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산 꾼의 넋 앞에 (운장산) ★


“토요일 오후에 남부지방부터 시작한 눈비는 일요일까지 내리고, 적설량은 중남부지방은 3~10미리, 강원영동지방은 20미리정도 내리겠다. 강원지방의 눈은 월요일까지 내리겠다.”

18일 밤에서 19일 아침까지 일기예보의 간추림이다.

난 그 뉴스에 아니 일요산행을 계획하고 있던 참이라, 더욱이 요새 강추위인데다 날씨가 좀 풀린 단들 높은 고도의 산에선 ‘눈비’가 ‘눈’으로만 내릴 거라는 예단으로, 마음은 고무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 속을 그들의 밀어에 귀기우려보고, 소복이 쌓인 그들을 밟는 눈의 아픔의 소리-‘뽀드득’소리에 신경을 세워보며, 어쩌다 몸을 가누지 못한 내가 의지한 나목이 귀찮다는 듯 쏟아 붓는 눈 폭탄세례를 뒤집어 쓸 때의 놀람과 몸 추스르기를

데자뷰하며 일요일 새벽을 맞았다.

운장산을 향한 하늘은 잿빛안무가 낮게 드리우고 그 틈새를 전초병이라도 된 듯 내려오는 싸락눈 한두 알씩이 어제 밤 나의 상상의 나래에 싱그러움을 안겨주고 있었다. 더구나 이제 모습 드러낸 익산.장수간의 고속도로상의 마이산 휴게소는 너무나 멋진 풍광을 선보이고 있어 얼마나 상쾌했던지-. 조망탑에서 가늠한 사위는 서쪽엔 마이산의 두 귀를 잘라다 지척에 안치했고, 북쪽엔 만덕산이 낮은 회색하늘과 등걸을 맞대곤 이어진 산릉을 굽혔다 폇다를 반복하여 노령산맥에 닿아 우리가 탐방할 운장산의

위용을 남쪽에 어슴푸레 선 보여주고 있음이 아닌가! 가히 자연이 꾸며준 휴게소의 절미(絶美)라! 그 백미를 다 눈에 담기도 전에 버스는 출발하여 우릴 피암목재 들머리에 쏟아냈다.


전령사 싸릿눈이 여태 이어지고 있음은 어제 무슨 하찮은 심사라도 있었던지 하늘은 잔뜩 찌푸리고 있음이다. 한 시간여의 산행 길 후엔 선행자들이 다져놓은 눈은 빙판이 되어 아이젠을 요구했고, 이마에 송골송골 맺는 땀을 훔칠 때는 짙어진 진눈발이 낙엽을 일깨우느라 소곤댄다. 그들의 기침소리를 들으며 서봉에 이르렀다. 곧장 20여 분을 오르면 정상(1125.9m)일진데 웬걸 길도 사라진 옆구리 산죽 밭으로 선두가 우리를 잡아끌고 있었다. 10여 분을 운장산 9부 능선 옆구리를 헤치자 탱크 같은 바위요새가 앞을 가로막는다.

바위사이를 가르고 발길을 옮기자 10여m 단애 밑에 과일접

<운장산>

시 하나가 초라하다. 헌데 그 앞에서 알만한 사람은 경건히 묵념을 올리곤 한다. 영문을 몰라 단애를 훑으니 사방 한 자쯤의 동판에 돋음새긴 글자가 파란녹이 낀체 바위에 붙박여 긴 세월만큼 아물아물하다.

꺾지 발돋움으로 목까지 빼서보고, 주위 분들께 귀동냥하니 뭉클한 감회가 솟는다.

갈뫼 산악회 이사로써 산 사랑하다 한창일 나이에 영원히 산에 귀의한 송연수님을 기리기 위하여 1992.3.31일 헌정한 푯말 이였다. 갈뫼인들의 산 사랑과 동료애를 가늠케 하고 흠모케 하는 성지였다. 그들은 매년 정월에 여기에 와서 고인의 산 사랑을 추모하고 두어 발치 비켜선 단애 밑에 넓은 상판 돌을 놓고 마련한 과다를 차려 향 피우고 시산제를 올린단다. ‘유세차---’로 시작한 회장의 고사에 이어 회원모두가 헌주하고 경건히 큰절을 올리고 있었다. 아웃사이더인 나도 그냥 지나칠 순 없어 대왕세종을 돼지머리에 안치하고 잠시 묵념을 했었다. 그들도 나처럼 금년에 안산하길 기원했으리라. 더는 그들의 엄숙한 연례행사에 참석할 수 있어 흐뭇했고, 그들의 산 사랑과 동료애를 쌓아가는 또 다른 모습에 맘 찡했다.

