 법. 암벽이라야 철재사다리로 이어졌으니 수고로울 것도 없겠다. 상왕봉 턱밑이 상당한 분지라. 근데 거기 척박한 바위에 노랑제비꽃이 입으로 후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얼굴을 들고 눈 꼬리를 치고 있잖은가!?

얼마나 반가운지~! 얼마나 앙증맞은 미손지~!

그를 잠시 때놓고 상왕봉을 오른다.

바람과 햇살이 검은 바위를 훑는 상왕봉을 휘둘러보며 안무에 젖은 소백등걸을 주어 담다 후딱 노랑제비꽃에게로 달려왔다. 진정 그가 기다리는 임은 내가 아닌바 그를 성가시게 하는가 싶다. 바위와 돌멩이의 공짜 발 지압을 시간 반쯤 받다보니 석조여래입상이 무심하게 나를 쳐다본다.

얼굴의 이목구비와 가슴에 얹은 오른손이 희미한 윤곽을 보일뿐 천년의 세월에 시달린 탓인지 묵묵부답이다. 세월은 여래상도 어쩔 수가 없는가. 하기야 부처는 여래의 본래인데 풍상에 살점 뜯겨 떨어져나갔다고 여래불이 훼손될 리 없겠다.

여래상 아래론 산죽이 다시 지표에 초록양탄자를 깔았다. 얼레지도 이젠 나를 알아봤는지 얼굴을 외면한다. 어느 땐가부터 적송이 아름드리 몸체와 큰 키를 자랑하며 한두 그루씩 세를 이뤄가며 고고한 품위를 뽐내고 있다. 산죽 밑으로, 바위사이로, 적송 발부리를 적시며 청정수가 콧노래를 부르며 달리기를 하고 있다. 그렇게 한 시간여를 잊었을까? 해인사 요람이 왼쪽에 자리한다.

요람 옆구리를 파고들다보니 스님들의 수행 요사체들이라. 고즈넉한 사찰경내를 한가로이 몇 분을 아장거리니 아래로 애장왕3년에 창건 된 대적광전(서기802년 10/16일에 순승과 이정에 의해)이 나타난다. 오색찬란한 연등이 만국기처럼 매달려 춤을 추고 있다. 석탄일이 가까웠음을 말하고 있었다.

대적광전에 무엄하게 목을 디밀고 천정을 응시한다. 혹시 추사(김정희)가 쓴(1817년경) 상량문을 볼거나하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돌대가리여서 말이다. 그 돌대가리를 또 대적광전 벽에 그린 탱화를 일별하느라 시간을 허비한다.

그렇게 머리 아프게 골통 굴리다가 가파른 계단 위 대장경판고를 향했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다 못해 신비스런 건축공학의 백미를 곁눈질하고 싶어 판고(板庫)를 들여다보지만 머리만 띵하다.

표고 655m 가야산 중턱에 서남향으로 안치한 판고는 대장경보다도 더 신비스런 건축물이라. 판고 앞면 창은 위가 작고 아래가 크며 뒷면 창은 위가 크고 아래가 작은 크기로써 바닥 면엔 조그만 원통구가 수십 개가 또 있다.

숯과 횟가루, 소금, 모래를 차례로 다져놓은 바닥은 반질거렸는데, 그런 구조의 통풍이 판고의 보온, 보냉, 보습, 보기를 하며 해충의 침입을 막아주고 있단다.

해인사(海印寺) 해인은, 가없이 깊고 넓은 바다에 비친 티 없이 맑은 우주의 삼라만상의 참된 모습의 세계를 일컫는 해인삼매 경에서 따온 이름이니, 이 도량에서 입신, 입적한 학승과 대사, 국사가 하 많지만 근래에 입적한 성철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란 법어가 가장 해인사다운 불어가 아닐까하고 나는 또 불경스럽게 잔머리를 굴려보기도 한다.



경내 이곳저곳에 눈길을 팔다 홍류계곡으로 발길을 옮겼다. 청정수가 바위들을 어르고 보듬다 부딪쳐 내는 가쁜 숨소리가 하얀 거품을 타고 울창한 적송터널에서 메아리 되어 웅혼한 굉음으로 맴돌고 물은 명경지수가 되고 있었다. 가을단풍이 물속에 피면 홍류가 된다는, 해서 우리나라 8경중 으뜸이라는 계곡을 500m쯤은 다시 왕복해 본다.

용문폭포가 있는 야영장에 갈뫼인들이 뒤풀이 장을 펼쳤다. 떡살, 계란, 어묵을 끓인 퓨전음식을 소주 한 잔 곁들어 뱃속으로 집어넣었다. 이윽고 계곡으로 내려가 청류에 발을 담근다. 시려 단 1분을 버티기가 힘들었다. 맑고 찬 게 물도 과연 해인물이라.

이 홍류계곡에 빠지고 싶어 산행을 포기한 Leegj님 커플 생각이 스친다. 십몇 년 동안 얼마나 사무쳤으면 산 꾼이 등산을 마다하고 진종일을 계곡에서 뒹굴었겠는가! 그들 커플의 멋진 풍류가 입맛을 당겼다.

pm5시를 넘겨 버스는 홍류계곡을 따라 가야산을 털어낸다. 두어 시간을 달리니 땅거미가 누리를 잠식하여 사방이 어둑하고 저만치 산자락은 숯검정이 되고 있었다. 그 검댕이 산에 산 벚꽃이 군데군데 희게 솟아 월백(月白)한다. 뿐이랴, 조팝나무가 뒤집어 쓴 백화(白花)도 월백하고 있다. 누가 ‘이화(梨花)에 월백’이라고 읊조렸던가! 오늘밤이 그믐에 가까우니 진짜 월백은 이따 후에 펼쳐지리라. 아~아~! 사월의 선물이여!

오늘도 사월의 선물에 한껏 취해 취침에 들리라.

08. 04.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