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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영국군 묘역에서 천안함 비극이---? (거문도`백도 기행)

영국군 묘역에서 천암함의 비극이~? (거문도·백도 기행)


녹동항발 pm2;30분 쾌속여객선에 승선하기까지 한 시간여를 외나로도 우주센터 과학관에 전시되고 있는 ‘봄의 야생화’와 ‘이윤숙의 야생화그림 전’을 관람할 수 있었음은 생각지도 못한 행운 이였다.

남녘 고흥산하에 자생하는 야생화를 한 자리에서 완상할 수 있다는 쏠쏠함과 함께 야생화가 모정 이윤숙님의 손끝에서 전혀 다른 아름다운 이미지네이션을 뿜어내는 그림으로 태어남에 경탄 하였다.

화선지에 충분한 여백을 살리며 파스텔톤의 채색은 꽃이 추상적인 그림으로 아름답게 거듭남에 미술에 문외한인 내게도 감흥을 일으키는 거였다. 사실 난 이윤숙님도, 야생화가가 있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알았다.

덤으로 맛본 실내에서의 야생화의 맛·향에 흠뻑 취하고 쾌속선에 승선하면서 6/9일엔 나로호 발사가 성공하여 우울한 우리네의 가슴을 환하게, 미래에 대한 밝은 꿈을 갖도록 해주길 기원했다.

창해(滄海)를 가르기 한 시간 반쯤 거문도에 발을 들여놓았다.

뭍에서 한참 떨어진 섬이란-비린내 물씬한 빈한한 어촌일 거란 고정관념이 갖는 통념을 거문도는 허용치 않고 있었다.

촘촘히 들어선 건물들, 활기찬 인파의 요동, 깔끔한 중심가는 청정바다와 함께 의표를 찌르는 거였다.

허나 달뜬 감정은 골목을 헤집고 언덕배기에 들어선 낡은 여관에 들어서 예약된 방에 들어서며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3층의 방은 넓어 12명이 하룻밤 묶기엔 충분할 것 같았으나 수도꼭지 하나와 거기에 빌붙은 문짝 없는 좌식변기는 난감하여 말문을 닫게 했다.

지금의 화장실이란 단어조차 몰랐던 내 중학시절의 수학여행 때의 여관이 수십 년의 세월도 잊은 채 거문도에서 용케도 살아남아 있는 기적(?)에 그저 놀랄 뿐 이였다.

배낭을 놔두고 영국군묘소를 찾아 나섰다.


시가지를 더듬고 언덕배기고샅을 한참 거닐다보니 선도(西島)를 잇는 삼호교가 폼을 잡고선 여기가 섬인지 뭍인지 분간키 어렵게 하고 있었다.

쪽빛 바다를 조망하며 다랭이밭을 따라 20여분 걸었을까 세월의 더께를 쓴 비석이 안내판을 앞세우고 초지에서 동쪽 수평선을 향하고 있는 거였다.

사고로 죽은 3명의 영국군묘소다.

19세기 말, 세계를 호시탐탐 침략했던 그들은 1885.4.23일 무단으로 이 섬을 점령하여 1887.2.27일 철수하였는데, 이유는 그들의 앙숙인 러시아가 조선조정과 손잡고 남하하려는 데 있었다.

친일파의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조정은 종주권을 행사하던 청(靑)나라와 일본의 세를 견제할 목적으로 러시아를 불러들여 손을 잡았었고, 배알이 꼬인 영국이 청과의 묵약으로 거문도를 점령했던바 이를 ‘거문도 사건’이라 칭한다.

조정에선 그런 사실조차도 몰랐고, 영국은 청을 거간으로 내세워 러시아가 향후 10년간 조선에 발을 딛지 않기로 약조를 받아내자 철수했던 거였다.

그 등살에 청(이홍장)의 콧대만 높여준 꼴이 됐고 종낸 일제의 수탈에 운명을 맡김 아니었던가.

