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 베간 세상"의 호곡소리(월봉-거망-황석산)★
“나는 친절과 겸손과 우정으로 내 삶을 가치 있게 해 준 설리번선생님을 찾아가, 이제껏 손끝으로 만져서만 알던 그녀의 얼굴을 몇 시간이고 물끄러이 바라보면서 그 모습을 내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해 두겠다. 그리곤 밖으로 나가 바람에 나풀거리는 아름다운 나뭇잎과 들꽃들을 그리고 빛나는 저녁노을을 보고 싶다.”
-<에틀랜틱·먼스리 1933. 1월호에 헬렌켈러가 쓴 수필 ‘사흘간 볼 수 있다 (Three day see)'의 첫 날에서>-
나는 평소에 잘 쓰지도 않던 굵은 검정테 안경을 쓰고 눈을 감았다. 엷은 안무를 안은 풍경은 회빛으로 나의 실눈 사이를 비집어 들려한다. 헌데 느닷없이 버스는 남덕유산 나들목인 영각사 주차장에서 멈칫하고 있다. 네비게이션의 길안내 소릴 듣고 있는데, 버스는 엉뚱한 짓을 왜 했는지 기사만이 알 일이다.
청량한 영각사 앞에 먼지 한 옴큼만 보태주곤 되돌아 나와 제 갈 길을 찾아든다.
am9;50. 함양군 서상면 남령고개에서 우린 버스를 탈출했다. 월봉산을 오르는 길은 가파른데다 낙엽가지 두툼히 쌓여 신경이 곧추서게 한다. 이마에 돋은 땀이 안경테에 머물곤 한다. 20여 분을 오르니 집체만한 사각바위가 길을 막고 월봉산(1279.2m)을 우회하란다. 애초에 안중에도 없어 그를 뒤로 세우고 거망산을 향한다. 이제 백두대간 능선이라.
나무들은 모두가 옷을 벗었다. 그 옷들이란 한결같이 갈색으로 변해 나의 발끝에서 사각거리고 있다. 말라삐뜰어진 이파리 몇은 앙상한 나뭇가지에 붙어 바르르 떨고 있다. 그 위를 지나는 바람이 울고 있다. 바람이 우는 게 아니라 나목의 신음소리가 바람을 탓을 테다. 갈수(渴水)로 멋들어진 때깔 옷단장도 못하고 떠 밀쳐내어야만 했던 한(恨)과, 그 피붙이 떼어낸 상처 아물기 위해 병아리눈물일망정 뿌리에서 뽑아 올려야하는 신고의 아픔소리일 같다.
7km남짓 앞서 있는 거망산은 여러 산릉 속에 숨어 보이질 않는다. 난 오늘 홀로 산행이다. 오랜만에 호젓함에 풍덩 빠져보고 싶었는데, 안경(눈병)이 자꾸만 거슬린다. 나를 이곳에 대려다 준 ‘엄지산악회’도 처음이라. 내게도 산 이력이 좀 붙었던지 버스에서 마주친 몇 분 얼굴이 전혀 생소치만은 않다.
바람은 간헐적으로 울며 달려오고, 낙엽은 발길을 어설프게 하며, 앙상한 나목들 뒤로 안개의 장막에 흐릿한 산령들이 시야를 더 흐리게 하고 있다. 다만 몇 백 년을 살아온 졸참나무가 수형(樹形)의 기교(奇巧)를 맘껏 뽐내며 텃주대감 노릇을 하며 시선을 끌고 있다. 오직 푸른 것은 산죽과 가뭄에 콩 나듯한 소나무라.
이 드넓고 높은 백두대간 능성에서 ‘구르몽의 낙엽 밟는 소리’를 듣기도, 갈 흑색의 황량함 속에서 가을단풍을 탐할 수도 없음이 어쩜 내겐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그것은 나의 오른쪽 눈이 심히 앓고 있는 탓에 시신경을 아껴야 함이라. 나는 십 여일 전, 2차 농활(農活)에 들었었다. 수천 평 감나무단지에서 감(대봉)따기를 사흘째, 감나무가지에 오른쪽 눈을 다쳤고, 무의식간에 더렵혀진 장갑 낀 손으로 눈을 비볐었다. 이윽고 눈이 충혈 되고 따가워 일요일(26)늦게 귀가했다.
담날, 안과를 찾은 내게 의사는 세균감염으로 2주간의 치료를 요한다는 진단을 내렸고, 졸지에 난 한쪽 눈으로만 생활해야하는 답답함을 감수하게 됐다.
몇 일간의 반맹아 신세로 헬렌켈러를 생각함이 사치(?)일 테지만, 신체 한 부분의 어설픔도 얼마나한 불편인가를 통감케 한다. 참으로 시건방 떠는 짓은 이 눈으로 산행을 하겠다고 산악카페를 서핑하고, 황석산행을 알리는 ‘엄지’를 발견하곤 이미 예약이 끝났는데도 문을 두드린 거였다. “황석산행에 홀몸 낄 수 없는지요?”라고.
