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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내려놓는 우리명산 답사기

바람피우기 딱인 문경새재 & 조령산

바람피우기 넘 좋은 (조령산)


연노란 물감 번져가는 들판의 허수아비는 회색구름 거두고 가을햇살을 내려 쬐도 좋다고 하늘에 신호를 보내고 있는 성싶다. 미적거리던 여름이 벼이삭 속으로 숨어들어 고개 숙인 이삭은 미풍(微風)에 밀어를 속삭인다. 그 밀어를 엿들으려다 짝궁이 이어폰을 통해 불러주는 노래에 취하다보니 이화령에 도착했다. am10시 반이됐다.

갈참나무를 비롯한 무성한 활엽수들이 계절의 사이길목에서 엉거주춤 거리고 있다. 아니, 가을에 성큼 발 들여놓기가 뭣해 미동도 않고 있다. 바람도 짙은 녹음아래서 잠자고 있다. 쑥부쟁이가 해맑은 미소로 가을을 담으려는데, 당단풍과 생강나무가 냉큼 가을을 가로채고 재롱을 떨고 있다. 그 재롱에 바람이 기지개를 펴고 있다.

조령산을 오르는 완만한 경사로는 계절의 비무장지대였다. 여름도 가을도 아닌, 햇빛도 바람도 없는, 덥지도 춥지도 않는 무장해제지역 - 완충지였다.

십여 년 된 잣나무들이 스스로 친 녹색차일 아래서 열병식을 하고 있고, 난 멋쩍게 사열을 한다. 포근한 육산이 어쩌다 자갈을 모아놓으면 그 옆에선 꼬리풀이 일제히 보라색 고깔을 쓰고 있다. 한 시간여를 오르고 있는 나의 겨드랑이에선 여름이 묻어나고 이마에선 늦여름을 짜내고 있다. 손수건으로 짜디짠 여름을 닦아낸다.

9부능선에 오르자 가을이 바람에 묻혀 얼굴을 간질거린다. 상쾌하다. 신갈나무 이파리 하나가 노란가을을 안고 떨어지고 있다. 정오가 안돼 조령산정(1026m)에 올랐다.

새도 쉬어간다는 정상이라 설까, 휴식 겸 점심을 즐기는 산님이 많다. 바람도 쉬는지 숨소리도 없다. 마태오님과 나는 주저앉는 햇살, 개나리를 채근하여 신선봉을 향했다. 건너편, 푸른 숲 뒤로 은빛 얼굴을 살짝 내밀며 손짓하는 신선봉의 멋깔에 조갈증이 돋았고, 뱃속에선 아직 식탐을 구걸하지 않으며, 결정적인 것은 오늘 산행계획에 신선봉이 필수코스에서 빠짐 이였다. 우린 서둘렀다. 마태오님이 선도하고 나는 뒤에서 급경사 - 아니, 절벽에 가까운 내리막길을 더듬는다. 조심하는 만큼 스릴 만끽인데 개나리는 연신 비명이다.

조령산은 백두대간을 본격적으로 향하는 중간시발점이기에 길목이 만만치가 않음인가? 내리막의 로프는 유일한 생명 줄이라. 그 밧줄에 팽팽하게 매달린 긴장의 바람은 우리가 만들고 있음이라. 협곡 끝에 닿아 쳐다보니 내려온 길이 거의 절벽이라. 다시 오른다. 좀 오르다 옆구리를 헤집고 휘돌았다. 신선봉애서 깃대봉을 거쳐 치마바위봉을 잇는 백두대간 바위산의 위용이 설악의 공룡을 빼와 다가선다. 다시 내리막 협곡 삼거리에 닿았다. 우리가 신선봉을 찍고 회귀하여 새재골로 갈 이정표가 있는 곳이다.

