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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빨치산루트 - 오지의 백두대간 (대덕산)

 빨치산루트 - 오지의 백두대간 (대덕산) 


30번 지방도로에 들어선 버스는 10시쯤 김천시 대덕면 덕산리 골짜기에 멈춰섰다.

눈 덮인 밭고랑 논두렁을 가로질러 개천을 넘뛰고 언덕을 기어오르니 거대한 적송 한 그루가 영접을 하고 있어 기분 달뜨게 한다. 허나 적송은 마중 나온 게 아니라 무언의 경고였던가 싶었다.

산 입로(入路)는 어디쯤에서 마주칠까? 먼저 삼도봉엘 오르기 위해 등산로를 찾는데 눈 쌓인 산자락은 인적이 없어 산 능선을 향해 길을 내야했다.

산은 급하게 치켜 올랐고 쌓인 눈은 물기 잔뜩 머금고 아이젠에 달라붙어 미끄러지기 일쑤여서 유격훈련도 이만저만이라.

두터운 솜이불을 발목에 깔고 서 있는 깨 벗은 나목들은 빼곡하게 앞을 가로막고 이따금 때까치가 고요를 깨트리는 산은 긴장의 땀을 쏟게 한다.

한 시간의 사투 속에 능선에 이른다.

삼도봉을 눈앞에 심고 바람막이 눈두덩을 찾아 점심자릴 폈다.

하늘은 여느 봄날처럼 푸르고 햇볕은 눈발에 쏟아져 은빛알갱이는 뿌옇게 산화 돼 아지랑이처럼 먼 산록을 휘감고 있다.

지쳤다. 참으로 팍팍한 산행이라.

오직 위안은 홀랑 옷 벗은 나무들의 파아란 하늘을 향한 수만 가지의 춤사위였다. 정대구님의 시 한 소절이 생각났다.

-전략

설한풍에도 빳빳하게 서 있는

겨울나무를 보아라.

일체의 장식을 떨구어 버리고

가슴팍을 가는 칼질소리

선명하게 드러내 놓고

버티어 버티어서는 골격

겨울나무의 진실을 보아라.

절제를 보아라. 후략-

‘겨울나무’의 의연함에서 남성상을 엿본 시인의 시심이 아니더라도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묵묵히 서 있는 나목들을 대하면 그들의 섬뜩한 기개와 죽은 듯 침묵하는 무언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설한풍 칼바람에 가슴팍 도려내며 한 해를 담금질 하여 나이테에 새기는 인고의 생에 절로 고개 숙여진다.

그들의 치열한 삶은 한시도 멈춘 적이 없다. 내일이면 아니, 며칠 후면 겨드랑이를 찢어 연두색 눈을 뜰게 분명하다.

오후 1시를 넘겨 삼도봉(1249m)에 올랐다. 전북,경남·북의 꼭짓점인가! 이 능선, 백두대간 타고 좀 북상하면 또 하나의 삼도봉(경북, 충남·북)에 이은 민주지산, 내 서 있는 아래론 지리산 삼도봉이 자리한다.

동남쪽엔 가야산자락이 안무 속에 아른거리고 서쪽엔 덕유산 슬럼프가 세 개의 빙하가 돼 능선 속으로 흐르고 있다.


대덕산을 향해 가파른 눈길을 내려오는데 비닐포대 생각이 간절하다.

산님들이 없으니 루지경주 하듯 총알처럼 미끄러져도 인명사고(본인 빼고는)는 나지 않겠다.

그 비료포대 없어도 45도 급경사길 500여m을 순식간에 주파했다.

눈두덩 길에선 날뛰는 커플도 있는 모양이다. 여차하면 삼천포로 빠지기 일쑤였던 익산·나비아타 커플은 나한테 면박 당하기도 했었는데, 빙판 내리막길에서 내 앞에 촐랑대고 있다.

아까 올라올 땐 나비아타 앞에서 신사도를 발휘하던 익산이 무슨 생각에선지 저만치에서 혼자 휑하니 달아나고 있기에 난 입술이 간질거렸다.



"나비아타님, 결혼 전 연애할 땐 익산님이 애걸복걸 잘도 해줬지요?”

나의 뚱딴지같은 질문에 멈칫하던 나비아탄 감 잡은 듯 서슴없이 “그럼요,” 라고 답했다.

나는 익산님을 ‘못 돼 먹었다’고 농 삼아 이죽거리려 하는데 뒤따르던 유쾌님이 기회란 듯 내 뱉았다.

“남잔 자기 것이 되기 전에 잘 하고, 여잔 자기 것이 돼야 잘 한다.”고-


정설이라. 남자의 능구렁이 밉쌀은 내 것에의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관심에서 때론 일탈하고픈 게 아닐까? 나도 집사람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적이 어디 한 두 번이던가?

