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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화이트`라군>으로의 초대장 (덕유산)

<화이트·라군>으로의 초대장 (덕유산)

 

인년(寅年) 정월(寅月) 초사흘의 햇빛은 눈부셨습니다.

모처럼 영상(零上)을 찾은 날씨는, 산소통[배낭]을 짊어지고 물안경[선글라스]에 오리발[아이젠과 스패츠]을 착용하고 물갈퀴[두터운 장갑]에 랜턴[스틱]까지 들고 중무장한 나의 심해탐사를 초장부터 땀에 홍건이 젖게 했지요.

세 시간 남짓 헤엄쳐 천미(1000m)쯤 깊이의 횡경재를 파고들었을까요?

 

 

신비의 세계가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흰색 - 무채색의 신비가 이처럼 경이하다는, 흰 것은 그저 힐뿐인 무형의 단순함일 거라는 고정관념은 여지없이 부서지는 겁니다.

사실 나는 눈부신 태양 땜에 무채색의 신비를 접할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접었었기에 오늘의 심해탐사가 다소 맥 풀리기도 했습죠. 근데, 경인년(庚寅年) - 백호년(白虎年) 이어서였을까요. 백색의 무궁무진한 조화는 저의 넋을 빼앗아가고 있었지요.

 

횡경재분지는 안개꽃으로 촘촘히 수놓은 백화의 세계를 열고 푹신한 순백의 카펫을 깔고서 나를 환영하는 거였어요. 그 안개꽃의 정원은 이제 시작일 뿐 이였답니다.

깊이 헤엄쳐 파고드는 만큼 수면은 옥색에서 코발트색으로 짙어지고 있었고, 산호초는 언어도단의 형형만상을 이룹니다. 산호초가, 순백의 석순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요?

이토록 신비롭고 장엄한 산호초가 거대한 화이트·라군(white-lagoon)을 일구고 있다는 소식을 난 여태 금시초문 이였습니다.

 

흰 산호초 숲 사이로 언뜻언뜻 비춰 보이는 코발트수면은 눈이 시리도록 환장하게 하고 경탄을 쏟아내게 합디다.

발걸음을 옮기고 싶질 안했어요. 바둑판만한 바위가 하얀 산호방석이 되어 산호림(珊瑚林) 바닥에 있기에 궁둥이를 걸쳤지요. “이게 바로 천국이다”라고 소리 지르면서 말이죠.

이때 옆 산호초 숲에서 기갈을 해소하던 다른 탐사팀의 눈빛이 나를 향하고 있음에 움칠하기도 했었지요.

어쨌거나 배낭을 내려놓고 코발트수면을 무작위로 빠개놓은 산호가지 사이로 천국의 경외를 실컷 퍼먹는 겁니다.

우리들은 너무 아름답고 멋진 풍광에 접하게 되면 ‘천국 - 천상의 세계’라고 막힌 말문을 핑계대지요. 상상의 미계(美界)를 그리 얼버무리는 게지요.

 

 

뜨뜻한 찰밥과 뜨거운 녹차를 한사코 목구멍에 집어넣어도 심해(深海)의 오한은 떨칠 수가 없더군요. 오후1시가 다돼 갑니다. 더 깊숙이 헤엄칩니다. 목화꽃이 한 송이 두 송이씩 피다가 목화꽃밭이 됩니다. 목화꽃은 터져 솜털은 흘러내리다 솜털집하장을 이뤘습니다.

문득 초등학교시절의 다래생각이 납니다. 목화꽃 터뜨리기 전의 다래를 따서 껍질을 벗기고 말랑말랑한 속살을 씹으면 입안 가득히 고이는 달짝지근한 당즙의 맛이야말로 최고의 천연과일(?) 이였지요. 그때 이후로 사라졌던가 싶은 목화꽃을 덕유평전은 한 라군으로 만들어 놨네요. 순백의 목화꽃이 푸르스름한 빛깔이 돋는 건 푸른 수면 탓일까요?

 

 

목화밭에 취해 들어선 발걸음은 산호초에 걸려 넘어질 뻔하다 가까스로 목화나무를 잡고 곧추서다보니 놀란 목화가 일제히 부서지며 가루로 쏟아져 내 목덜미를 탑니다. 등골이 오싹했지요. 정신을 추슬러야지요. 허나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목화 아닌 수많은 이름모를 꽃들이 지천입니다.

뿐이 아닙니다. 천년 묵은 거북이가 해마(海馬)무리와 같이 유영을 하며, 토낀가 싶으면 고라니가 나서고 곰인가 했더니 하마가 다가옵니다. 무채색의 조화(造化)는 대자연만이 해낼 수 있다는 섭리 앞에 나의, 인간의 미력함을 깨닫게 합니다.

 

 

덕유평전은 수많은 테마별 라군을 만들어 놨습니다. 그 라군 사이를 헤엄치는 인간의 띠는 검은 실선으로 그 왜소함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대자연 앞에 저절로 경건해지지 않을 수가 없는 순백의 세계지요. 그런 나[自我]를 되찾아보기 위해서도 화이트·라군을 방문해 보는 게 어떨까요?

향적봉이란 가장 깊은 곳을 향하는 계단의 목주(木主)와 밧줄엔 산호초가 무수한 칼이 되어 햇빛에 영롱한 무지갯빛까지 발산하고 있습니다. 그 칼 하나를 때어 가슴에 담습니다. 사인검(四寅劒)을 말입니다.

사악한 잡귀(雜鬼)의 범접을 막아준다 해서 왕실에서나 간직했던 희귀의 보검(寶劍)을 아시지요? 그 사인검은 범띠인 금년(寅年) 정월(寅月) 첫 인일(寅日) 첫 인시(寅時)에 만들어지기에 참으로 희귀한 칼인 게지요. 그 사인검이 향적봉 계단에 있습니다.

 

 

늦기 전에 화이트·라군을 유영하여 그 칼 한 자루씩을 챙겨 오시지요. 액운을 막아줄 겁니다.

덕유·라군이 경인년 인시를 기념하여 만들어 탐방객들에게 선물하고 있었습니다.

향적봉에 섭니다. 화이트·라군을 경계라도 지으려는지 하얀 능선은 겹겹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해일은 그 능선에서 산호가루를 날라 와 뿌려댑니다. 심해의 유속(流速)은 세차게 빠르고 차가워 마냥 머물러 있다간 그대로 산호초가 될 것 같습디다. 몸이 더 굳어지기 전에 떠나야 했습니다.

 

 

오후 2시 반이 지나쳤습니다. 라군의 능선을 탑니다. 밧줄에 엉켜 붙은 해파리도 백색산호초입니다. 그 산호초가 코발트 수면을 투침(投浸)한 햇살 탓인지, 세찬 해일바람 땜인지 부스러져 떨어져나가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사인검도 곧 사라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모두 다 한 자루씩 가져야 할 텐데 걱정이 지핍니다.

다시 산호초 숲 사이를 유영합니다. 화이트·라군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초대장 없이 라군을 방문한 저는 행운아입니다.

여러분! 아직 오시지 않은 분께 화이트·라군의 초대장을 하나씩 선물합니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10. 01.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