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낌없이 내려놓는 우리명산 답사기

새재 골의 비단 물살 (주흘산)



★ 새재 골의 비단 물살 (주흘산) ★


오늘도 하늘은 잔뜩 찌푸린 채 웅크리고 있다. 기죽은 초목들이 그의 안색을 살피느라 미동도 않고 숨죽이고 있다. 촐싹대다 밉보이기라도 하면 호우세례에 애써 키운 꽃과 이파리를 망신창이 만들기 십상인 땜이리라. 저만치 덩치 큰 산들도 바짝 엎드려 하늘금 긋기를 망설이다가 하늘척후병(구름)에 정수리를 야금야금 먹히고 있다.

그 팽팽한 긴장의 아침을 25,1,37,35,45번 고속국도를 기침 한 번도 못하고 달려 문경새재 주흘관 앞에 닿았다. 10시 반을 넘었다.

주흘, 조령산령이 가둔 하늘은 자못 안색이 밝았으나 여느 것 하나 꿈쩍도 않고 우뢰소리 만이 협곡을 진동하며 시공간의 긴장을 깨고 있었다.

새재계곡을 달리는 물은 눈 부실만큼 하얗다. 난 여태 많은 계곡물이 이토록 흰 사실을 몰랐다. 무슨 사연인지 물은 그의 속내를 깡그리 까발려 순수의 본래를 보여 주려듯 싶다.

무색의 겹겹은 흰가 보다. 그 많은 물이 뒤엉켜 사납게 뒤척이매 백색의 비단이 된다.


주흘관을 들어서니 “폭우가 예상돼 주봉 등산로를 폐쇄 한다”는 알림판이 가로막는다. 모두가 멀뚱멀뚱하기에 난 성(城) 좌측의 성황사를 기웃거렸다. 한 땐 전지전능했던 성황신도 세월 탓인지 거처마저 쇄락해졌다. 애꿎은 안내판을 배회하던 갈뫼인들이 코끼리떼 마냥 선두(어미)를 따라 사라지고 있다. 빗발에 깨끗이 목욕한 수풀이 새초로이 인사를 하는 산길을 오르는데 갓길 옆 골짜기를 달려오는 물살이 격동만큼 희다. 넓은 골짜기에 그만이 살아서 소리 지르며 정적을 몰아내고 있다.-<주흘관>-

그에 취하길 한 시간쯤, 높이20m을 넘길 검은 단애가 ㄱ자로 꺾여 가로막고, 꺾인 골로 백수(白水)를 쏟아내고 있다. 여궁폭포라! 저녁노을께 나를 거기에 끼워 순간을 멈춰 달라고 청했다. 폭포를 휘돌아 좀 오르니 혜국사다. 처다만 보고 오르는 경사로는 물기 흠씬 머금은 바위자갈이여서 여간 신경을 날 서게 한다.

접착제 신발을 신었는지 무거운 발걸음의 여인이 뒤처지다 말고 내 앞에 머뭇거린다. 표정에 심난함이 묻어있다. 참견을 했다. 산력도 6년을 넘긴 갈뫼인이란데 고지 들리지 안했다. 근래엔 산행을 뜸들인데다 간헐적으로 도지는 요통(腰痛)을 극복한답시고 억지(?)를 쓰는데 동행이 없어 더 힘 빠진단다. 요통으로 고생타 작년에 수술한 아내가 오버랩 됐다. 알량한 신사도를 꺼내 발휘키로 했다. 그녀와 선문답하며 대궐 터를 지나 주봉 턱밑에 이르렀다. 정오가 지나쳤다. 갈뫼인들이 자리를 깔고 점심을 때우고 있다. 끼어들었다. 시장기를 메우고 볼일이 있어 숲으로 숨어들어 그늘사초풀밭에 쉬를 했는데 낌새가 이상타.

관찰해보니 실낱같은 다리(20cm정도) 여덟 개가 조알정도의 몸통을 떠받들곤, 한 놈은 올라타 연애질(?)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빛없는 바위동굴에서 기생하는 거미[무식하여 검색 창에서도 못 찾았다]의 외박일까 상상을 했다.

오후1시를 한참 넘어 주흘산 주봉(1075m)에 올라섰다.

검푸른 백두대간 능선이 한껏 자세를 낮추고 있고, 하늘의 척후병이 대간 등허릴 쓰다듬으며 몰려온다. 나를 안은 그의 숨결은 습했지만 상쾌했다. 시야가 트였다. 그 순간도 잠시, 빈틈없는 하늘이 떼 몰려 와 주위 모든 걸 삼킨다. 아무것도 없다. 하늘 속에 둥실 떴다.



산님들의 환호성이 하늘 속으로 빨려든다. 옆에서 초코도(아까 그녀가 초콜릿 하나를 줬었다) 탄성을 한다. 환호를 가득 먹은 하늘이 승천한다. 기후가 선물하는 순간의 변화무쌍은 고산에서 얻기 쉽다.

한결 거뜬해진 초코 앞에서 영봉길을 선도한다. 한 시간쯤 미끄럼 길을 가니 영봉(1106m)이 마중한다. 부회장도 합세했다. 이후 셋이 줄곧 팀워크를 이뤘다. 다시 반시간을 내리막길에 조신해야했는데 ‘꽃밭 서들’이란 뜬금없는 푯말 앞에서 혀를 내차야했다.

너들바윗쪼각이 어떻게 여기에 모여들어 수목을 쫓아내고 기천 평은 족할 산비탈을 점령하여 그들만의 궁전을 만들었다. 거기에 산님들이 만들어 쌓아놓은 돌탑이 촌스럽다.