거기 고사장을 몇 걸음 물러서보니 그 커다란 단애바위 위에 언제 누가 쌓았는지 돌탑이 하늘에 닿았다. 그리고 단애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있어 아늑하다. 이름 하여 오송대라고 하는데 소나무는 꼭꼭 숨었다. 그들의 그런 시산제의 의식이 우의와 유대를 돈독히 하고 안산과 산 사랑의 진지성을 고양시키는 자리매김이 되어 20여년을 이어오고 있음이 대단하다.


무릇 의식은 경건한 자기다짐이고 끈끈한 공동체의 동아리 꼬기일 것이다. 그 질박한 순수성을 다짐하기 위해 고사상차림과 먹거리를 위해 세 박스를 짊어지고 두어 시간 동안 빙판산행 길을 감수하는 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소박하고 정감 물씬한 때부터 눈발은 굵고 많아져 축포 탄이라도 터트린 듯 내리기 시작하였고, 포식후의 포만감에 우린 흡족해 하였다. 연석산정을 향한 길목엔 추위에 멍들기라도 한 것일까, 산죽 이파리가 검푸름을 감추기라도 하련지 하얀 엷은 적설로 얼굴을 가리고는 줄기차게 나를 따른다. 더는 흙색 아니면 갈색의 세상에 독야청청을 하자니 좀은 부끄러워 흰눈데드마스크를 하려함인가. 두터운 흑갈색 카펫을 이룬 낙엽들이 눈물을 머금어 주황빛으로 색상을 채색시키고 있었고, 주황카펫에 발목을 묻은 나목들은 겨드랑이에만 흰 눈을 껴안고 있음은 무얼 감추려함인가?

한참 동면할 청설모 한 마리가 배가 고팠던지 산죽사이를 어슬렁거린다. 청설모 꼬리에 닿은 산죽이 놀라 으스스 떨고, 그 미동에 놀라 이파리가 얼굴가리고 있던 눈발을 소르르 떨어뜨린다. 그 쏟아지는 눈가루에 놀라 청설모가 냅다 달아나고 그 뒤를 따라 일제히 산죽이 요동을 쳐 산죽 밭은 쓰나미 현상을 이뤄 파도친다. 그래도 하늘은 여전히 심술을 거두지 않는다. 되레 잿빛 안무는 <운장산 오송대>

점령군처럼 산릉을 넘고 골짜기를 타고 나의 발치까지 밀려들고 있었다. 연석봉을 뒤로하고 연석사를 향하는 하산 길엔 진눈개비는 가랑비가 되어 쥐색 나목의 살갗에 침투해 화선지에 물감 번지듯 지도를 그리는가 하면, 그의 발목을 덮은 갈색낙엽 카펫은 이젠 온통 진주황 빛깔로 선연하게 채색하였다.

계곡 청정수가 바위틈을 뚫고 얼음을 깨고 튀어 오르다 돌멩이를 어르고 휘도느라 재잘거리는 소리를 골짜기 가득 메운다. 그 물소리에 바위에 매달린 고드름 하나가 푹석 떨어져 불귀의 여정에 오른다.

아! 어제 밤에 상상한 데자뷰가 몽상 이었다 해도 오늘도 정녕 행복한 산행 이였다.

조계산 암자에서 법정스님은 “산”을 간절히 읊는다.

-< 산은 건성으로 바라보고 있으면

산은 그저 산일뿐이다/ 그러나 마음을 활짝 열고

산을 진정으로 바라보면/ 우리 자신도 문득 산이 된다.

내가 정신없이 분주하게 살 때에는/ 저만치서 산이 나를 보고 있지만

내 마음이 그윽하고 한가할 때는/ 내가 산을 바라본다.>―

난 오늘 운장산을 얼마쯤 보았을까? 오늘 내 마음은 얼마나 그윽했을까?

08. 01. 20

Posted by peppuppy(깡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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