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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상고대에 미친 어리버리 뜰띠리들의 만행漫行 (백운산)

상고대숲 속에서의 만행(漫行) [백운산]


오전11시 백운사 입구 계곡의 물소리는 봄의 정령들의 속삭임 같았다. 아까 멀찌감치 잠시 선 뵀던 하얀 설산-백운산정의 해빙물방울이 계곡바위 사이를 헤집으며 개구리에게 경칩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수선떨고 있다.

허나 동면을 깨친 놈은 개구리가 아니라 생강나문가? 노오란 꽃술 입을 방끗했다.

샘나는지, 물오리나무가 겨드랑이 살갗을 찢고 연푸른 입술을 삐죽 드밀고 있다.

정녕 남녘의 봄은 산골짜기에서 발원하는가! 반시간을 오르니 백운사가 울타리를 걷어치우고 맞는다.

덩그런 바위위에 날렵하게 앉은 산영각(山靈閣)이 넘 단아하다. 여기서부턴 갈지자 임도는 바위너덜 골짜기에 길을 넘겨준다.

고로쇠, 당단풍, 골·굴참나무, 서어, 노린재, 때죽 물푸레나무 등의 관엽식물이 빼곡하다. 하기야 950여 종이 넘는 식물의 보고가 백운산이란다.

근데 아파하는 놈이 수 없이 많다. 수액을 빼겠다고 드릴로 고로쇠나무의 밑동에 구멍을 뚫어 호스를 꽂아 거미줄처럼 연결했고, 그 살벌한 작업을 인부 두서너 명이 하느라 산골짜기의 정적을 깨고 있다.

속살 깊숙이 파고든 호스에 피를 빼앗기는 고로쇠, 당단풍나무 등은 얼마나 통증이 심할까?

우리네의 이기심과 잔인성이 섬뜩했다. 그런 나무들의 피를 채취하여 팔아먹겠다고 광양 고로쇠물협횐가는 엉뚱하게 도선국사까지 들먹거린다.

도선국사가 백운사에서 선(禪)에 들었다 일어서는데 다리가 후들거려 넘어지면서 나무를 붙잡았는데 그 부러진 나무에서 수액이 떨어지는지라, 그걸로 갈증을 푸니 다리까지 나았다 해서 뼈에 좋은 물-골리수(骨利樹)라 했고, 그게 변음 하여 고로쇠가 됐다고 떠벌린다.

어쨌든고로쇠물 먹고 건강해지면 고로쇠나무처럼 이웃에게 헌혈할 건지?

산님들! 우리 고로쇠물 안 먹기 운동을 하면 어떨까요?

건강한 데 나무피 뽑아 먹을필욘 없겠지요.

다시 반시간 남짓 급경사 길을 오르느라 숨이 차다. 제법 오붓한 평지에서 많은 산님들이 점심을 즐기는데 난 곧장 오르기로 했다.

식사하고 급경사진 정상을 오를 엄두가 안 났었다. 다시 반시간쯤 오르니 여태완 딴판의 세상이 펼쳐진다. 산죽이 설죽(雪竹)이 됐고, 나목들도 몸뚱이 절반은 소복을 했다.

생각지도 않은 기기묘묘한 흑백(黑白)의 콘트라스가 빚은 난장판에 들어서자 헐떡거리던 숨도 싹 가셨다.

디카에 담느라 지랄을 떠는데 오를수록 눈꽃은 만화방창이라.

따뜻한 3월에 남녘 끝 백운산에서 설국에 들어서는 감회란 그저 환장할 지경 이였다고 해야 옳다.

얼마나 해찰을 했던지 백운산정상(1217.6m)에 서니 오후2시라. 아까까지의 흑과 백이 이루었던 콘트라스는 이젠 온통 순백의 설국이라.

여기 눈은 그냥 눈이 아닌 칠흑의 밤과 찬바람이 잉태시킨 상고대였다.

나무는 상고대로 변했고, 마른 풀도 설초(雪草)로 둔갑하여 신비한 설화를 만들었다.

상고대는 칼날이 무디어져 순록의 여린 새 뿔인 양 솜털이 무성타. 흰 솜털 뿔의 어지러운 난무는 회색하늘에 그대로 박혀 터널 숲을 이뤘다.

여린 솜털 뿔을 만지면 부서질 것 같아 혀끝을 대보니 무미, 무취, 무색의 차가움만이 혀 신경을 타고 전신에 전율한다.

빨아도 제법 단단하다.

이렇게 황홀한 상고대 숲에 언제 다시 들어설 수 있을까?

길섶 여린 상고대풀잎에 누가 성큼 발을 드밀 텐가?

문득 서산대사의 선시(禪詩) 한 구절이 생각났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踏雪野中去)

발걸음 하나도 어지러이 마라(不須胡亂行)

오늘 내가 걸어가는 발자취는(今日我行跡)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遂作後人程)”


늦은 점심을 때우곤 억불봉쪽을 향해 오붓한 설화 속에 취한다.

상고대 터널 속의 길은 단정하다. 모두가 서산대사의 선시를 읊고 있는 성싶었다.

길 가장자리의 발끝에 닿는 죽은 풀 한 줄기, 부러진 나뭇가지도 그대로 눈꽃이 돼 있어 짓밟히면 망가지기에 허투로 디딜 수 없는 눈꽃길이다.

그 상고대 터널에 간혹 언뜻언뜻 선뵈는 억불봉의 흰자태가 K2산정마냥 신비롭다.

1110봉, 995봉, 962봉을 밟고 923봉에 이르는 한 시간 반여의 행복한 상고대숲길은 몽환 속의 유영 같았다.