아무것도 모른 조정은, 안단들 힘없는 약소국인 조선은 열강의 틈새에서 숨죽이며 어둡고 암울해했을 시절생각이 오늘 천안함 비극의 주인공들 장례식과 오버랩 되는 방정맞은 망상은 뭣 땜일까?

전함 수척이 해상훈련 하던 중 쥐도 새도 모르게 침범한 적의 공격에 천안함이 침몰하고 46명의 젊은 영혼을 수장시키고도 우왕좌왕, 한 시간 후에야 합참의장과 국방장관에 보고하는, 종잡을 수 없는 군 수뇌부의 브리핑에 답답타 못해 속 터지다 오늘 영결식을 함에 125년 전의 울분이 생각 키는 거였다.

한달이 지나도록 적의 실체도 모르기에 자위권발동도 물 건넜고, 후에 유엔에 문제재기를 한들 (안보리상임이사국)중국과 러시아가 거문도사건 때처럼 꿍꿍이셈 안한다는 보장도 없다면, 또 국제사법제판소에 제소한들 적(피고)이 순순히 응할지도 의문이니 속 터지고 병든 건 우리 아닌가? 하는 기우(?)에 한숨을 짓지 않을 수가 없다.

음흉한 중국은 부존자원이 3조5천억 달러나 돼는 북한을 속국으로 만들어 또 다른 동북공정을 시도하면(중국은 풍부한 아프리카 자원이 탐나 진즉부터 아프리카외교에 발벗고 나섰다)우리네의 비원인 통일은 어찌 될까? 죽 써서 남 좋은 일 하는 격이다.

원대하고 치밀한 로드맵이 아쉬운 작금이다.

열 명의 친구보다 한 사람의 적을 만들지 않는 삶이 현명한 인생임을 되새김질 해본다.

쓸데없는 생각 그만하자. 저 아래 안·밖노루섬이 멋들어진 폼으로 나를 유혹하고 있는 거다.

나는 벼랑길을 내려와 바닷가에 이르렀다. 영겁의 세월을 사나운 파도에 부대낀 바위들은 몽돌이 돼 대머리처럼 반들거렸다.

오늘의 파도는 잔잔히 밀려와 몽돌들을 달래고 있다.

그 속삭이는 듯한 파도소리와 윤기 흐르는 몽돌들이 마수처럼 나를 잡아끈다.

거기엔 ‘산을 벗삼아’님이 선도를 하고 있는 거였다. 그를 따라 미투와 난 모험길에 나섰다.



셋이 몽돌해안을 얼마나 기고 더듬으며 뛰었는데 뭍으로 오르는 길이 나타나질 않는다. 걱정이 지는 석양의 노을만큼 짙어진다.

삼호교 쪽으로 나아가면 언젠간 길이 나올 테니 밀물만 밀려들지 않음 되는 거라고 맘을 추슬였다.

20여분 후 벼랑을 오르는 희미한 숲길이 나타나자 우린 쾌재를 부르며 그 조마조마했던 불안감이 새삼 즐거움으로 희열돼 감을 느끼는 거였다.

영국군묘소 답사 한 시간은 신나는 반전에 반전의 기분전환 이였다.

6시 반, 저녁식사 후 미투와 난 야시(夜市)를 걸으며 산책길에 나섰다가 부둣가 포장마차로 기어들었다.

활어회 맛을 보기 위해서였는데 순간 곰장어를 보고 장어구이 생각이 도져 장어 한 사라를 주문했다.

구이보단 살짝 삶은 게 더 맛있다는 복어(처럼 통통했다)아주머니의 말에 말문을 닫았던 우린 얼마나 후회했던지?

토막 친 장어는 껍질이 흐물흐물 벗겨진 채 아무런 양념도 없이 희멀거니 사라에 얹혀 나왔다.

종지속의 기름소금이 양념의 전부여서 우선 입맛부터 싹 거둬가는 거였다. 난 두어 점 기름소금에 찍어 입속에 처넣었고 미투는 한 입으로 그만였다.

그는 다시 해삼 한 접시를 주문했다.

