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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원나라의 황후에 오른 공녀(貢女)

원나라 황후에 오른 익산의 공녀(貢女)


고려는 1225년(고종12)부터 1355년(공민왕4)까지 100여 년간 원나라에 수백 명의 공녀를 바쳐야 했다.

고려조정은 공녀를 차출하기 위해 결혼도감(結婚都監) 내지 과부처녀추고별감(寡婦處女推考別監)을 설치하여 여자들을 징발하자 처녀들은 조혼을 하는 풍습까지 생겼고, 하여 처녀 징발이 어려워 역적의 아내나 파계승의 딸 등을 공녀로 보냈는데 원이 폐망한 후 명나라도 병자호란(1636~1637)이후에 공녀를 요구했었다.

1331년 익산 사는 기자오(奇子敖)는 15세의 막내딸 기순녀(奇順女)를 공녀로 차출 당한다.

초상집이 된 집을 떠나면서 영특한 순녀는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죽기야 하겠습니까? 죽기보다 못하다면 자진(自盡)하면 되지요” 라며 부모님을 위로하기까지 했다.

당시 원나라엔 공남(貢男)으로 가서 환관이 된 고려남자가 꾀 있었는데, 순녀는 원나라에 붙들려가 공남인 박불화와 고용보(高龍普)를 우연히 조우하게 된다.

원나라 환관인 고용보는 미색에 영리하고 기품 있는 순녀를 보고 황제·순제(順帝)의 다과를 시봉하는 궁녀로 추천을 하고, 이내 황제는 순녀를 어여삐 사랑하게 되었다.

당시 원나라의 후비열전(后妃列傳)에는 “비(妃;기순녀)는 미색에 영특하고 가는허리에 기품이 있어 갈수록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고 기술돼 있다.

순녀가 황제의 총애를 받자 황후인 타나시리(答納失里)의 질시와 간계에 고초를 겪게 되지만 영특한 순녀는 이를 잘 극복하여 입궁 2년 만에 제2황후에 책봉돼는 수완을 보인다.

황후는 갖은 간계를 꾸미고 반정까지 꾀하다 들켜 사약을 받게 되고 나중에 순녀는 황후에 등극하게 된다.

기황후의 아들 아유시리다라는 14세에 황태자에 책봉되니(1353년) 원나라에서의 기황후의 기세는 충천하였고, 덩달아 고려의 기황후의 죽은 부친도 영안왕에 봉안 되는 등 막강한 세도가가 되였다.

기황후의 오빠들도 덕성부원군에 봉임 되었는데, 세도와 권모술수로 조정을 어지럽히다가 순제에 의해 왕위에 오른 공민왕도 이들의 역모를 탐지하여 숙청효수 시키고야 말았다.

이를 불충하게 여긴 기황후는 화가나서 공민왕을 폐위(1364년)시키고 충선왕의 3남 덕용군을 왕에 등극시킨다.

1365년 기황후는 명실상부한 황후에 올랐지만 원의 국세는 급박히 기울고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우자 쫓겨나 몽골로 달아나야했다.

경기도 연천읍엔 <기황후의 묘>란 봉분이 있다.

기황후가 사후에 어떻게 하여 유골이( 유골이 없이,평소 기황후의 고국에 대한 향수와 그의 유언으로) 여기에 묻히게 됐는지 모르나 15세에 공녀로 붙들려가 대국 원나라의 황후에까지 올라 중원을 쥐락펴락 했을 권세와 영화를 누렸으니 우리나라 여성의 뛰어난 잠재력과 총명한 DNA를 엿볼 수 있음이다.

숭유(崇儒)사상이 국시였던 이조초기까지도 여성들의 입지는 공고하였던바, 14세기경의 기순녀의 입신기를 보면서 오늘날 우리나라 여성들 잠재력의 무한함을 일깨워보는 게다.


ㅡ<이상국의 미인별곡>에서 간추림ㅡ 2010.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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