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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어쩌자는 건가? 소복의 태백산

어쩌자는 건가? 소복의 태백산


태백의 겨울은 산님들의 축제장인가?

재작년 이맘때도 무슨 엑서더스인가하고 놀랬었는데 오늘도 천제단을 오르는 산로는 빙판이 무색케 산님들로 빼곡하다. 아이젠 없인 엄두도 못 낼 산길을 죽기 살기로 오르는 까닭은 뭘까? 사길령에서 삼나무의 영접을 받은 내가 한 시간 남짓 인파에 파묻혀 줄서다보니 태백중턱에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유일사쪽에서 오른 산님들과 서로의 몸 섞느라 몸싸움(?)이 가관이라.

요즘 살기가 팍팍타는 소릴 자주 접하지만 태백산만큼은 살판 난 세상임엔 웬 일일까!

그렇다. 살만하니까 이 추운 겨울에 더 짜릿한 혹한의 맛을 보자고 몇 백리길 달려와 모인 게 아닌가 말이다. 무모(?)하다 싶은 산님들 등살에 정작 태백은 몸살 날 지경이다.

페이스마스크에 후드로 머릴 감싸고 스팻치와 아이젠으로 발까지 무장한 산님들은 사람이라기 보단 외계인 같았다. 그 정체 수상쩍은 떼거리에 놀란 태백하늘은 우중충하다. 구름도 기겁했던지 정처 없이 달아난다. 나무들도 앙상하다. 바람마저 신음하며 칼날을 세우고 달려든다. 싸라기눈은 중무장한 내 얼굴 틈새를 파고들어 살갗을 소름 돋게 한다.

허나 태백의 나목과 주목들은 의연하며 당당하고 엄숙하다. 아니 신령스럽기까지 하다.

영장(靈長)이라는 우리네가 그네들 품안으로 숨어 쉼터를 애걸하고 있다. 장군봉 턱밑의 주목들은 초연하다. 그 장엄한 신비감이 산님들의 맘을, 혼을 붙들어 놓고 있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산다는 주목이 소복으로 단장을 하고 하얀산 태백의 흰 거목으로 거듭나니 산님들이 아니올 수 없겠다.

모든 걸 내려놓고 겨울엔 순백으로 서는 일생을 영겁 하는 아름다운 삶은 생의 극치미 이리라.

우리도 무거운 욕망 잠시 동안이라도 내려놓을 수 있을까. 그럼 그 순간만큼은 평안할 테다. 그래서 산님들은 겨울태백을 사랑하는 걸까. 그들은 침묵의 금언으로 늠름히 살다 아름답게 죽어 소멸하는 생의 한 복판에 우릴 초대하여 삶의 지혜를 선물하려 하는지도 모른다.

장군봉에 오르니 오후 1시가 됐다.

어제 박종권 논설위원이 <분수대>에 쓴 “카데바(cadaver)”얘기가 떠오른다.

해부실습용의 시신(屍身)을 카데바라 한단다. 카데바의 연원은 오싹하다. 18~9세기 영국의 에든버러의대병원은 1구당 7파운드의 값으로 시신을 구매했고, 시신을 구해 돈벌이에 나선 윌리엄·버그는 끝내 연쇄살인범으로 둔갑해 한 해 16명을 살해하다 잡혀 교수형에 처해 카데바로 넘겨졌다. 그가 살해한 시신 중에 카데바란 여자가 있었는데 어느 의학도가 그 여잘 인지하게 돼 해부실습용 시신을 카데바로 부르게 됐다는 게다.

몇 년 전 난 네셔널지오그래픽이 방영한 미국 테네시의대 녹스빌에 있는 2에이커에 달하는 “시체농장(body farm)"을 시청하고 감명 받아 나도 W의대에 시신기증서약(08.06.18)을 했었다. 카데바를 자청한 것이다. 시체농장엔 한 해 300여 시신이 기증되고 항상 20여 시신이 각양의 조건에서 학습실습용으로 쓰이는데 기증자 대게가 저명인사들 이였다.

그런 카데바는 의학·인류학·법의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여 오늘날 우리가 질병과 흉악범으로부터 이만큼이나마 안도할 수 있게 함이다.

