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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내려놓는 우리명산 답사기

비 보이들의 춤사위 (지리산 고리봉)




★ 비 보이들의 춤사위 (지리산 고리봉) ★


am9;30,

남원시 주생면 도산리 목초 밭에서 산행준비에 들었다. 지리산의 한 자락인 문덕산을 종주할 참이란다. 길가 이름모를 야생화들이 청보리밭과 무논두럭을 차지하고 환하게 인사하고 있다. 잿빛구름이 낮게 드리워 5월의 산촌을 옴짝달싹 못하게 신록 속에 가두고 있었다.

산 입구, 단정히 앉은 양옥 담장에 빨간 장미가 흐드러지다 못해 월담한다. 깨끼발치 세워 뜰 안을 넘보니 장미화원이라. 계절의 여왕 5월을 여왕답게 하는 장미를 가득 안고 사는 주인장이 궁금하다. 그도 필시 장미광일까? “내가 죽거든 내 무덤에 빨간 장미를 뿌려 달라”고 유언했던 안토니우스가 스친다. 동서고금을 털어 그만치 장미를 사랑했던 위인도 드물 거라. 그는 장미에 반해, 장미에 빠져, 장미에 미쳐 아내(옥타비아)를 버리고, 삼두정치를 맹세한 동료(옥타비아누스&레피두스)들을 엿 먹이고, 조국(로마)까지 배반 했었으니 말이다. 그는 사랑하는 장미를 위해 악티움해전까지 일으키지만 패장이 돼 알렉산드리아로 도망쳐 장미의 뒤를 쫓는다. 그리고 장미가 죽었다는 오보를 접하곤 자기도 자결한다. 실은 아직 장미는 살아있었는데···. 장미는 클레오파트라였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장미로 침실을 장식하고 장미향을 뿌리며 장미를 보면 자기를 연상케 하는 장미의 화신 이였다. 안토니우스에게 장미는 클레오파트라였던 것이다. 해서 빨간 장미의 꽃말이 ‘사랑’, ‘격정’이라고 한다나.



그런 생각에 10여분을 문덕산 옷고름을 풀어 헤치며 기어들었다. 근데 길 잘못 들었나? 은초록빛깔의 호수가 수 천 평은 넘게 펼쳐져 잔잔하게 물결을 일으키고 있었다. 호밀밭이라. 기억 저편 망각해버렸던 호밀이 되살아난다. 개미허리만한 몸뚱이를 내 키만큼 키워서 수술도 아직 떨쳐 때지 않은 채 무거운 얼굴을 치켜들고 서있느라 보채고 있었다. 참으로 반가운 조우였다. 몇 번이나 뒤돌아보면서 그들을 때놓고 30여분을 올랐다.

제법 가파른데 안내하는 육송들의 추임새가 심상치를 않다. 몸놀림이 여간 수상쩍다. -<호밀밭>-

덩치도 각기 다른 그들이 서서히 S자로 율동을 시작한다. 점점 그 모션은 기고만장이라. 비틀고, 꼬고, 누었다, 기다, 떨더니 서로 엉키며 몸부림을 한다. 그사이를 실바람이 들릴락 말락 한 콧노래를 흥얼댄다. 육송들이 격한 몸놀림으로춤을 춤이다. 그들의 군무는 비보이의 현란한 오두방정보다 한수 위다. 지금 전주에서 경연하고 있는 비보이들은 여기 와서 사사를 해 볼일이다. 그 육송들의 광란의 춤사위 - 페스티벌에 티켓 없이 빠져들어 한 시간을 즐기다보니 문덕봉(578.1m)에 닿았다.

여기서부턴 암릉이라. 바위가 손을 내민다. 내 손을 이끌고 그들 동네 길을 안내한다.

얼마쯤 내리막길을 안내하다 그가 양손을 뒤로 제키며 나더러 등에 업히란다. 그의 등에 올라타 암벽을 오른다. 그가 헉헉댄다. 나도 덩달아 숨을 몰아쉰다. 암릉마루에서 그가 나를 부린다. 이젠 그가 내 뒤로 선다. 그리곤 나더러 자기를 업으란다. 그를 업고 바위 위를 조심스레 내려간다. 근데 웬걸, 그 거대한 바위를 업고도 무거운 줄을 모르겠다. 발걸음이 신난다. 아래 골짜기, 다시 그가 나를 업을 차례다. 그에게 업혀 빡세게 오르는데 그가 나를 내려놓았다. 여기선 바위와 포옹해야 한단다. 위를 쳐다보니 굵은 동아줄이 매듭을 만들어 늘어져 있다. 동아줄에 매달리다, 네 발로 바위를 보듬다 또 매달리다 절벽을 안고 올랐다.

