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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임랑 해수욕장 & 묘관음사

임랑 해수욕장 & 묘관음사

갈맷길의 시작점인 임랑 해안가(해수욕장) 트레킹에 이어 묘관음사탐방도 할참으로 동해선열차에 승차하여 좌천역에 내린 시각은 오전10시반이었다. 개통한지 얼마 안됐는지 좌천역사는 깔끔했지만 시가지랄 게 없어 한적했다. 인터넷을 통해 임랑해수욕장 방향을 대충 알곤 있었지만 확인차 누군가에게 묻고 싶어도 사람이 없다. 대로를 따라 북상하는데 마침 언덕에서 쑥을 뜯고 있는 아주머니일행에게 물었으나 시원한 답이 없다. 이 근방에 살 텐데 나보다 더 답답하다. 가던 길을 계속 간다. 야산골짝을 향하는 신작로에 승용차만 휙휙 지나친다.

좌천역 인근 산골짝의 냇가, 물고기어장에 붕어떼가 유영하고 있었다
청암 박태준 기념관, 세기로는 청암의 글씨로 해수욕장인도에 세워졌다
박태준기념관 후원의 곰솔과 입구 안내판

옹색한 밭뙈기는 마늘과 감자 순이 무성하고 강줄기의 물길을 막아 놓은 얕은 웅덩이는 물고기잡이 터인가 싶었다. 자세히 내려다보니 붕어 떼가 한가롭다. 반세기 전으로 타임머신여행에 든 기분이 들었다. 사람 그림자도 없는 산골의 신작로를 혼자 거니는 고독한 산보자의 낭만은 쉽게 얻는 기회가 아니다. 온 산야가 초록인 고향 앞개울에서 물고기 잡던 여름방학이 떠올랐다. 조그만 붕어새끼 한 마리 잡는 희열과 흥분은 물에 옷이 다 젖어도 상관없었다. 그때의 꼬맹이 친구들은 지금은 다 어디서 살까?

청암 박태준의 글씨와 애용한 지필묵
▲청암휴식터▼
휴식터 내 스타벅스커피점이 만원이다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과 산야는 내 생전 처음 밟아보는 처녀지다. 당연히 이 근방에 내가 알만한 지인도 없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건 휴대폰뿐이다. 산골신작로 앞이 트이더니 바다가 보인다. 임랑일 것이다. 청암 박태준 기념관이 눈길을 붙잡는다. 근대화 첨병노릇을 한 철강왕 박태준의 흔적을 잠시 일별하고 그 옆 길 건너 넓은 휴식터에 들러 벤치에 걸터앉았다. 넓은 초지가 평안을 안겨준다. 근디 저 끝에 스타벅스커피 집이 있고 사람들이 북적댄다. 승용차타고 와 마시는 커피 맛은 다를까?

임랑해수욕장 입구의 강태공들
한가한 임랑해수욕장 백사장, 비치파라솔 아래 가족피서족이 마음을 붙든다

임랑해수욕장(林浪海水浴場)에 들어섰다. 푸룬 해원에서 밀려온 물살이 모래사장에 닿아 하얀 거품을 토하고 사라진다. 해수욕하는 사람 없는 바다와 하늘은 공허하다. 해수욕장이 맞긴 한가! 낚시꾼들이 숨어 든 텐트 십여 개가 모래사장을 지키고 있다. 아까 스타벅스 손님들이 더 많지 싶었다. 인파 북적대는 해운대바다와 공허한 일랑바다의 차이점은 뭘까? 해변의 가게들도 4월의 따스한 햇볕에 오수(午睡)에 들참인가?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고리원자력발전소가 시야에 들어왔다. 사진으로만 선뵈다 오늘 처음으로 대면한다. 그냥 멀리서 거기였구나! 라고 일별하는 싱거움 더 이상 기대하지도 안했었다.