억불봉 턱밑에서 시간이 빠듯해 노랭이봉쪽으로 하산에 들었다.

약속시간인 4;30분에 대기위해선 서둘러야 했고, 최단거리인 광양제철수련원방향으로 지름길을 택했다.

이미 설국은 사라졌고 급경사인 돌너덜길은 칠떡거리기까지 하여 난코스였다.

시간 없어 눈길 줄 수도 없이 내달았던 수련원 경내도 요람 이였다.

경내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청정해 질 것 같았다.

허나 아까 억불봉 턱밑에서야 내가 온 산행길이 잘 못 든, 애초의 예정된코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얼마나 황당했던지?

하여 더욱 초조할 수밖에 없는 산행마무리시간이 돼 버렸다.

그런 시름도 순간 이였지만 말이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설국에서의 상고대 숲의 황홀했던 백운산에서의 달콤함은 오래도록 곱씹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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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산행기의 재목인 <어리버리 띨띠리>의 얘기를 해야겠다.

오늘의 산행은 산동교에서 백운산정에 올라 좌측으로 빠져 신선대를 밟고 진돌로 하산하는 코스였다.

내가 백운산정에 올라 설국에 취해 있을 때(점심 먹는 시간까지) 일행들이(어리버리 띨띠리들) 좌측이 아닌 우측 억불봉을 향해 사라지고 있었다.

나도 억불봉 턱밑에서야 엉뚱한 코스로 든 사실을 인지했지만 앞장선 띨띠리들이 요소마다 방향지시표를 놔두었고, 이미 늦어어찌할 여지가 없었다.

선두를 따라잡을 수가 없단 생각에 수련원쪽으로 지름길을 택하여 하산하다가 집행부에 전화를 연결하여 산행코스가 변경된 게 아니라는 걸 알기 전까진 말이다.

산도를 펼쳐보니 애초의 산행날머리와 지금 내가 하산한 날머리 약수제단이 (앞서간 띨띠리들이 하산할 날머리도) 상당히 먼 거리라는 점이였다.

버스가 와 줘야할 거리였다. 더구나 앞에 간 띨띠리들의 그림자도 안보였다.

알았다고 기다려보라는 회장의 통화음에 운명을 걸 수밖에-.

채 10분도 안 돼 나타난 버스에 오른 난 버스좌석이 너무 빈 걸 보고 의아해 해야 했다.

버스가 움직이고, 잠시 후 앞선 띨띠리들이(5명) 나타나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U턴하여 애초의 산행날머리로 다시 향하였고, 거기서 간단한 식사를 했지만 썰렁하긴 마찬가지였다.

다섯 분이 백운산 넘어 매봉쪽으로 하산하여 하동으로 향했다는 거였다.

그들은 어리버리 뜰뜰이들이였다. 그들 뜰뜰이들이 어찌어찌해서 구례읍에와서 기다린다고 하여 버스는 예정에 없던 구례를 향하여 땅거미 속을 달려야 했다.

6시가 넘어서 구례관광단지주차장에서 뜰뜰이들을 조우한다.

아뿔사! 뜰뜰이들은 뱃장 좋게도 국수파티에 흠뻑 빠져 우릴 한참을 기다리게 한 후에야 개선장군처럼 버스에 올랐다.

어리버리 띨띠리란 이름도 그들 뜰뜰이 중 우두머리(?)가 쏟아낸 별명이라.

하여 외람되게도 매봉쪽 산 너머로 뜬 구름처럼 자적한 그들을 뜰뜰이로, 애초의 정 코스를 밟은 일행들을 똘똘타하여 어리버리 똘똘이라고 난 우수개소리로 떠벌려 보는 게다.

나도 띨띠리군에 속했으니 어리버리 띨띠리가 분명하오나 그리 불러준들 싫지가 않음은 띨띠리가 됐기에 상고대 숲길에 시간 반 동안 더 취할 수 있었던 쾌재 탓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띨띠리와 뜰뜰이들은 오늘의 잘못된 산행에 대해서, 설화에 얼마나 만취했던지 기고만장하여 노심초사했을 똘똘이를 비롯한 누구에게도 미안타는 사과말씀 한마디 하는 걸 듣지를 못했다.

참으로 대단한 어리버리들 이였다.


어느 산악팀이 정상에서 사분오열하며, 띨띠리 선두는 엉뚱한 길에 방향표시를 야물게(?) 남기고, 다른 뜰뜰이는 방향표식도 없는 길로 죽치고 달리며, 똘똘이는 어떤 먹을것이 있기에앞 뒤 훑지도 않고 지들만 도망쳤을까?

어리버리들만이 해 낼 수 있는, 그들이 아니곤 상상을 절하는 아찔한 제 멋대로의 산행 - 허나 모두 환장하게 좋은 상고대 숲에 미친 땜 이였다고 핑게를 대고 있었다.

그 일탈이 상고대 숲에 더 오랫동안 머물게 했으니 다행이라면 행운이라.

가상할 현상은 똘똘이, 띨띠리, 뜰뜰이 누구도 누굴 탓하기보단 서로를 감싸고 허허 웃는 여유롬 이였다.

기똥찰 어리버리들이라!

**고로쇠물은 해발 800m 이상의 고산지대에 서식하는 수령 30~40년 생의 나무가 밤낮의 온도차가섭씨15도 이상일 때 수피의 팽창차가 커져 수간압에 의해 분출되며, 섭씨18~20도일 때 당과 마그네슘, 나트륨, 칼슘, 철분 등의 무기성분이 다량 생성된다.

2010. 03. 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