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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환상의 다도해&짝사랑 (거제`망산)

환상의 다도해에서 생뚱맞은 짝사랑 (거제·망산)



다소 지루하다고 느낄 때 35번고속도 통영IC를 빠져나오면 코발트빛바다는 거제 섬과 숨바꼭질을 하며 코앞까지 파고든다.

섬 골을 깊이 판 바다는 피오르드를 만들어 수백 수천의 백조 떼들의 서식처가 돼 있는 장관에 화들짝 놀라게 되는데, 백조 떼[양식장 스티롤폼]는 재작년 소매물도를 찾을 때보다 훨씬 더 많아졌다.

저구 명사포구에서 망산행을 시작할 땐 정오가 다 됐었다.

후박나무군락이 이룬 녹음 속인데도 가파른 산길은 돌계단으로 이어져 반 시간동안을 헐떡거리게 한다.

상록 숲길을 20분쯤 오르면 소사나무가 떼거지로 몰려와 난장을 펼치는데 그들의 어지러운 군무는 그칠 줄을 모른다.

그들의 울부짖는 듯한 군무사이로 얼핏얼핏 얼굴 내미는 바다는 푸른 무대장치에 불과하다.

40분쯤 오르니 망산정상(375m)이 발밑에 깔린다.

서쪽엔 한산섬이 푸른 바다에 학익진을 쳐 통영을 감쌌다. 가왕도 너머로 대·소매물도 끝의 뾰쪽이 솟은 세 개의 바위석순도 보인다.

어제 오늘의 나들이를 심난하게 했던 황사도, 아까까지 심술을 부리던 바람도 잎샘한기까지 안고 자지러든 모양이다.

저 아래 창해(蒼海)엔 통통선 한 척이 심통이 났던지 푸른 얼굴에 하얀 낙서를 해대지만 바다는 이내 치유한다.

세상의 모든 추잡들을 다 안았던지 충일(充溢)하고 조용한 바다는 잔주름살 하나도 안 보인다.

흰 꼬리를 빼는 통통배만 아님 다도해는 거대한 스냅사진이다.

그 멋진 사진을 자꾸 어지럽게 가리며 나의 시선을 뺏는 소사나무의 춤들! 그들 춤은 볼수록 맛깔이 난다.

1시를 훨씬 넘겨 전망바위 아래서 점심자릴 폈다.

쿨바이러스를 빼곤 모두 초면인 예닐곱 분과의 점심은 누군가 마련한 과일과 뜨거운 커피까지 곁들어 포식했다.

난 다시 소사나무 춤과 다도해에 빠져 홀로산행을 즐긴다.

근데 아까 여(女)산님이 점심자릴 털며 일어서다 발견한 바람꽃 한 송이의 쓸쓸함이 내봉산 우듬지엔 네댓 송이가 앙증맞은 미소로 답하고 있다.



이파리도 없이 실핏줄 모가지를 세워 낙엽위에 있는 둥 없는 둥 핀 바람꽃은 봄기운을 명징함이다. 바위등걸에 서자 소나무 침엽 사이로소·대병도가 또렷이 얼굴 내밀고 인사를 해온다.

안부를 지나 가라산을 향하자 섬은 우측에 팔 하나를 쭉 내뻗어 창해를 막아서니 성난 바다가 가만있을 리 만무다.

파도에 얼마나 할퀴였나 희멀건 바위벼랑이 된 그 곳을 이름 하여 ‘바람의 언덕’이란다.

미쳤다고 팔 뻗어 상처투성일 만들었나? 울창한 소나무 숲을 헤쳐 내려오니 다대재라.

3시10분을 넘겼다. 산도(山圖)를 보니 갈 길이 두어 시간은 빡빡할 것 같다.

가라산을 오른다. 소사나무가 군무를 치고 어떤 놈은 옹두라지덩치를 키워 바디·쇼를 하려든다.

소사는 분재의 왕이다. 잘 돋는 잔가지와 작은 이파리는 사계를 완상케 하고 생명력도 강해 분재쟁이에겐 욕심내는 수종이다.

나도 전엔 분재한답시고 몇 그루 간직했는데 젤 못난 놈 두 그루만 살아남아있다. 게으름에 더해 식물에 대한 애정이 달리 생각 돼 분재목 수집을 안 한지 오래다.

문득 난초화분 내 놓고 외출했다가 시들해진 걸 안달했다던 법정스님 모습이 떠올랐다.

집착의 괴로움 말이다.

스님은 그때부터 한 가기씩 버리는 방하착(放下着))의 행복-무소유의 즐거움을 즐겼다고 책 <무소유>에 쓰셨다.

불타(佛陀)를 짝사랑해 불문에 드셨던 스님은 무소유의 삶에서 부처를 닮아갔고 끝내는 가사 한 벌만 걸친 채 다비(茶毘)에 드신 부처님이 됐다.

생전에 우리들께 주셨던 주옥같은 금언도 말빚[공해]이 된다싶어 (책)절판을 유언하셨던 스님의 삶에 경외심이 솟는다.

