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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봉황이 만든악어아가리 이빨 속에서 (주작산)


봉황이 만든 악어아가리 이빨 속에서 (주작산)

강진에서 18번 국도를 10여분 달리다 완도방면 19번 지방도로에 들어서면 우측에 화강암바위 군들이 뾰쪽뾰쪽한 톱니로 하늘을 쪼아 먹다보니 파란하늘은 갈기갈기 뜯긴 채 수 십리를 달리고 있는 장관에 압도당한다.

북일면 신월리에서 827번 도로로 우회전하여 두륜산공원지역에 들면 흐드러진 벚꽃이 하얗게 자리를 깔아놓은 오소재에 닿는다.

산행은 거기서부터 가파르게 헉헉대야 되는데 진달래가 옹기종기 군락을 이뤄 선혈을 토하고 있고, 60도 산허리는 나로 하여금 가쁜 숨을 토해내게 한다.

잠시 숨 돌리려 발길 멈추고 뒤돌아볼라치면 흰 바위 숲에 경탄하게 된다.


화강암바위석순들이 모여 동산을 일구고 그 쭈뼛쭈뼛 솟은 바위산은 겹겹 하여 두륜산으로 빨려들고 있다.

반시간쯤 오르면 362고지에 이르는데 조망되는 경관은 흐린 날씨에도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바다는 속절없이 물러터진 강진땅을 깊숙이 파고들어 안개를 뒤집어쒸운 채 에워싼 들판에 연초록 물감을 흩뿌려났다. 뒤쪽엔 두륜산 바위 숲이 금강산처럼 장엄하고 가야할 서북쪽엔 바위능선이 힐끔힐끔 연봉을 솟구쳐 하늘가로 고개를 드밀고 있다.

봉황이 활짝 날개를 펴고 날아갈 듯한 형상이라서 주작산이라 했다는 이 화강암 바위산을 걷는 나는 아가리 쩍 벌린 악어 같단 생각을 해보았다.

악어의 등지느러미를 걸으며 좌우로 불규칙하게 솟은 바위들과 갑자기 함몰한 절벽을 기어오르내리다보면 악어 아가리속의 성근 이빨사이를 헤집는 - 거기에 핀 빨간 진달래는 악어의 붉은 속살이라 생각됨이라.

일테면 주작산은 악어아가리 수십 개가 연이어잇는 악어아가리 산이라고 말이다.

404고지까지 악어이빨을 더듬으며 빨간 속살을 밟는 한 시간여의 산행의 맛은 신선하기까지 한데, 바로 아래의 장수저수지의 코발트수면이 산허리를 휘돌고 그 저수지를 에두르는 꼬부랑길은 나의 상상의 나래에 날개를 달아줬다.

흰 이빨 사이사이에 흥건한 진달래의 선혈웅덩이들, 진달래에 자리물림하고 있는 생강나무의 시든 노란꽃술, 생명의 발아(發芽)에 온 신경을 곧추선 노린재·물푸레·서어·신갈·화살나무들의 새싹은 잔인한 4월을 노래함이려니!

4월의 잔인한 신비경 밑에서 앙증 떨며 웃고 있는 노랑바람꽃과 제비꽃의 유혹, 햇살 거둬들였는데도 수줍어 고개 숙인 산자고와 은초롱은 칼바위 된비알 틈새에서 늠름하다.

동봉, 서봉을 잇는 된비알 악어입속은 밧줄과 스텐하켄에 의지해 클레이머들의 스릴을 잠시 맛보는 코스가 연이어지는데도 산님들은 마냥 쾌재를 연발하며 즐긴다.

두어 시간이 그렇게 훌쩍 넘겨 정오가 지났다.

절벽을 오르내리는 슬림구간이 몇 군데고, 칼바위 된비알에 올라서서 되돌아보면 흰 이빨들이 빨간 진달래 위로 솟아난 비경에 취하다보니 시장기도 잊는다.

날씨가 흐려서 망정이지, 해풍이 미풍으로 낯 간지럼 태워 망정이지, 짙지 않은 안무가 시계를 몽유도 속에 갇혀주기 망정이지, 땡볕이 아님 소나기라도 뿌려댄담 헉헉대며 쏟을 땀을, 미끄러운 바위 길을 어찌 감당이나 할 텐가!