앞의 계곡엔 흰 물 비단이 끝없이 깔려있다. 물 비단이 길을 덮쳤다. 부실하게 놓인 돌멩이 징검다리를 건너뛴다. 다시 백수(白水)가 길을 먹었다. 곡예 하듯 그를 살짝 밟고 뜀박질을 한다. 흰 비단물은 길을 먹었다 토했다를 숨바꼭질 하듯 하고 있다. 그때마다 우린 비단물살에 잡히지 않으려 애간장 태우기를 열 번도 넘었다.

그래도 그게 신이 났다. 맑고 풍부한 유량의 개천의 징검다리 건너기를 언제 했었던지 기억창고에서 빼내려 해도 감감했다. 추억창고 뒤지느라 한참을 동심(童心)마실에 갔으니 어이 흐뭇치 않으랴.

새재골엔 우람한 적송들이 각선미를 뽐내느라 물들이 야단법석을 떨어도 모른 채한다. 다른 잡목들도 미인송(적송)의 격에 주눅 들고 물길의 아우성에 귀 막느라 다소곳하다.



또 한 시간이 훌렁 지났다. 조곡관이 개문하고 기다리고 있다. 당당히 들어섰다. 넓은 쉼터광장 가에 미인송을 모아 경연대회를 열고 산님들이 즐감코 있다.

시간이 빠듯하여 주흘관 쪽으로 향한다. 이 길목이 옛 새재길인데 폭 2~3m을 세모래로 잘 단장하여 ‘영남대로’라 명명했다. 옛날 영남을 오갈 때 반드시 걸어야 했던 유일길이어서인가. 십리길 양편에 조곡폭포, 교귀정, 예배굴, 판왕폭포, 용추, 조령터, 궁예가 왕건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던[사극‘왕건’에서] 굴욕의 마당바위, 왕건교 뒤의 세트장 등의 볼거리가 빼곡하다.

뿐이랴, 가보지 못한 조곡관에서 조령관까지의 십리길이 또 이럴진데, 시간을 늘릴 수만 있담 맨발로 마사지를 하며 새재를 왕복하고 싶은 충동을 삭혀야 함이 아쉽다.

여섯 시간여의 산행이 거뜬함은 후덥잖은 날씨 탓만은 아닌 수려한 계곡의 풍광이 주는 충만감일 것이다. 주흘성곽 끝의 성황사가 숲 그늘에서 졸고 있다. 주인 성황여신은 대단한 점성가였던 시절도 있었다.

조선조, 양명학자 최명길(崔鳴吉;호는 미천. 1586~1647. 영의정)이 십대 때 안동부사로 있는 외숙을 뵈러 문경새재를 넘어야 했다. 새재길을 걷는데 자색이 수려한 여인이 뒤따른다.

무섭기도 하거니와 맘에 닿아 수작을 걸었다. 여인은 “안동좌수(左首)가 성황여신의 치마를 훔쳐 자기 딸에게 줬기에 응징하러 가던 참인데 단신으론 무서워 뒤따른다.”는 거였다. 응징은 죽임을 말한다. 명길이 복수가 너무 과하다고 달랜다. 그러자 여인이 제안을 했다.

“그대는 후일 높은 벼슬을 할 분이니 훗날 오랑캐가 침탈하면 화친정책을 펴서 사직을 구하겠다고 약속을 하면 좌수딸 명을 끊지는 않겠다.”고 주문하곤 사라졌다. 이윽고 새재를 넘은 명길은 안동좌수 마을에 닿자 좌수집이 초상집이 된 것을 알았다. 좌수 집을 찾아 죽은 딸을 안치한 방에 들어가니 아까 그 여인이 딸의 목을 누르고 있는 게 아닌가.

좌수를 불러 성황당에서 훔친 치마를 빨리 불사르고, 정갈하게 음식을 차려 성황신께 기도를 올리면 딸이 회생할 수 있다고 명길이 일렀다. 좌수가 시키는 대로 하니 이윽고 딸이 살아났다. 여인은 성황신 이였고, 명길의 눈에만 보이는 거였다.

인조반정에 공을 세운 명길은 후일 정묘호란(1627년)때 친화론을 펴 화평을 도모했고, 다시 병자호란(1536년)때도 척화론을 무마하며 화청론으로 사직을 구하게 된다. 실사구시의 정책을 일관되게 주창한 그다. 그는 명(明)과도 친화정책을 펴다 청(靑)에 발각 되 인질로 끌려가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그는 나라를 위해선 봉변도, 어떤 실용정책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제 뉴스에 mbc와 갤럽이 ‘직능별 국민 신뢰도’를 조사한 바엔 신뢰도 1위엔 군인, 꼴찌엔 국회의원들이고 두 번째 꼴찌엔 중앙부처 고위직 이였다.

실용정책을 편답시고 쇠고기수입을 강행한 꼴찌2등이 국민의 건강을 위한 ‘검역주권’도 내팽개치고 골찌1등에게 “쇠고기 수입은 미국의 선물이다.”고 윽박지르는가 하면, -<꽃밭서들>-

불안한 쇠고기 수입하지 말라고 촛불 든 국민들을 향하여 “수입쇠고기 안 먹는가 보자”고 기고만장하는 골찌2등 반장을 보면서 최명길을 생각지 않을 수가 없었다.

꼴찌들이여! 최명길의 묘소를 찾아 그에게 실용정책의 진수를 배워보면 어떻겠노?

문경새재의 풍광을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내심 한켠을 짓누른 답답증이 비단물살에 씻겨 갔다.

08. 08.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