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느낌~ 그 여적

능소화

능소화

여름은 아직 물러날 기세가 아닌가 싶군요.

9월은 벌써 울집 정문을 들어섰는데 태양은 열정을 쏟느라 안간힘을 다하여 요염한 능소화에 매달려 있습니다.

여름 끝을 붙잡고 가을을 넘보는 능소화는 내가 집을 드나들 때마다 한들한들 눈짓을 하며 계절의 사잇길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고향친구 집에서 천덕꾸러기 신세타령을 하던 놈을 재작년 제가 옮겨다 우리 집 정문 옆 한 평 남짓한 화단에 심었더니, 넝쿨은 건물을 타고 3층을 넘보다 금년엔 수북이 꽃망울을 터뜨렸습니다.

능소화는 양반집 마당에만 심었다 해서 ‘양반꽃’이라 했다죠.

꽃말이 ‘명예’일 만큼 독보적인 아름다움과 고상함을 자아내며 열정을 태우지요.


시골친구 녀석은 그 놈이 대문 옆 텃밭을 그늘지게 하여 채소를 가꿀 수가 없다고 싹둑 잘라버렸지요. 양반노릇하기가 싫었던 가 봅니다.

밑동이 아기 손목만한 굵은 놈을 어찌나 아깝고 탐이 났지만 얼른 속내를 보이기가 뭣하다가 용기를 냈지요. 내가 양반노릇을 하고 싶다고-.

친구부인이 쾌히 승낙하여 그 길로 옮겨 심은 게 이젠 저희 집도 양반가에 끼게 된 셈입니다. 양반되기가 어려운 건 아니더군요.

넝쿨이 하늘까지 솟아오른다고 해서 능소(凌宵)란 이름을 붙였다지만, 그보단 놈이 품고 있는 애절한 사연땜일 거란 생각을 해 봅니다.

옛날, 임금을 사랑한 한 궁녀가 딱 한 번 은총을 입고 그리워하다 죽었습니다.

상사병으로 죽은 게지요. 그 궁녀의 혼이 넝쿨로 화해 구중궁궐 높은 담을 타고 넘어 임금의 발자국소리와 모습을 보려고 꽃을 피웠지요.

열정적이며 요염하리만치 고혹스런 꽃망울을 보며 그 궁녀를 생각하면 처연한 생각이 듭니다.

하물며 시들지도 않고 뚝하고 떨어지는 꽃망울은 젊은 궁녀의 비원을 보는 것 같습니다.

작가 조두진씨는 400여 년 전의 애련을 빌어다 “능소화”란 소설을 쓰기도 했지요.

여늬(부인)는 졸지에 사별한 남편 이응태의 관 속에 애절한 편지를 넣었습니다.


.

<원이 아버지에게.

병술 년(1586년) 유월 초하룻날 아내가.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 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 가요? 당신을 여의고 아무리 해도 나는 살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다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 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 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 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부인은 잊을 수도, 잊지도 못할 사별의 슬픔을 하늘이 정한 운명도 거스러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려하지요. 꿈에서라도 말이지요. 1998년 4월 안동시 정상동 택지지구개발 중 이응태(1556~1586)의 무덤에서 발견한 가로58cm 세로33cm의 한지에 빼곡히 쓰인 편지!

소설 능소화는 무덤 속에서 발견한 편지 한 통에서 모티브를 끄집어냅니다.

명년엔 능소화가 3층 우리마당으로 월담을 하여 만발할 겁니다.

전생에 어떤 여인이 날 흠모하여 이제야 우리 집을 찾아 기웃거리게 된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을 여미게 됩니다. 양반되고 전생의 연인을 뵙게 됐으니 금년은 행운이 넘칩니다.

그 여인이 엿보고 있을 것 같아 능소화가 지기 전까진 마음을 더욱 정갈히 해야 될 것 같습니다.

09. 09

'느낌~ 그 여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벽에 화장하는 여자  (1) 2010.03.06
고르와 도린  (0) 2010.03.05
영화 `색계`  (0) 2010.02.18
영화 `어거스트 러쉬`를 보고  (0) 2010.02.18
영화 `메디슨 카운티`를 보고  (0) 2010.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