짝사랑의 진정성을 생각다보니 이곳 통영에 인연 맺은 청마와 백석이 생각나고, 시인백석의 짝사랑은 스님과도 연이 닿았음을 어쩌랴.

청마(유치환 1908~1967)는 짝사랑했던 이영도에게 5천통의 연서를 띄우고도 이루지 못해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 같이 까닭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고 읊었다.

백석(1912~1995)은 함흥고보 선생 때 친구 허준이 친구인 신현중의 누이동생과의 결혼피로연에서 마주친 이화여고보생 이였던 박경련을 만나 한 눈에 뿅 가서 통영까지 세 차례나 찾아왔지만 허사, 이듬해엔 가까스로 청혼을 하지만 보기 낯 뜨겁게 딱지를 맞았다.

근데, 넉 달 후 친구 신현중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미처 속 타들어간다. 그리도 짝사랑하던 박경련이 신부였던 것이다.

“---- 나는 하이얀 자리 위에서 마른 팔뚝의 샛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던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 살뜰했던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고 독백했다.

그 후 백석은 요정에서 18세의 김영한이란 기생을 만나 한 눈에 반한다.

‘김자야’란 이름까지 지어주며 빠져들지만 집안의 반대로 딴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되고, 기혼자인 그는 도망 나와 자야의 가슴팍을 파고든다. 하다못해 자야는 백석을 위해 함흥에서 서울로 이사를 왔으나 백석은 선생질까지 팽개치고 자야를 찾아온다.

백석은 조선일보에 취직을 하며 자야와 열정을 불사르지만 결혼할 수 없다는 사실에 만주로 유랑을 떠났다.

해방이 되고 6.25가 발발하여 북에 눌러앉게 된 백석은 두 번이나 결혼을 했으나 1995년 이승을 등졌다.

오매불망 백석을 그리던 자야는 대원각을 운영하며 부처를 짝사랑하다

백석이 죽은 이듬해 대원각을 법정스님께 시주하는(대원각은 스님에 의해 길상사로 거듭 태어난다)보살의 삶에 들었다 1999년에 영면하니, 짝사랑에 얽힌 인연들은 우리에게 오롯한 사랑의 진정성을 일깨우고 떠남이 아닐까? 하고 외람 된 생각을 해 본다.

스님도 불문에 드셔 첫 행자생활을 시작한 곳이 통영미래사였다.

다대산성을 오르다 왼쪽다리가 삐끗하여 잠시 짝사랑을 생각해 봤다.

4시가 다 됐다.

누구하나 오는 이 없어 걱정이 지피자 가라산을 포기하고 샛길로 빠지기로 했다.

곧장 내려가면 다포몽돌해변에 반시간이면 족히 닿을 것 같아서다.

날머린 인접이다.

나무숲길을 걷는데 조계산 불일암을 오르시던 숲길 속의 스님 뒷모습이 오버랩 돼 왔다.

다포 몽돌해변의 벤치에서 다시 스님을 생각했다. 아니 무소유를 생각했다.

다리가 더 이상 심술부리지 않음만으로도 행운아라.

즐거운 망산행 이였다.

#. 삼국유사에 경흥우성(憬興遇聖)이란 말이 있는데, 신라 때 경흥국사는 입궐할 때 호사스런 가사를 입고 화려하게 치장한 말을 타고 행차하는지라 모든 사람들이 알아보고 길을 비켰다.

어느 날 입궐하는 국사 앞에 초라한 승려가 광주리에 마른 생선을 놓고 앉아있어 국사의 눈에 거슬렸던지 “부정한 물건을 치우라‘고 호통을 쳤다.

승려가 대답했다. “살아있는 고기(馬)를 두 다리에 끼고 있는 것보다는 죽은 고기를 메고 있는 게 더 싫습니까?”라고.

화들짝 놀란 경흥국사는 이후 다시는 말을 타지 안했고, 그 초라한 승려는 문수보살화신 이였다.

어쩌다 승용차를 이용한 법정스님도 그걸 여간 부담스러워 했다.


#. (자칭)익산 멋쟁이 혜민당님을 지켜보는 시간도 즐검 이였다. 두루뭉술 통통한 님은 친절과 포용과 바지런함에 유머까지 꽉 찬 성싶다. 두어 번 뵙긴 했으나 얘기 한 토막 나눈 적 없는 님이 어젠 내게 전화선에 풀어놓은 살가움을 쉬이 잊을 수 없다.

나의낙서장 <아낌없이 내려놓는 우리명산 답사기>를 읽어서가 아니라 친절이 몸에 밴 땜 이였음을 오늘 인지했다.

그가 있기에 ‘고도’는 성황인 것 같았다면 좀 어폐가 있는가? 오늘 발길 텄으니 ‘고도’들락거리는 건 어렴이 없겠다.

회장께서 쏜 활어회 맛도 기막히게 좋았다.

고도 화이팅! 10. 03.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