솔직히 고백컨대 나는 돈이 무진 아까워 좀이나마 본전을 건질 셈으로 두어 점을 더 입안에 쑤셔 넣었다.

보기 뭣 했던지 복어아줌마가 고추장양념에 볶아 주겠단다.

양파를 곁들어 빨간 고추장에 대쳐 나온 장어는 보기에도, 맛도 아까의 장어보단 나았다.

억지로 소주 두어 잔을 목구멍에 쏟아 부으며 돈이 아까워 장어토막은 죄다 건져 먹었다.

횟맛 보러갔다 시궁창에 빠졌다 나온 기분마냥 입맛조진 채 여관방에 들었다.

술주정에 코고는 사람들의 훼방(?)으로 뜬눈으로 지샌 밤을 6시에 일어나 고양이 세수를 하고 식당에 들어섰다.

부실한 찬에 젓갈 갈 곳이 마땅찮아 멀건 미역국에 밥 서너 숟갈 휘저어 후르르 마시곤 골목을 빠져 나왔다.

중학교때 수학여행도 이쯤 이였을 테다.

다만 지금은 풍요한 음식에 길들여져 웬만해선 눈과 혀를 즐겁게 해주질 못한 탓이라.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어느 CF의 유머가 ‘여행의 본질’이랄 수 있고, 그 ‘개고생’탓에 자기를되돌아보게 되는, 삶의 여정에 깊숙이 각인되는 추억이 아니겠는가!

7시에 출항한 유람선은 한 시간 남짓 창해를 미끄러지다 상백도 앞에서 속력을 줄인다.

왕관바위가 거만을 피우고 나룻섬과 등대섬이 마중을 나와 서 있으며 형제바위를 앞세운 삼선암, 병풍바위, 노적섬 등이 부동자세로 사열을 받고 있다.

유람선은 S자 선형을 그으며 하백도를 열병하는데 서방·촛대·원숭이·성모마리아상·거북·각시바위 등등이 열병식에 참여하여 갖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열이던 열병이던 간에 나는 그들과 눈인사는커녕 누구하나 기억할 짬도 못 가진 채 지나쳐버려 주마간산이란 말을 오늘 실감한 편이였다.

99개의 섬(36개의 무인도와 63개의 바다 속 섬)이라 일백‘百’자에서 한‘一’자를 뺀 흰‘白’의 백도(白島)라 했다던가.

그 백도의 아름다운 절경은 언어도단이겠으나 유란선으로 휘 돌아본 나로썬 사진이나 CD를 구입해 보는 게 낫지 않겠나 싶어졌다.


섬 꼭지에 등대가 있고 오르는 길목이 있어 섬에 발 딛게 하면 어떨까 하는 안타까움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백도 유람을 끝낸 우린 10시부터 거문도산행에 들었다.

삼호교를 건너 덕촌마을 고샅에서 초등학교를 곁눈질하고 다랭이 밭고랑을 밟으면 초록잡초가 무성한 묘지가 다닥다닥 붙어있는데 (황주사는 길 잘못 들었을 때 장모님 묘소를 휘돌아보고 온다고 했다) 장모님 묘소에서 U턴하여 불탄봉에 올랐다.

고도(古島)와 동도(東島)가 푸른바다를 껴안고 선착장을, 등대 방파제를 뻗쳐 한 폭의 풍경화를 만들었다.

억새군락지를 스치고 무슨 용도인지도 모른 기와집몰랑을 훑는다.

고사목들은 초록담쟁이 옷을 입고 죽어서도 봄을 만끽하고 있는데 여간 멋있는 게 아니다.

동백·조록·생달나무 등의 사철나무 터널 숲을 통과하길 몇 번인가?

길섶에서 커다란 진초록이파리를 우산처럼 펼치고 보라색꽃잎을 오무려 꽃대를 뽑는 천남성은 거문도가 텃밭인양 지천이다.

가없는 쪽빛바다엔 유람선이 하얗게 낙서를 갈기며 달아나도 바다는 금세 치유한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창해에 4월의 따스한 태양이 내려앉자 간지러운 수면은 은빛너울 춤추고 있다.

