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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고르와 도린

고르와 도린

-‘D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은 곧 여든두 살이 됩니다. 키는 예전보다 6cm 줄었고, 몸무게는 겨우 45kg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함께 살아 온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내 가슴 깊은 곳에 다시금 애타는 빈자리가 생겼습니다. 내 몸을 꼭 안아줄 당신 몸의 온기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로 시작되는 편지는 지고지순한 부부애의 전범 이였다.

1947년 10월 23일 스위스 로잔, 눈 온 날의 거리에서 마주친 고르는 도린에게 춤추러가자고 제안한다. “와이 낫(Why not)”이라고 대답했던 그녀-.

2년 후 결혼했을 때를 회상하는 고르는 “나는 조심스럽게 당신의 옷을 벗겼습니다. 그러자 현실과 상상이 기적처럼 맞아 떨어져, 나는 살아 있는 밀로의 비너스상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쾌락은 자신을 내어주면서 또 상대가 자신을 내어주게 만드는 것이더군요. 우리는 서로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었습니다.”라고 술회하는 거였다.


무일푼의 오스트리아 태생인 앙드레 고르가 총명하고 미모인 영국아가씨 도린과의 결혼생활은 고르의 수입이 불균형하여 어려운 생계를 꾸려야 했고, 헌신적인 도린의 내조로 그는 수많은 저작활동을 하며 프랑스의 좌파사상가로, 생태철학자로 유럽의 지성으로 우뚝 서게 했던 것이다.

1983년 도린이 불치병‘거미막염’에 걸리게 되었고, 고르는 이때부터 모든 공적인 활동을 접고 아내 곁에 간병인으로 머물게 된다. 그리고 그는 편지 씀을 고백한다.


“우리가 함께 한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나는 많이 울었어요. 나는 죽기 전에 이 일을 해야만 했어요. 우리 두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우리의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글을 대중을 위해 쓰지 않겠습니다. 오로지 아내만을 위해 이 글을 썼습니다.”


사실 그는 그가 첫 작품<배반자>를 내면서 그 글속에 아내를 폄하(?)했던 짧은 구절‘아내를 불쌍하고 연약한, 누군가가 구원해 주어야만 할 여자’로 묘사했었고, 후일 구원 받아야 할 사람은 정작 자신임을 깨닫게 되어 항상 아내에게 죄스런 멍에를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내게 당신의 삶 전부와 당신의 전부를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동안 나도 당신에게 내 전부를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참회하면서 써가는 고르의 편지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고 있다.

“우리 둘은 모든 것을 공유한다고 믿고 싶었는데 당신만 혼자 그런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라며 안타까워했던 그가 2006년 3월에 시작한 <D에게 보낸 편지>를 3개여 월에 쓰고 스스로 독극물 주사를 맞아 동반자살(07.9월22일)을 하게 된다.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말을 했지요.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래도 둘이 함께 하자고.”한 고르와 도린은 내생에서도 틀림없이 영원한 연인으로 살아갈 것 같음이다.


고르가 아내에게 써가는 마지막 부분은 우릴 가슴 메이게 한다.

“밤이 되면 가끔 텅 빈 길에서, 황량한 풍경 속에서, 관을 따라 걷고 있는 한 남자의 실루엣을 봅니다. 내가 그 남자입니다. 관 속에 누워 떠나는 것은 당신입니다.

캐슬린 페리어의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세상은 텅 비었고 나는 살지 않으려네.’

그러다 나는 잠에서 깨어납니다. 당신의 숨소리를 살피고 손으로 당신을 쓰다듬어 봅니다. 우리 울다 한 사람이 죽고--- 당신을 화장하는 곳에 나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의 재가 든 납골함을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쉰여덟 해를 같이 해온 고르와 도린의 사랑의 일생을 어느 만큼은 유추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그들의 ‘젊은 연인’같은 삶에 가슴이 찡해 옴을 어쩔 수가 없었다. 오직 총명과 포용과 지성만이 그들 부부를 영원한 연인관계로 유지시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선 다음 생까지도 필히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는 대통령을 비롯하여 전 국민이 그들 부부의 동반자살(자살이 가장 큰 죄악이라도)을 애도하고 기리게 되었던 게다.‘위대한 지성이 아름다운 사랑을 수놓다 떠났다.’고.


그들의 진솔한 일생을 생각하면서 ‘나는 왜 못할까?’를 고민해 본다. 아집, 편협, 이기적인 천박함 땜이리라. 더는 그걸 자각하곤 곧 다시 망각의 늪으로 빠지는 생활의 반복일터-.

아내는 오늘 오후 영동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평소에 허리통증은 앓아 왔었지만 그때마다 한방치료와 약물복용으로 진정시켜 왔었는데 한 달 전부턴 다리통증이 극심하여 고심하다 수술을 하기로 결정한 거였다. 내일 전문의 진병호박사의 집도로 수술을 하겠지만, 진박사의 말대로 5번 척추에서 야기한 신경을 압박하는 돌출부위만을 제거하는 수술이기에 퇴행선 요통은 어쩔 수가 없단다.

다만 다리에 전달되는 통증만은 제거할 수가 있고, 수술도 한 시간정도의 간단한 시술이라 하여 간병을 애들한테 맡기고 난 집을 비울 수 없다는 핑계로 떨어져 있다. 허나 누구 못잖게 겁 많은 아내를 입원시키고 혼자 있자니 맘 편치 않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내가 퇴원하여 몸조리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더는 노화로 인한 퇴행성 요통을 더 이상 진전시키지 않도록 요양과 운동을 하도록 적극 주선 협조하는 것 일게다.

고르의 ‘참사랑 길’의 삶에 100m 뒤쯤만 따라가는 나라면 아내도 어여삐 여겨줄까.

불만과 미흡점은 서로가 통감하는 우리지만 그래도 아내는 자기의 전부를, 일생을 나에게 송두리째 맡기는 삶을 주저하지 않고 실천해 오고 있다. 문제는 나의 편협과 에고이리라.

아내에게 향한 불만을 삭혀야 함이다. 이제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는가?

고르와 도린의 일생을 부럽게 쳐다 볼일만은 아닌 것이다. 흉내라도 내보는 게다.

아내의 수술이 잘 되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우리내외도 고르와 도린을 닮아 가면 싶다.

그리고 고린의 유서(화장한 재를 둘이 함께 가꾼 집 마당에 뿌려 달라.)처럼 우리부부의 재도 고향선산 나의 선친 묘역에 뿌려달라고 애들에게 부탁하련다.


앙드레 고르 부부를 흠모하고 그들의 사랑이 내세에도 이어질 것임을 기원해 봅니다.

07. 12. 02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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