근데, 담날 총무님께서 ‘OK'사인 전활 주셨다. 참으로 무모한 산행인 셈이다. 하드래도 막상 산에 오르니 답답함에서, 온갖 상념에서 일탈하게 돼 시원하다. 몸뚱이에서 비집고 나오는 노폐물까지도 시원한 바람이 씻어주는 상쾌함을 맛보이며, 발끝에서 사각대는 낙엽소린 무딘 감각을 되살리고 있다.
정오가 되니 거망산(1184m)이 전혀 거망스럽지 않게 발아래서 읊조린다. 인적에 헐벗은 정수린 바람에 먼지를 날려 보내고 있었지만, 몇 몇 산님들은 점심자리 깔 궁리를 하고 있다. 황석산이 안무 속에서 희미한 산령 몇을 앞세우곤 신비한 모습을 우뚝 비추고 있다. 기다리는 그를 빨리 만나야 한다. 나는 서둘렀다. 새벽에 아내가 차려준 찰밥 한 공기를 비었기로 뱃속도 든든했다. 걱정은 십여 일 동안 이틀 걸려 안과를 다녔을 뿐이기에 남은 댓 시간을 탈 없이 산행을 할 수 있을까싶었다. 황석산까진 7km이상이 남았고 종점까진 12km남짓 남았다.
거망산은 아래에 억새밭을 일구고 있었지만 초라했다. 바람에 하얀 머릴 풀어 날리다 헝클어져 미친년이 되기도 했는데, 민대가리가 된 놈은 긴팔과 옷고름은 헤져 주저앉고 있다. 아랫도리 힘마저 빠짐 꼬꾸라져 새싹의 양분이 될 게다. 나도 하얀 머리가 갈수록 드세진다.
육산이 생뚱맞게 커다란 바윌 쪼개서 75도로 각을 세워 나를 부른다. 거기에 딱 두 사람만 자리할 공간을 만들고 있다. 그의 아랫도리를 잡고 공간에 짐을 풀었다. 모처럼 다리를 폈다. 점심도 풀었다. pm1시였다. 벼랑 앞을 조망하며 입을 즐겁게 하는데, 청년 한 분이 나의 쉼터가 쏙 맘에 들었던지 엉거주춤 말을 건넨다. 냉큼 초대(?)했다. 그는 들어서기가 뭣한지 배낭을 벗곤 기운 바위에 등을 기대고 삼각 김밥 두개를 꺼낸다. “새벽에 집사람에게 미안해서···.”란다.어쩜 그리 동감동색(同感同色)일까. 난 먹던 찰밥 한 덩이와 김과 김치, 계란부침 몇 개를 찬뚜겅에 담아 건넸다. 참으로 초라한 나눔이다. 그 초라하디 초라한 나눔에 그는 수십 배 따뜻한 감사의 말로 나를 얼굴 들 수 없게 하고 있었다. 그는 먼저 떠났다. 나도 자리를 털고 게으름을 피우는 걸음을 하며 아까의 청년을 잠시 생각했다.
산을 몇 개나 가로지르고 넘었을까. 황석산이 아직 5.3km남았다는 이정표가 서있다.
5시까지 하산하라는 당부가 생각났다. 사타구니에서 땀을 쏟아야 할 참이다. 이윽고 대여섯 명의 산님들 꽁무니에 접했다. 구면이다. 지난, 소매물과 설악 공룡사냥, 오대산에서 뵌 ‘새 이리떼’다. 반가운데 따뜻하게 맞으니 시름이 싹 가신다. 줄차게 그들 꼬리를 이을 작정이다. 근데 얼마쯤 잰 걸음을 걸었을까.
뒤에서 뽕짝가요소리가 들린다. 두 분이 꼬리를 이었음인데, 노랜 거기서 흘렀다. 왠지 귀에 거슬려 자리를 비껴주고 저만치 간격을 두고 뒤따른다. 흐릿한 날씨에 앙상한 나목들과 울음소릴 내는 바람의 백두대간이 멜랑꼴리 하다는 걸까? 그래서 노래를 틀고 있는 걸까. 얘라! 말을 접자.
안개 속에 하얀 황석봉이 슬슬 그 위용을 내보이고 있다. 그를 가린 앞 산릉을 넘으니 하얀 갈개를 악어지느러미처럼 늘어뜨리고 바위산은 첨탑마냥 솟았다. 밑엔 흰 석축이 빛 돋는다. 디카를 꺼냈다. 너를 보기위해 오늘을 죄다 쇠진한 나였다. 그의 옆구리를 빙 휘돌아 산정을 향한다. 그의 턱밑에 배낭을 풀고 밧줄을 움켜잡고 치솟은 그를 기어올랐다.