신선봉까진 40분이 소요된다고 표기했다. 관목 숲을 헤친다. 바람도 햇빛도 숲 바닥에서 배회하고 있다. 바위능선이 숲을 말끔하게 쫓아내고 소나무 몇 그루를 참으로 폼 나게 키우고 있다. 천길 단애 밑에서 올라오는 바람 한줌이 그리 시원할 수가 없다. 슬램이 선물하는 긴장이 간담을 서늘케 한다. 바위능선 외줄타기를 하고나면 기기묘묘한 소나무가 반갑게 손을 마주잡아준다. 그리곤 수십 평은 될 마당바위가 비스듬히 누워 나를 아장걸음마를 시키며 반기고 있다.

모두가 시간을 정지시키느라 긴장을 잊는다. 그 환호와 쾌재란 정상에 선 자의 몫이다. 신선봉(937m)은 그 위에 길게 바위를 눕히고 있다. 예의 소나무를 동반한 채~! 우린 소나무아래서 오찬파티를 열었다. 햇살이 소나무에 앉는다. 바람도 소리 없이 내 옆에 머문다. 왼쪽으로부터 깃대봉, 마패봉, 부봉, 영봉, 주흘산, 관봉이 강강술래를 하며 백두대간을 노래한다. 과연 신선이 유유자적할 만한 곳이란 생각이 든다. 그 안에 새재골이 안온하다.

아니, 천험의 요새라. 1000m를 넘는 산령들이 영남과 기호지방을 가르고 유일 새재골로 소통을 허락했다. 오백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의 바람은 악명이 드높았다


이른바 호랑이 바람이라. 새재를 넘으려면 인근 역에서 몇 사람이 모여 무리를 지어야 넘을 수 있던 고개였다. 태종이 조령길을 처음 개척할 때까진 말이다.

문경현감이 조정에 장계(상계;上啓)를 채송한 역졸(건장한 장수를 뽑아서)을 보냈다. 조정의 비답이 올 때가됐는데도 역졸은 소식 없고, 조정에서 상계를 급송하라는 엄명이 날아왔다. 깜짝 놀란 문경현감은 사타구니가 불나게 인근 요성역으로 달려가 역졸의 행방을 탐문했던바 소식 무, 문경일대에 수색작전을 폈다. 난리법석 끝에 건진 건 역졸의 뼈다귀와 찢긴 행장조각 이였다. 현감은 그 사실을 장계에 덤터기로 얹혀 조정에 알렸다.

장계를 접한 태종은 뿔따구가 날대로 나서 당장 문경새재 호랑이를 잡아오라고 봉명사(奉命使)를 파견한다. X빠지게 달려온 봉명사가 문경새재에 도착했으나 호랑이가 “날 잡아가슈~”하고 기다리기라도 했겠는가? 그는 궁리 끝에 산신사(山神祠)에 제문을 지어 제사를 올리고 제문을 불사르곤 혜국사에서 뒹굴고 있었다. 월광이 교교한 만월의 밤, 삼경쯤 되니 느닷없이 새재골 천지가 호성(虎聲)으로 찢어지는 듯 했다. 담날 아침, 산신당 마당에 대호가 죽어있었고, 그 후론 문경새재 골엔 호랑이 씨가 말랐으며 호풍(虎風)도 잠들었단다. 봉명사는 호피를 태종께 상납했고, 호적(虎籍)을 끊은 호씨(虎氏)가문의 원수가 됨이다.

신선봉에서 조망하니 호랑이가 은거하기엔 요람이라. 더구나 가끔은 사람의 내왕[먹잇감]도 있잖은가. 허나 지금에선 우리보다도 명산(名山)들이 호랑이를 재림케 해 주십사하고 제문을 지어 산신사에 제사를 올릴 판이 됐다. 호랑이가 있어야 시도 때도 없이 떼거리로 쳐들어오는 산 꾼들의 침입을 막을 수가 있고, 산도 초목도 편안히 살아갈 수 있어서 말이다. 산은 호랑이가 그립다. 호풍이 포효하던 시절이 호시절 이였던 것이다.