천연석물이 투포환자세의 역사 모습이다
▲임랑해수욕장 방갈로▼

‘임을랑포’는 임랑과 월내해수욕장을 함께 이름이다. 임을랑포를 임책(任柵)이라 하는데 적을 방어하기 위한 성책이 있는 갯가라는 뜻이다. 임을랑의 월출경(月出景)은 차성팔경의 하나이다. 백사장 주변엔 노송이 숲을 이루고 있다. 임랑백사장 길이가 1.5㎞에 수심도 1.3m밖에 안 되는 천혜의 조건이다. 고리원자력본부가 있는 봉화산이 감싸고, 장안사 계곡에서 발원한 장안천이, 정관읍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좌광천이 유입한다. 임랑강 맑은 물을 따라 내린 모래가 백사장을 이루고, 백사장 주변에는 노송이 즐비하여 병풍처럼 푸른 숲을 이루고 있다.

위이브온 커피전문점, 전망이 좋아선지 맛이 좋아선지 젊은이들이 만석을 이뤘다
해안가 어느집 마당의 곰솔이 나를 붙잡았다
임랑해수욕장에서 신평소공원쪽의 해안풍경

해안가에 멋들어진 카페가 있긴 한데 동네고샅은 시간이 정지된 듯 했다. 나를 붙잡는 건 멋들어지게 늙은 곰솔노송들이다. 보고 또 봐도 매력이 넘친다. 근디 사람은 쪼그라드는 게 노익장의 멋일까? 옛날부터 월내해수욕장과 더불어 임을랑포 백사장은 주위에 노송이 병풍처럼 휘둘러 초록 숲을 이뤘다. 이곳으로 흘러드는 임랑천의 맑은 물에서 물고기를 낚다 밤이 되어 송림 위에 달이 뜨면 연인과 조각배를 타고 달구경 뱃놀이를 즐겼단다. 아름다운 송림(松林)과 달빛에 반짝이는 은빛 파랑(波浪)의 두 자를 따서 임랑이라 하였다.

고리원자력발전소
▲아직 바다는 차가운가? 해수욕장 백사장의 비박풍경▼

“도화수(桃花水) 뛰는 궐어(鱖魚; 쏘가리) 임랑천에 천렵(川獵)하고, 동산(東山) 위에 달이 떴으니 월호(月湖)에 선유(船遊)한다”라고 하여 자연경관을 예찬한 차성가가 전해오는데, 이곳의 빼어난 경관을 월호추월(月湖秋月)의 승경(勝景)이라 하여 차성 팔경의 하나로 여긴다. 넓게 깔린 백사장은 해수욕장으로 사랑받고, 옆의 자연산 횟집들은 식도락의 풍미까지 더해 갈맷길 트레커들과 관광객들에게 휴식과 힐링의 진수를 공감케 한다. 해안가에서 가족나들이 강태공들이 시간과 낭만을 낚는 여유는 한 폭의 서사시가 된다.

임랑해안은 곰솔(해송)시위가 볼만하다
▼야구등대와 강태공들▲

묘관음사(妙觀音寺)는 찻길에서 500m거리도 안 된다. 절 이름이 묘한데도 나는 여태 몰랐었다. 인터넷 검색에서 우리나라 유명 고승들 존함이 즐비한 유서 깊은 사찰이란 걸 알았다. 고려 말 태고(太古) 보우선사(普愚禪師)가 중국의 석옥 청공선사(石屋淸控禪師)로부터 임제종의 정통 법맥을 이어받은 후 열반(涅槃)의 미묘한 이치와 ‘이심전심으로 전해지는 석가모니의 깨달음[正法眼藏]’을 스승과 제자가 계속 이어 갔다. 이러한 깨달음은 청허당(靑虛堂) 휴정(休靜)과 환성(喚醒),지안(志安)을 거쳐 경허(鏡虛)-혜월-운봉(雲峰)-향곡(香谷)-진제(眞際)스님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고리원자력발전소는 출입금지다
묘관음사 입구는 특이하게 철도가 일주문역할을 한다
▲묘관음사 입구의 야자수와 대나무 열병식▼