바위 아닌 것은 얼씬도 못한다. 나를 날려 보내려다 못해 모자를 벗기려 앙탈이다. 안무 땜에 탁 트인 조망이 아쉽긴 했지만 넘 상쾌했다. 아찔하다. 정상(1190m)은 단 몇 사람도 편히 쉴 공간을 사양함이다. 흐린 날씨 속에서도 거느린 하얀 갈개와 산성이 선연하다. 영남으로 뻗던 백두대간은 육산으로 마무릴 하다 여기서 화강암으로 멋있는 피날레를 장식하려 함 이였을까!
다시 황석산성에 섰다. 새로 축성한 탓에 피비린내 홍건 했을 비통한 흔적은 어디서도 쉬이 찾아보기 어렵다.
깔끔한 산성에 서서 시원한 풍광을 조망하다 언뜻 ‘코 베가는 세상’을 유추해 본다. 임진란에서 정유재란까지 왜장들은 졸개들에게 적을 많이 죽인 자는 포상을 하겠다고 악발을 토했다. 죽인시체 수는 베어 온 코로 셈했다. 시니컬한 코미디가 아닌 소름끼치는 실재역사였다. 왜병들은 너도나도 시신의 코를 베어 꿰찼다. 임란은 코 베가는 세상 이였던 것이다.
1597년 8월14일, 이곳 황석산성엔 안의면을 비롯한 인근 네 고을의 주민 천여 명(몽땅)이 모여들었다. 가도오 기요마시(加藤淸正)를 비롯한 13개부대장이 이끈 6만4천명의 왜군이 전라 전주성을 쳐들어가기 위해 이곳을 소탕하고 황석산성을 넘어야 했던 것이다.
적에게 식량 한 톨도 남기지 않으려 마을을 소개한 땜이기도 하지만, ‘코 베가는 세상’에 누가 마을에 남아있겠는가. 주민 천여 명은 여기 황석산성에서 왜군과 맞딱드려 일전을 해야 했다. 애초부터 전투는 중과부적이라 뻔했다. 오직 ‘필사생’뿐이라 생각했기에 육박전이 사흘간이나 계속됐다. 최후엔 산성에 오른 적을 보듬고 천길 벼랑으로 몸을 던졌다. 산성아래 화강암바위엔 시신과 선혈이 낭자했다. 지금도 거기 바위를 ‘피 바위’라고 부르고 있음이다.
주민 한 사람도 살아남지를 않은 옥쇄였다. 왜군도 반에 반쯤(1만5천명)은 죽거나 병신이 됐다. 그 치열했던 사흘간의 육박전과 왜적의 피해는 1597. 9. 22일자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황석산전투에 참가한 13개부대장에게 써서 보낸 감사장(?)에서 명료해진다.
“1597년 8월 17일에 보낸 보고서와 도면은 봤소. 전라. 경상 경계에 있는 안음군내 황석산성을 8월16일에 함락시켜 김해부사(백사림)의 목을 구로다 다가마사가 베었고, 성내의 조선군 353명과 계곡에서 수천 명을 죽였다니 수고했소. 앞으로 좌군(우키다 히데이어)지휘관과 협동하여 실수 없게 작전하시오. -풍신수길-”
괴수, 히데요시의 글을 보면 황석산전투는 ‘실패한 승리’였다. 거기서 살아남은 왜병들은 골짜기의 시신들의 코를 베 꿰찼고, 동료의 코빼기도 베어 엮어 포상을 탓을 테다. ‘코 베가는 세상’의 칼바람은 우리의 선님들이 구천에 묻었는지 시원한 가을바람이 나를, 무심한 산성을 어루만지고 있다. 아니, 바람소리가 호곡소리 같다.
처절한 역사의 현장에 서니 슬프고 뜨거운 한숨이 목젖을 울린다.
이 처절하고 숭고했던 역사의 현장에 흔한 안내문 하나 없다. 세계역사에 전무후무한 ‘코 베기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그 수치스럼을 호주머니 깊숙이 처넣고, 그저께도 어떤 광신도 일본 장교(차관급)는 태평양전쟁은 아세안이 극구 한영 해 맞았다고 코 베갈 소릴 하고 있었다. 코에 귀때기까지 벨(애초엔 귀를 벤다. 허나 귀가 둘이라 코로 방향전환 했다)놈 이로고-.
pm3시반을 넘겼다. 서둘렀다. 하산길이 급경사인데다 바위조각들 무덤에다 다듬지도 않았는데 낙엽까지 쌓여 가장 힘겨운 산행코스가 됐다. 그래도 거기 골짜기엔 단풍이 곱게 물들어 오늘 내내 갈갈했던 가을을 안겨주고 있었다. 한 시간 사십분을 골짜기에서 씨름해야 했다.
황석산은 압권 이였다. 하루의 여정이 갖다 준 선물치곤 최상품이라 하겠다.
나를 여기에 대려다 준 ‘엄지산악회’에, 따뜻한 눈길로 보듬어 준 ‘새 이리떼’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08. 11.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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