신선봉에서 깃대봉을 거쳐 조령관까지의 코스는 2시간정도 더 소요되기에 시간 없어 우린 되짚어 좀 전의 삼거리에서 조곡관 쪽으로 하산키로 했다. 삼거리에서 내리막길은 가파른데다 큰 돌멩이 길이어서 신경을 날 새워야 했다. 반시간을 조신하니 이젠 골짜기 물길이 가뭄 탓에 하얀 알몸을 드러낸 돌들이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태양이 그들에게 달라붙고, 울창한 숲길에선 숨바꼭질하느라 시야를 아른거린다.


또 반시간을 그들과 벗하니 물소리가 바람을 타고 온다. 정녕 물소리란 것도 바람이 만든 거다. 바람[공기]이 물에 스며들어 흐르며 무수한 기포를 만들어 터뜨리는 소리가 물소리기에 곧 바람이라. 그 물바람 쫓아 반시간을 걷다가 일행에서 이탈하여 바람 잡으러 냇가에 가서 앉았다. 그리곤 물을 손과 얼굴에 끼얹으며 기포를 만들어 물바람소리 내기에 거들었다. 바람소리가 커지니 얼굴도 시원하다.

근데, 어디서 왔는지 다람쥐 한 쌍이 바람을 피우다 내게 들켜 숨어버린다. 바람은 도처에서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음이다. 우리토종 다람쥐와 비슷한 놈이 미국 오대호 근방 온타리오호 주변에서 살고 있단다. 그놈들은 바람도 요란하게 피워대 때론 우리의 부러움을 사기도 한다. 그놈들은 짝짓기 교미가 끝나면 수컷은 암컷의 질 입구에 분비물을 분사하여 정조막을 만든단다. 다른 수컷과 교미를 못하게끔 말이다. 그것도 미심적어 암컷꽁무니를 줄 창 따라다닌다.


사람도 십년[십자군]전쟁 때 아내에게 정조대를 채웠다는데 아마 다람쥐한테서 힌트를 얻었는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아내가 정조대를 착용하고 있담 바람은 좀 자지러지겠거니~!

다시 반시간쯤 내려오니 물바람소리가 커진다. 새재골짜기 물에 합궁한 탓이라. 세모래를 깐 영남대로(이십 리 길은 산책바람 쐬기 최적의 코스다)는 산님들보다도 산책꾼들이 더 성시다.

어떤 커플은 길가 벤치에 앉아 물바람소리에 자기네들의 밀어를 보태며 연애바람을 피우고 있다. 꼬마 둘을 데리고 산책 온 부부의 사랑바람 뒤로 십대 때도 못 벗은 남학생이 한 손엔 짝 신발을, 다른 손은 짝의 허리를 안고 얼굴까지 붙어 풋사랑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물바람이 그들, 사람들 사이를 흐른다. 늦은 오후 해님이 갓길 멋진 소나무에 앉아 우리들의 표정을 읽는다. 나도 잰 걸음으로(맨 꼴찌여서) 바람을 일으키며 뭇사람들의 표정을 도둑질 하느라 눈깔까지도 바람을 내고 있다.

참으로 바람피우기 좋은날의 좋은 장소려니. 영남대로가 성에 차질 않거든 신선봉에 커플과 같이 오르라. 자연스레 스킨십까지 즐기며 뜨거운 바람이 날거란 생각이 든다. 산을 오르며 얻게 되는 인내심과 용기, 담대한 포용심과 호연지기는 또 달리 덤으로 받는 선물이다. 무소유, 무잡념에 빠져 등산하다보면 보너스로 우아하게 가난해져 얻는 행복감을 맛볼 수도 있게 될 것이다.

문경새재 일원은 각자의 시간만큼 거기에 알맞게 바람피우기 딱인 장소가 아닐까 생각됨이다. 이건 좀 색다르긴 하지만, 왕건도 거기서 바람을 피워(사극에서) 고려를 일으켰다. 바람의 장소~! 문경새재~!

사족이지만, 태종대왕께 감사를 드리면서 바람을 피우라

바람에 취해 주차장에 도착하니 오후 네 시가 다 되간다.

맨 꼴찌여서 멋쩍었지만도-.

08. 09.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