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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푸르디푸른 청산도 & 슬로우 걷기 축제 (청산도 기행)

푸르디푸른 청산도 & 슬로우 걷기 축제 (청산도 기행)



새벽3시에 출발했다.

완도항에서 청산도행 8시발 첫 여객선에 탑승키 위한 고육지책 이였다.

허나 7시 조금 넘어 완도항 터미널 앞에 도착한 우린 이미 9시 반 표도 매진돼 10시 반 배표를 사야한 탓에 아침도 먹기 전이어서 허기증이 곱절로 밀려왔다.

갈뫼는 해명하느라 우거지상(?)이 됐다.

어제 밤까지 연락했던바 첫배는 무난히 탈 수 있으니 안심하래서 3시에 출발했고, 이럴 바엔 엊밤에 혼자라도 와서 새벽에 선착순 예매했어야 했다는 자책을 토하면서 말이다.

터미널 앞 모 식당의 6천 원짜리 백반도 허기증 나게 빈곤했다. 장사가 돼 가는 모양이 의문일 정도였다.

어쨌거나 10시까진 깔아뭉개야 한다.

우린 신지도 명사십리해수욕장에 빠지기로 했다. 근년에 놓인 신지대교는 날아갈 듯 솟구쳐 아침의 완도 풍광을 끌어당겨 그나마 허기증을 달래주려는 듯싶다.

명사십리해수욕장은 잔잔히 밀려드는 파도가 모래알갱이들을 애무하며 허기증도 일상의 잡념마저 썰물처럼 다 씻어가며 해무 속에서 아침을 속삭이는 거였다.

텅 빈 백사장을 거닐다 송림 속 나무판 산책로를 거닐다보니 끝머리 민박촌에 이른다.

송림 사이에서 개발이 한창인지 불도저굉음이 요란하다. 신지대교가 세워지기 전엔 무성한 송림들이 사구(砂丘)에 서서 해풍을 막아내는 - 그 안의 십리길 세모래사장은 명물 이였다. 그 해수욕장이 난개발로 인해 방풍송림이 사라지고 사구에 구조물들이 들어섰다.

내 알기론 여름철이면 모래를 실어다 백사장을 보수하는 여느 해수욕장과는 다른 세모래가 풍요로운 천혜의 자연풍광이 빚은 명사십린데 이젠 어떻게 사구가 변할지 착잡한 감정이 솟았다.

탁 트인 바다와 고요가 해무 속에서 수면을 애무하고 파도는 모래알갱이를 깨우는 몽환적인 명사십리를 뒤로하고 10시 반 청산도행 카페리호에 승선했다.

100여종의 상록활엽수가 자생한다는 그래서 천연기념물이 된 애기섬인 주도의 전송을 받으며 창해로 나아간다.

흐린 날씨에 잔뜩 웅크린 바다는 해무를 뒤집어쓴 채 아직도 졸고 있는 진섬과 모항도를 깨워 영접을 내보냈는가 싶더니 우측에선 등댈 앞세운 소·대모도가 알 듯 모를 듯한 포퍼먼스를 펴게 하고 있다.

검푸른 바다와 짙은 해무 속에서 세찬 바람과 맞서는 50분간 내 몸뚱이를 확인하다보니 청산도 도창항에 닿았다.

900여명의 탐방객들이 페리아가리 속에서 빠져나와 도창항을 울긋불긋 페인트칠 한다.

운행 중 쉬는 짬을 돈벌이에 나선 약삭빠른 시내버스를 잠시 빌어 타고 우린 산행들머리 신흥리로 향했다.

정오가 다 되서 대봉산행에 들었다. 숲을 갓 베어낸 등산로는 거칠고 쌓인 부엽토는 쿠션감이 좋아 기분 좋다.

여정실나무를 비롯한 사철나무들이 주종을 이룬 등산로엔 찔레꽃이 밝은 미소로 길안내를 하고 있고 야생화들이 앙증맞게 눈인사를 보내곤 한다.

틈틈이 고사리도 주먹 쥐고 삿대질을 한다.

동쪽이려니. 저 아래 진생리 뭍을 파고든 푸른바다는 갯돌밭을 일구고 저만치엔 검은 천으로 누더기를 댔다.

유명한 전복양식장이란다. 그 뒤론 노적도가 해무로 차일을 치고 바다를 미궁 속에 가뒀다.


오후1시쯤 대봉산(379m)에 올랐다.

언제부턴가 참빗살나무들이 연초록 혀를 날름거리며 떼거리로 몰려들고 진달래는 더 화사한 철쭉에 불침번 교대중이라.

앙증 떨던 야생화도 현호색에게 자릴 내주고 각시붓꽃도 얼굴을 내밀며 괴불주머니가 주렁주렁 바위틈을 밝히고 그 바위에 기생한 이끼는 콩란에 밀려났다. 산릉을 오르내리는 숲 사이로 그림처럼 다가서는 산기슭의 풍광은 별천지였다.

다랭이논·밭과 구들장논의 주황,노랑,초록의 파스텔은 꼬부랑길 따라 산자락을 기어오르는 정교한 산수세밀화를 그렸다. 그 꼬부랑길은 어김없이 산 아래 바짝 엎드린 검정·빨간 지붕들에 명줄을 잇고 있다.

바다가, 산이, 들판이 푸르러서 청산도란 섬이 빚어놓은 좀은 낯설지만 정감 가는 풍경이라.

일행 십여 명이 대선산 아래 구릉에서 늦은 기갈을 때운다. 없는 것 빼곤 사람 수 만큼 다양한 풍성한 먹거리였다.