소슬한 미풍이 은빛너울을 싣고 와 해안 절벽의 낙시광들 사타구니를 기옷거린다.

아~! 이렇게 시원하고 풍요로운 전망을 만끽하며 산행에 빠질 수 있는 곳이 어디에 또 있을까?

커다란 바위 하나가 서도(西島)에서 떨어져나가 승천하려다 붙들린 신선바위가 압권이다.

미투와 난 그 수직의 신선바위를 보듬고 기며 올랐다.

제법 널따란 정상엔 마침 산님이 한 분도 없어 천국에 들었나 싶게 달뜨게 했다.

큰‘大’자로 누워 파란 하늘을 끌어안다 일어서선 천길 아래를 지나는 유람선을 향해 팔을 흔들어댔다.

열락(悅樂)은 뭔가를 꾸준히 찾는 자에게 성취라는 단어로 다가온다.

신선대를 내려와 다시 거문등걸을 오르는 경사로는 어찌 그리 빡셌던지!

11시 반이 돼가고 있었기에 허기증이 몰고 온 맥 빠짐 이였다.

아침6시경에 부실한 식사를 한 후로 여태 물 한 모금씩 추겼으니 허기증이 엄습해 오는 거였다.

하여 배낭을 놓고 왔음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산행 목적지인 거문도등대는 아련하다.

어찌하여 동행이 된 이곳 초등학교교감선생님이 선도를 하며 거문도의 장점과 산행 중의 비경 포인트를 알려준다.

여수가 본가인 선생은 이곳의 공기가 여수보단 더 신선하단다.

바다를 낀 여수항의 공기도 여느 도시의 그것보다 상쾌할 텐데 말이다.

거문도 예찬에 내가 더 오래 계실 거냐? 고 묻자 그는 있고 싶어도 1년 이상 더 머물 수가 없단다.

교장승진을 하기 위해 교감은 낙도에서 1년 이상 근무해야하는 땜에 대기자가 많다는 거였다.

아치바위를 조망하며 보로봉울 거쳐 수월산에 이르는 상록밀림 숲길은 어떻게 헤집고 들어온 햇살 몇 가닥이 아니면 암흑터널이 될 것 같았다.

그 숲을 빠져나오니 뾰쪽한 선바위가 우뚝 솟았다.

귤은 김유선생이 거문도의 비경 8곳을 읊은 "삼호팔경(三湖八景)" 중에서 서도를 찬(讚)한 '鹿門怒潮;녹산 끝 절벽의 성난파도' 와 "龍巒落照;용물통에서 보는 아름다운 해넘이' 와 '梨谷明沙;배골의 하얀 모래사장' 와 '石凜歸雲;아개낀 기와집 몰랑의 신선대'를 다 훑지는 안했어도 선생의 시심에 가까이 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매한 선생의 문하에는 수많은 후학들이 있었는데, 영국군 점령시 청의 정여창(丁汝昌)이 중재를 하러왔다 통역을 했던 이곳 학자들의 출중한 학문에 감흠해 조정에 '거마도'를 '거문도'로 개칭할 것을 건의하여 섬이름이 거문도로 불리게 됐다는 게다.

수월산 옆구리를 밟고 정오에 등대에 닿았다.

환상적인 코스를 주파하자 시장기가 뱃속을 후벼온다.

더 울상인 미투 앞에서 내색하기 뭣해 그를 다독대며 숙소까지의 한 시간을 안감 힘을 써야했다.

힘들어하는 우릴 보고 선생은 수월산 나들머리에서 택시를 타라 일러줬었다.

택시 탈 생각도 없었지만 기다리는 손님이 많아 강행군을 하는데 웬 봉고차가 달려온다.

만원인 차 지붕에 'tex'란 프라스틱 로고가 붙어있었다.

거문도의 택시는 승합차가 대신하고 있는 거였다.

