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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내려놓는 우리명산 답사기

가장 황홀했던 빛깔 (추월산)


가장 황홀했던 빛깔 (추월산)


담양호 상류를 따라오는 빨간 단풍의 향연은 우리를 기다리다 못해 검붉어 진체로 추월산 들머리까지 도열하여 있었다. 하기사 우리 네 명이 나들이함이 3년 만이니 그들의 환영퍼레이드도 이 정도는 해야 함일 것 같기도 했다.

그 빨간 휘장의 퍼레이드가 끝나자 추월산은 아름드리 적송들을 모아 녹색의 장원을 이뤄 우리들의 다소 들뜬 흥분을 진정시키려함 이였던가 보다. 울창한 소나무들이 하늘을 가리다 곧장 낙엽수들에게 자리를 내주어 다시 현란한 단풍의 전당에 우릴 안내하고 있었다.

서어나무, 굴참나무 같은 활엽수들이 그들의 옷들을 벗어 날리며 비좁은 협곡을 벗어나려 하늘로만 키운 키를 키재기 하느라 침묵하고 있었다. 키재기하는 그들 사이를 햇빛은 실비처럼 흩뿌려져 벌거벗은 몸에 엉키곤 하였다.

보리암을 오르는 길목은 만만치가 않았다. 속세에 닳고 달은 우리네들이 보살 동네를 탐방 한다는 게 결코 떡 한입 먹기처럼 쉬워서야 안 되겠기에 오르막길은 급경사를 이루었나보다.

허나 형형색색의 단풍으로 계곡을 수놓고 어쩌다 쉼터바위에 엉덩이를 걸치면 담양호을 낀 추월이의 치마폭은 한 폭의 기막힌 산수화로 다가와 이마에 송송 맺는 땀방울이 결코 힘들게 생각되진 않음이라.


그러나, 그러나 복병은 의외의 곳에 있었다. 일행 중 L이 영 죽을쌍이라. 3년 전, 우리가 내장산을 더듬을 땐 L은 뒤처짐 없던 반 산꾼(?)이였던지라 아침엔 D를 걱정했었는데 D는 되려 선도하고 있으니 필시 L은 그동안 산님과는 이별했던 결과이리라. 관심 없던 사람이 갑자기 치근덕거리면 반길 자가 누가 있겠는가? 산이라고 예왼 없으리라. 그간 산에 인사 한번 않고 갑자기 찾아온 L을 반기기만 할 추월인 아닌 것 같았다.

암튼 불쌍한(?) 그를 눈 안에 집어넣고 쉬엄쉬엄 오르다보니 제법 큼직한 바위동굴이 앞을 가로막는다. 깊지는 않고 어딘가 인공적인 흔적이 역역하였고 천정은 연기에 그을려있어 동학군이 관군에 쫒기다 최후의 일전을 펼치기 전 은신처로 사용했을 아지트였던가 싶었다.

다시 울퉁불퉁한 바위틈새의 오름길 - 인적에 짓이겨진 돌맹이와 찢겨진 낙엽이 발밑에서 신음한다. 한 시간여를 오르니 보리암에 닿았다.

천길 단애바위들이 요새처럼 둘러친 절벽에 용케도 널따란 터가 있고 거기에 아담한 암자 서너 체가 비경을 거느리고 앉았다. 전면에 암청색담양호가 추월산자락을 감싸 돌고 있어 흡사 호수수반위에 추월산이 수석처럼 자리함이 선경이라.

보조선사가 나무로 만든 매[木鷹]3마리를 날려 보냈는데 한 마리가 여기에 내려앉아 암자를 짓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을법한 명당이었다. 보리암의 석간수로 해갈하고 그 해갈료로 D는 지전 한 장을 불전에 시주한다. P의 사주란다. 그 말 듣고 보니 P의 생각이 깊고 갸륵하다. 보리암을 뒤로하고 정상을 향하려는데 사리비도 아닌 왠 비석 하나가 우릴 붙잡는다.

임란시 의병장 김덕령의 아내가 이곳에서 순절하였기로 세운 추모비였다.

우린 다시 정상을 향하였고 짠한 L을 앞세우거니 뒤세우거니 하며 30여 분을 더듬다 정상에 이르렀다. 마당바위에 쌓인 낙엽위에 신문지를 깔고 오찬장을 마련한다. 농익어가는 추심이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담양호는 엷은 안무를 띄워 홍엽만산을 감싼체 좀체 자리를 거둘 줄을 모르고 있었다. 아니 김덕령 아내의 한 서린 입김을 거둘 순 없어 바람한점도 미동 않고, 햇살도 만추 것 같잖게 따사롭다.

우린 제2의 하산길을 택하여 급경사 내리막을 조심하는데 갑자기 편편한 산책로로 이어진다. 보아하니 왼편은 수천 길 수직 단애가 병풍처럼 둘러서 파란하늘을 갈라놓고, 오른쪽은 “가장 황홀한 빛깔로 물이 드는 날”을 연출하고 있는 추월산이 발아래 깔려 있잖은가!

도종환은 어쩜 언젠가 여기서 오늘 같은 날 시상이 문득 솟구침을 읊었는지 모른다.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는 물이 드는 날.> -단풍드는 날-

나무의 전부였던 것, 그러나 버리기로 한 그것들을 우리는 보고, 느끼고, 밟으며 나무의 슬픈 희열을 체감하며 하산길을 최촉했었다.

이 가을에 진정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지도 못한 체 어리벙벙하게 - 닭대가리처럼 금방 모든 걸 잊어버리고 나들목 평상에 앉아 탁주 한 사발씩을 들이켰다.

P와 L과 D와 넷이서, 3년 전 한두 번 그랬던 것처럼, 이제사라도 다시 ‘쑥대밭’을 만들지 말자고 한다. ‘숙대박’이 ‘쑥대밭’이 된 것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 이였다.

황홀한 빛깔속의 황홀한 나들이였다.

07. 11.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