때론 무관심이 아니라 관심 밖에서 어정거리고 있는 것이다. 유쾌님의 끼어들기에 팍팍한 눈길은 매끄러웠다.

다시 대덕산이 우뚝 앞을 가로막고, 왼편협곡엔 하얀 시루떡 한 겹씩을 산자락에 계단삼아 얹혀놓아 볼거리를 만들었다.

저기, 무주 무풍면 깊은 골은 전쟁, 기근, 역병이란 삼재(三災)를 피할 수 있어 조선중엽의 풍수지리학자 남사고(南師古)가 산수십승보길지지(山水十勝保吉之地)라 지목했단다.

변변한 논 떼기 한 마지기 마련키 어려운 이 오지가 십승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살기가 팍팍한 곳임을 역설함이겠다.

이 오지에 정착민이 적으니 전쟁도 전염병도 생길 리 없을 테고 초근목피로 입가심은 할 수 있어 요즘으로 치면 웰빙타운인 셈이다.

사방이 천m가 넘는 산으로 호위된 백두대간인 대덕산이 앙팡지게 가파른 밋밋한 육산이라 6.25전란 땐 빨치산의 편안한(?) 루트이기 안성맞춤 이였을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됨이다.

1;30분, 대덕산 정상(1291m)에 섰다.

산님은 가뭄에 콩 나 듯도 아니다. 황량한 정상에서 안무에 가린 첩첩 산릉만 눈에 담다 문득 빨치산대장 이현상을 떠올림은 웬 연골꼬?

그는 저만치의 민주지산에서 지리멸렬한 빨치산을 재정비하여 사령관이 돼 지리산을 향하면서 필시 이곳 대덕산을 밟았을 테다.


백두대간의 오지인 여기를 그가 모를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우리가 아는 ‘빨치산대장’인 그는 결코 골수빨갱이가 아닌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감옥에 드날기를 수차례, 십여 년을 철창에 갇혔다가 풀려나 지리산에서 동지들을 모아 게릴라전을 도모하다 해방을 맞았었다.

미군정은 젊은 혁명가인 그를 미워했고, 그는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다가 결국엔 쫓겨 월북한다.

그러나 곧 월남하여 자주독립의 꿈을 키웠고 6.25가 발발하자 빨치산에 가담한다. 공산군이 폐퇴하여 골수들은 다 월북하지만 그는 남아 지리산에 은거하다 빗점골에서 49세로 불꽃같은 혁명의 신념을 접어야 했다.

그가 월남하지 않았거나 6.25때 월북하여 공산이데올르기에 전념했다면 정녕 북한에서 고위직에 올랐을 테다.

더구나 그가 빨치산게릴라전이 승산이 없을 것임을 알고도 월북하지 않고 지리산을 향한 점은 결코 골수빨갱이가 아니었음을 일깨우게 한다.

그의 공산이데올르기는 민족독립이란 방편에 불과했음일까? 하 수상한 시절은, 외세에 짓밟히는 약소극의 젊은 선구자들은 본의 아니게 시대의 비극이란 멍에를 쓰기 다반사였다.

그가 여기서 지리산을 향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를, 그의 사상을 잘 모르면서도 그에게 연민의 정을 품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떨떠름하여 대덕산을 뒤로한다.

“바람 세찬 지리산에 서니 앞은 일망무제한데

칼을 잡고 남쪽천리를 달렸구나

내 한시인들 조국을 잊은 적 있었던가

가슴엔 필승의 지략 심장엔 끓는 피 있다”

끓는 피 멈춘 그의 싸늘한 가슴팍 호주머니에 남긴 시 한 편이 생각났다.

시린 눈두덩을 딛고 파란 하늘에 쭉쭉 활개를 편 겨울나무는 일체의 장식 대신 투명한 수정덩이를 안고 있었다.

눈꽃도, 상고대도 아닌 저 맑은 수정덩인 여기를 지나며 깊은 숨 내쉬웠을 이상현의 허허한 꿈의 알갱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가파른 내리막길, 수 없이 반복되는 Z자 길의 눈두덩에 미끄러지며 덕산재에 닿았다.

오후4시가 돼가고 있었다.

아~! 그런데, 그 질리도록, 장딴지 허벅지가 얼얼팍팍토록 눈길을 지탱해 준 나의 아이젠은 열두 개의 이빨 중 네 개의 이빨을 백두대간에 때어놓고 왔었다.

빨치산이 더듬었을 오지 백두대간에 내 아끼는 아이젠 이빨 네 개를 선물했으니 그 또한 추억이 되어 겨울을 장식하겠거니!

10. 02.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