대선산(349.4m)을 밟고 보적산을 뛰어넘어 범바위골을 훑고 당리세트장을 답사한다는 애초의 계획은 고성산을 뭉개고 읍리를 거쳐 당리로 가는 코스를 택하기로 했다.

엊밤 3시에 출발케 한 위인 탓에, 엿가락 늘리듯 시간을 늘릴 수 없기에, 4시 반 배에 탑승하려 수정했지만 그만도 빠듯할 것 같았다.

3시쯤 읍리에 들어섰다.

퇴락한 지붕들이 높은 돌담에 난쟁이 우산마냥 내려앉아 있는 동리는 꼭꼭 숨어있다.

혹여 바람이라도 내밀한 안방을 훔쳐볼까 싶었던지 창문도 쪼그맣다.



돌담은 염분 머금은 세찬 바닷바람 막아선 세월의 더께가 묻어나고, 담장이넝쿨과 마삭줄로 얼키설키 엮인 채 고즈넉한 고샅길을 만들었다.

그 고샅길 속에 우물정(井)자 샘이 맑은 지하수를 뿜어내며 적잖은 터를 차지하고 있었다. 섬에 지하수가 펑펑 쏟아진다니, 필경 거기 샘엔 솟는 물만큼 마을의 역사가 진하게 녹아있을 테다.

지금은 집집마다 수도꼭지가 생겼는지 샘은 왠지 쓸쓸해 보였다. 이웃끼리의 소통도 돌담 속으로만 숨어들면 어쩌나?

돌은 곧 청산도다. 돌 없는 청산도는 삭막하여 쪼그라들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돌담은 안방을 따뜻하게, 다랭이논·밭을 만들고 거기에 심은 작물을 보호하여 풍요를, 죽은자에겐 묘역의 담장이 되어 사자의 넋을 편히 잠들게 했다.

산행 중에 묘소는 대게가 돌담을 휘둘렀음을 목격한다.

청산도 사람들이 돌 없이 어찌 삶을 꾸렸겠는가?

이젠 그 돌담이, 돌담위의 다랭이논·밭에 초록과 노랑물감을 들여 관광객들을 불러들여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다.

청보리, 마늘, 유채꽃으로 단장한 다랭이논·밭은 영화 <서편제>와 <불새>와 드라마 <봄의 왈츠>의 세트장을 곱게 아울러 멋진 풍광을 만들었다.

바다를 껴안은 그 아름다운 풍광 속을 파고들었다. 빨·초·노랑의 물결이 흐드러지는 당리마을 꼬부랑언덕길에서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를 구성지게 불러대던 유봉과 송화의 더덩실 춤사위가 떠오른다.

임권택 감독이 여기 때 묻지 않은 다랭이논 황톳길에 <진도아리랑>을 녹여 <서편제>를 창작했음은 고즈넉한 자연부락의 맛깔이 묻어나기 땜 이였을 테다.


그 황톳길이 시멘트로 도포를 했다. 청산도 모든 꼬부랑길은 시멘트길이 됐다.

시멘트길이 구불구불한 청산도는 <서편제>도 <불새>도 <봄의 왈츠>도 태어나지 안했을 게 뻔하다.

더구나 세계로부터 “슬로우 시티(slowcity. cittaslow = 1999년 이태리에서 시작한 ‘느리게 먹기+느리게 살기운동으로 16개국111개 도시가 선정됨 )”란 찬사의 영예도 받지 못했을 게다.

그 영예를 짊어지고 다니기 너무 무거워 황톳길이 패일까 봐 시멘트로 죄다 발라놨을까?

아니면 돌 없인 못사는 곳이라 돌길은 못 만들고 단단한 시멘트로 포장을 했을까?

‘슬로우 시티 걷기 축제(4/17~5/2)’는 그걸 자랑하기 위해서 세금 쏟아 부어 개최하는 건가?

다른 곳, 정기노선 버스길이나 농로는 몰라도 세트장이 있고 슬로우 걷는 길은 비포장 자연길이 제 옷이려니!

시멘트 길 걸으려 먼 길 온 순례자는 없을 테다.

바다는 청산도가 아니어도 더 가까운 곳에 널려있다.

달랑 집 두 채의 세트장을 보기위해 청산도까지 오진 않을 것 아닌가.

더더욱 화물칸의 짐짝이 돼 청산도를 찾진 않을게다.

슬로우길 3코스까지 만들고 앞으로 4.5코스를 조성한다는데 시멘트로 포장할 건지 답답하다.

더불어 울분케 하는 건 600명 정원의 페리호에 화물칸에 실어야할 차(車)와 화물 대신에 300명의 관광객을 더 탑승시키는 뱃장 좋은 지자체의 돌같이 우둔(?)한 꼼수였다.

4시 반에 청산도를 떠나오는 바닷길의 암청색과 쌩쌩한 바람이 차가운 것은 흐린 날씨 탓만은 아닐 것 같았다.

슬로우 시티 청산도가 이름에 걸맞게 자연 속에 녹아있었으면 싶었다.


흙냄새 맡으며 비린 바닷바람 안고 어슬렁어슬렁 거닐며 자연에 동화돼 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싶어 때 묻지 않은 청산도를 찾을 테니 말이다.

완도읍 어느 횟집에서의 풍성한 생선회를 곁들인 저녁식사는 오늘 미흡했던 아쉬움까지 삭히는 거였다.

나는 못하는 소주를 두어 잔 걸쳤으니 홍당무 된 얼굴마냥 기분이 타올랐다.

10. 04.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