봉황이 날개 젖어 비상 못함이야 어찌 할 순 없다 해도 내 몸 흠씬 젖고 아이젠 없는 신발은 미끄럼 타야할 테니 상상만으로도 아찔하다.

370고지를 오르는 산님들이 이빨 새에 박혀 있다. 거기서 점심을 할 작정이다.

황갈색낙엽 더미위에 한 무리 보라색꽃이 심지엔 흰문양을 두르고 흑점을 네댓 개 찍어 바르곤 꽃잎을 쫙 벌리며 고혹스런 미소를 보내고 있는데 붓꽃처럼 생겼다.

봄은 그 각시붓꽃처럼 아름다운가! 이곳출신인 서정시인 영랑(김윤식;1903~1950)이 여기의 봄도 훔쳤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가치

풀아래 우슴짓는 샘물가치

내마음 고요히 고흔봄 길우에

오날하로 하날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볼에 떠오는 붓그럼가치

시의가슴을 살프시 젓는 물결가치

보드레한 에메랄드 얕게흐르는

실비단하날을 바라보고 싶다“<내마음 고요히 고흔봄 길우에>

<모란이 피기까지>로 넘 친근한 영랑은 학교 다닐 때와 6.25전란으로 미처 서울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을 때를 빼곤 줄곧 이곳 강진에서 40여년을 살았다.

여기서 멀잖은 곳에 여기 출신 다산선생의 초당이 있고, 윤 고산선생도 강진 태생이며 초의선사도 두륜산에 머물렀다. 빼어난 산수가 선생들의 고고의 터울일 터니 그 영혼의 맑음도 자연일 테다.

옛날 풍수쟁이가 여기를 가리켜 8개의 대혈이 흐르는 8명당이 있다고 했단다.

계두혈(鷄頭血), 정금형(井金血), 월매등(月埋燈), 장군대좌(將軍大座), 운중복원(雲中覆月), 노서히전(老鼠下田), 옥녀단금(玉女貚琴), 옥등괘벽(玉燈掛壁)이란 명당이 있는 곳이라지만, ‘풍수지리’의 ‘풍’자도 모르는 내가 알리 만무하나 유려한 산세와 깊숙이 파고든 바다까지 포개졌으니 그럴만하다 싶었다.


밧줄에 끙끙대며 370고지 바위 마루금에 앉아 늦은 점심을 든다(오후2시).

저 아래 구릉이 작천소령, 그 뒤로 주작산, 너머로 덕룡산릉이 예의 흰 암릉으로 이어졌다.

안무를 토하며 파고든 바다는 강진만을 만들고 주위엔 넓은 벌을 이뤄 연초록 파스텔톤 물감을 짓이겨놓았나 하면, 해무에 싸여 졸고 있는 섬들이 아련히 하품을 하고 있다.


참으로 멋진 산수비경이라!

인근의 두륜산도, 덕룡산도, 달마산의 암릉도 주작산의 아기자기한 악어이빨에 낀 빨간 진달래 속살의 비경은 흉내 낼 수가 없겠다싶다.

작천소령에 다달 무렵 느닷없이 “아이스케키요”하는 비명(?)이 들렸다.

깊은 산 속에서 이 무슨 해괴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가?

허나 그는 귀신이 아닌 박스 두서너 개 쌓아놓은 아이스케키 장사였다.

젊은 그는 장난이 아니란 듯 “아이스케키는 공짭니다.”라고 너스레를 떠는 게 아닌가!

“예~?” 멍청한 나의 대꾸에

“운반비만 받지요. 한 개에 천 원씩-.”하고 나를 빤히 살피는 거다.

하나 안 살 수가 없잖은가?

그놈을 빨면 갈증이 더 솟을 거란 생각을 하면서도 두 개를 적선 한냥 베푼(?)다. 맛 좋다.

어릴적 노스탤지어까지 꺼내 쭉쭉 빠니까 시원 달콤함이 전신을 훑는다.


그것도 잠시, 아직 갈 길이 먼데 물통 바닥도 훑게끔 갈증이 목덜미를 타고 오른다.

어쨌거나 그 아이스케키는 내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테다.

주작산을 밟으려면 들머리에 4시 반은 넘겨야 도착 될 성싶다.

4시까지의 약속이 갱킨다.

해찰을 안 해야지.

10. 04.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