그 짓거리를 연신 되풀이 하는데 간간히 바위위에서 육송은 트위스트를 추고 있었다. 그 기상천외한 춤을 구경삼다보니 팍팍하지도 않다. 아니, 낮게 내려온 하늘이 불어주는 시원한 바람이 상쾌하기 그지없다. 고정봉(605m)을 넘고 또 골짜기 끝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오르는, 바위와의 업힘과 업음에 이어 포옹을 반복하다보니 날씨가 시원해 쥑여줘도 몸에 땀이 홍건이 밴다. 그럭저럭 그락재까지 왔겄다. 암릉이 뒤에 쳐져 아쉬운 듯 손사래를 친다. 산마루를 하나를 더 넘어서 꼬르륵 소리 내는 뱃속을 달래잔다. 육송들도 배고팠던지 허리를 펴고 있다. 봉우리 하나를 넘어 분지에 자리를 깔고 있는 선두그룹과 합세했다. 도시락을 풀었다. 뱃속에선 성화인데 나는 입안에 밥을 넣고 천천히 씹었다.

씹는 즐거움까지 즐기고 싶어서였다.



pm1;30, 자리를 뚝뚝 털었다. 다시 오름길, 육송들도 헤헤 몸놀림이 없다. 포식한 포만감 땜일까? 예의 문덕산은 등걸을 오므렸다 폈다를 심하게 하여 암릉 못지않게 깊고 가팔랐다.

네 시간을 육송들에게 눈을 빼앗기다보니 그들의 춤사위가 다시 격해지는데도 신명이 나질 않는다. 두바리봉(555m), 삿갓봉(629m) 또 무슨 봉을 급하게 오르고 내린다. 남원과 곡성을 잇는 섬진강 상류개울에 젖줄을 멘 들판이 꽤 넓은데 언제, 누가, 무엇 땜인지 판유리[무논;水畓] 수 십 만장을 쫙 깔아놓았다. 오늘 하늘이 잔뜩 찌푸려서 다행이지 햇살 쨍하면 반사되는 빛의 스펙트럼에 시력을 잃을까 싶다. 바람이 세차다. 하산이나 한 뒤에 빗님이 오시면 하는 간절함이 솟구친다. 두 시간쯤 육송들의 광란 속을 헤치니 고리봉(708.9m)이 얼굴을 내민다. 아니, 내민 것은 느닷없는 분묘 한기였다. 최근에 만든 봉분인 듯한데, 21세기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명당에 자기들의 길운을 걸겠다고 이 높은 곳에 만용을 부렸다. 하늘 가까이 사자(死者)가 누우면 천운이 절로 오는 감-? 어쨌거나 배낭을 내려놓았다. 물통 바닥까지 훑는다.

골짜기 굽굽이서 서생 하던 아카시아가 산허리까지 오입을 나와 짙푸른 산록에 띄엄띄엄 하얀 꽃 무덤들을 만들었다. 신록에 번진 하얀 물감! 멋들어진 풍경화를 선사하고 있었다.

거기의 아카시아. 아니, 우리 산야의 아카시아는 행복한 놈들이라.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의하면(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아카시아는 동물들에 시달리다 못해 기발 나게 생명을 유지시키고 있단다.

그들은 짐승들이 자신을 뜯어먹으려 하면 제 수액의 화학적 성분을 독성으로 변화시켜 짐승들이 뜯어먹는 걸 포기하게끔 냄새를 발산시켜 주위의 동료들에게도 알려준다. 그럼 순식간에 근처의 아카시아는 일제히 화학작용을 하여 동물을 퇴치시킨단다. 그런대도 그 아카시아 잎을 뜯어먹은 동물들(특히 염소 등)은 결국 독에 중독 되어 죽게 되였고, 그런 사실을 사람들은 이제야 알게 되었단다.

생명 있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게 우리가 경외심을 품지 않을 수가 없음이라.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도 함부로 해선 안 될 내 목숨과도 같다는 소명의식을 갖지 않을 수없음이라.

그 아카시아가 있는 골짜기를 향해 하산한다. 약수정사로 가는 길은 인적이 뜸했던지 완전히 숲실을 이루었다. 골짜기 청정수로 타는 목을 축

이고 약수정사 입구에서 배낭을 버스에 실었다. pm5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허나 버스는 뒤풀이를 기다려 시계바늘이 똑바로 곧추서서야 “부릉~ 부르릉~” 방귀를 끼며 진종일 처박았던 궁둥이를 움직인다. 방귀 낀지 한 시간쯤 달렸을까, 이젠 세찬 빗발이 차창을 때린다. 천둥이 차창을 부수려 든다. 이윽고 번개가 차창을 뚫고 들이친다. 5월의 여왕은 검은 비로드 천으로 사방을 두껍게 장막을 쳤다. 갈뫼장이 일어선다.

오이 하나씩 나눠 먹음이 무슨 큰 생색이 되어, 마이크를 잡은 갈뫼장은 굳이 내 이름까지 고지하고 있었다. 기분이 묘해졌다.

분명한 것은 그가 있고, 갈뫼인들이 있어 ·

나는 오늘도 5월의 여왕 품에 안겨 행복해

질 수가 있었는데 말이다.

짐짓 오늘 나는 여왕 품에서 행복했다. 사랑에 빠졌던 안토니우스처럼 말이다. 그의 유언을 차용하고 싶다. 아니다, 이렇게 말 하고 싶다.

“나의 잠자리에 5월의 여왕이 수청 들게 하라.”고.

08. 05.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