카데바는 우리가 사후 주검을 어떻게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지를, 아름다운 주검으로 승화할 수 있는지를 명증한다. 년 전 김수환 추기경님도 시신일부를 카데바화 한 게 아닌가.

카데바는 죽어 다시 태어나는 셈이다. 죽어 천년을 살며 아름다움을 뽐내는 주목보다 더 아름다운 주검일 수 있는 게 카데바가 아닐까 생각하는 거다.

태백주목은 그 카데바를 말하고 있었다. 산님들이 주목의 시목(屍木)의 아름다움을 보며 카데바를 생각해 봤음 싶었다. 우리나란 카데바가 턱없이 부족하단다.

허준이 동의보감에 신형장부도(身形臟腑圖)를 그릴 수 있었던 것도 스승 유의태가 기꺼이 제자 허준의 카데바가 되길 자청했던 땜 이였다.

천제단은 인산인해였다. 1시 반 망경사를 향한다. 재작년 산행 때(책 <남김없이 내려놓는 우리명산 답사기>에 태백산행기 수록) 부쇠·문수봉을 오르느라 시간 없어 아쉬워했던 코스를 오늘 답사키로 함이다.

내리막 하산 길은 가파른데다 빙판이어서 신경 날 서게 하나 어쩜 인파 탓에 넘어지기도 어렵겠다 싶어 아수라장 속에 위안을 했었다.

10여 분을 미끄러지니 탄허스님이 친필 했다는 조선국태백산단종대왕지비(朝鮮國太白山端宗大王之碑)를 목도한다. 숙부한테 왕위를 뺏기고 쫓겨난 어린 단종은 영월 청령포(淸怜浦)에 유리안치 되다 결국 사사 당한다. 단종의 고혼(孤魂)은 태백산을 배회하다 1955년에야 망경사 박묵암스님에 의해 비각이 세워지고 제(祭;음9/3)를 올리게 됨이다. 건너 망경사는 수많은 산님들이 모쪼록 안식처를 만났다는 듯 오찬장을 만들고 있었다.

자장율사는 평생을 문수보살을 그리며 살았다. 어느 해 문수보살이 태백산에 오신다는 소식을 접하고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는데 웬 거지가 삼태기에 강아지 한 마리를 넣어 짊어지고 나타나자 쫓아버렸었다(거기가 문수봉이다).

그 거지가 문수보살임을 아차 했던 게다. 대성통곡을 하며 기다렸지만 끝내 뵙지를 못하고 노년을 인근 함백산 정암사에 침거하고 있었는데, 문수보살 석상이 태백산에 나타났다는 전갈을 받고 달려와 석상을 모실 절을 세우니 만경사다.

신라 진덕여왕 때(652년)의 일이라. 망경사 앞의 하늘아래 첫 샘(용정)에서 목을 축이니 속이 텅 비는 것 같았다.

명당 중에 명당이니 오늘같이 추운 날 망경사는 산님들의 안식처가 아니 될 수가 없음이다.

반재를 경유해 당골광장까지의 하산길은 줄곧 빙판경사라 비닐포대 미끄럼타기 좋은 장소라 소문났지만 빼곡 찬 산님들로 언감생심 - 비닐포대 들고 마냥 엿보기만 하던 어느 중년의 모습이 무애(無涯)한 스님 같아 보였다. 나도 저렇게 순진해 봤으면 좋겠는데-.

당골광장엔 태백의 눈꽃축제가 성시라. 우리에게도 이런 눈을 태마로 한 축제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해야 하나 하는 아쉬움은 눈을 소재로 만든 조형물들이 넘 빈약하다는 거였다. 기왕 축제를 벌일 바엔 태백답게 할 순 없을까 하고 생각해 봤다.

그래도 그 놈들에 한 참을 빠져들다 보니 4시를 넘기고 있었다.

흰 카펫을 깐 태백에 소복차림의 주목의 신령이 산님들을 부르고 눈 축제까지 벌려 이글루에서 동심을 맛보게 하니 산님이 아니라도 성시를 이룰 수밖에 없겠다.

2010. 01.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