선착장까지 편도 3천원이란데 5분쯤의 거리일 것 같았고, 내가 선착장까지 오는 동안 그 택시는 두 번을 왕복하고 있었으니 떼돈 벌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점심 후 미투와 나는 고도(古島)북쪽의 해안을 더듬기로 했다.

헌데 빡센 오전일정에 파김치 된 몸 탓에 파출소 근처 어느 담벼락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파출소에서 신문폐지를 얻어 자리를 깔고 사지를 펴니 엊밤 장어요리에 애간장 태웠던 포장마차가 빤히 보이고, 예의 복어아줌마는 할일 없다는 듯 한가한 오후를 망중한 하고 있었다.

자리를 펴고 사지를 쭉 펴자마자 웬 건장한 어부아저씨가 페인트통 하나를 들고 와서 우리 옆에 방치된 돛대를 망치로 두들겨대는 게 아닌가?


녹을 벗기고 페인트칠 할 요량이라. 걱정 돼 묻자 그는곧 (작업)끝나니 괜찮다는 거였다.

십여 분 작업하던 아저씬 어느 뚱보아저씨가 나타나 지전 한 뭉치를 주고 떠나자 페인트통을 갖고 포장마차 옆 텐트 속으로 사라진다.

저쪽 해안가에서 전경(戰警)이 한 말들이 물통 두 개를 들고 오다 놓곤 포장마차로 가더니 리어카를 끌고 오는 게 아닌가.

물통 두 개는 나른한 오후만큼 그의 두 어깨를 처지게 했던 게다.

난 일어나 슬금슬금 해안길을 따라갔다.

쪽빛 바다는 잔잔하고 바다가장자리 석축에 기생한 톳을 채취하는 관광객아주머니 한 떼가 손길이 바쁘다.

이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주민 한 분이 고래고래 소리친다.


해안가는 마을 공동소유이기에 톳 채취는 불법이라는 게다.

화들짝 놀란 아주머니들은 주섬주섬 비닐봉지에 담아 사라진다.

시멘트포장길은 5백미쯤에서 끝나 있었다.

길섶엔 뱁밥(주민이 알려줬다)이 바닷바람의 영양소는 혼자 다 흡수하는지 무성하고, 보리똥나무가 군락을 이뤘는데 열매는 벌써 누군가의 입으로 다 들어간 후였다.

근데, 잠시 후 리어카를 끌고 나타난 부부가 석간수를 길어가다 서서 나의 궁금증 몇 가지를 풀어줬다.


여기 석간수는 거문도 제일 약수란(수질검사 완료) 점과 톳 채취가 불법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아주머니는 어디서 땃는지 붉으스래 익은 보리똥을 한 줌을 내게인심 쓰는 거였다.

달쓰름한 보리똥 맛을 음미하다 물통을 비우고 약수를 채웠다.

아까 그 전경도 여기서 물 길러갔던 셈 이였다.

길가, 처마가 머리에 닿을 것 같은 스레트 집 문을 열고 나온 앳띤거구는 딱 달라붙은 반소매 티와 반바지차림의 걱정스레 생긴 드럼통체구를 끌고친군지 똘만인지 두 청년을 뒤따르게 한 채 해안길이 비좁다는 듯 활보하며사라진다.

보아하니 당구장이라. 그 몸에 당구는 어떻게 칠까?

미투는 저만치에 pc방도 있었다고 했다.

4월들어 가장 좋은 날씨가 해안가를 어슬렁대고 쪽빛 바다는 이곳 사람들의 풍요를 기약하는 낙원일지니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다 고만고만하다는 사실이다.


동떨어진 섬이란 선입견을 갖고 눈알 굴리는 내가 이상한 놈인 게다.

모두가 자기의 삶의 터에서 매시간 충직하게 자기를 소진시키는 게 인생이려니.

복어 아줌마의 포장마차에 관광객 한 무리가 들이닥쳤다.

떠들썩하다 .

제발 장어요린 요리방법까지 주문했음 싶다.

pm 4시 반, 나로도 행 쾌속선‘줄리아 아쿠아’호에 승선했다.

졸음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10. 04.2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