묘관음사(妙觀音寺)는 바로 이 법맥을 지키고 이어 가는 사찰이란다. 또한 청담(靑潭), 성철(性徹), 서옹(西翁), 월산(月山) 등 당대의 선지식 승려들도 법을 위하여 몸을 잊고 처절히 수행정진 하던[爲法忘軀] 장소로서 한국 현대 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개항기와 일제강점기는 우리민족사에 매우 불행한 시기였으나, 조선시대의 억불(抑佛)정책의 한을 만회하려는 경허 스님을 비롯해 수많은 선지식 승려들이 출현하여 난세의 고통에 신음하는 중생들을 제도하던 불교의 중흥기라고 할 수 있다.

묘관음사
백화도장 ; 동안거와 하안거 때 참선수행에 정진한 길상선원 기념탑

묘관음사는 경허와 혜월의 법맥(法脈)을 이은 운봉이 일제가 도발한 태평양전쟁의 참화가 극심한 1941년에 창건했단다. 운봉이 입적(入寂)한 후에 수제자인 향곡이 중창하였고, 조사선(祖師禪)의 높고 우뚝한 선풍에 30여 년간 수많은 수행승들이 묘관음사에 머물렀다. 1967년 승려 진제가 법을 이어받았다. 묘관음사 경내의 전각은 대웅전, 조사전, 삼성각, 종각 등이 있으며, 당우(堂宇)로는 길상선원(吉祥禪院), 심원당, 산호당, 법중대, 금모대, 행각료와 각종 편의시설이 있는데 사찰의 배치가 절묘할 만치 우아하다.

범종각
조사전엔 중국 선사(禪師)인 마조, 남전, 백장스님의 진영이 중앙에 있고, 우측엔 경허, 운봉 스님, 좌측엔 혜월, 향곡스님의 초상이 배치돼 있다
산호당

묘관음사를 창건하고 중창한 승려 운봉과 향곡의 승탑이 모셔져 있는데, 승려 향곡과 성철은 불교정화운동을 하던 봉암사시절부터 절친한 사이였다. 이 같은 사실은 두 분 스님과 절친한 사이였던 청담의 딸인 묘엄이 쓴 책 <회색 고무신>에 잘 소개돼 있다. 이런 인연으로 성철은 묘관음사 길상선원에 머물면서 생식을 하고 장좌불와(長坐不臥)로 동안거(冬安居)를 하였다고 한다. 경내에 있는 ‘탁마정(琢磨井)’이라는 샘은 승려 향곡과 성철의 인연이 깊은 우물로 임제종의 종찰 답게 수행과 관련된 일화를 가지고 있다.

▲대웅전의 삼존불▼
삼성각, 수도꼭지쪽 맷돌위에서 점심끼니를 때우는데 어느 보살님의 침입(?)으로 황당무제

두 스님이 수행을 하다가 더욱더 깊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한 스님이 다른 스님의 목덜미를 잡고 우물 속에 머리를 밀어넣어 죽음의 직전까지 가는, 극한의 상황을 연출하면서 깨달음을 얻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두 스님의 수행이 얼마나 치열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일화이다. 죽음의 순간에 성불한 고승도 있었던가 보다. 하긴 생사의 경지를 초월한 스님이라야 생불이라 했던가? 그 탁마정에 덮개를 씌어 놔 아쉬웠다. 탁마정 언덕에 왕대나무 군락이 볼만하고 죽순이 우후죽순 같다. 스님들은 죽순나물 안 잡수는가?

나는 사찰 맨 꼭대기 삼성각 옆 맷돌토방을 자리삼아 늦은 점심끼니를 때웠다. 찰떡과 과일과 육포였는데 식탐삼매경에 누군가가 귀신처럼 소리도 없이 나타나 경악 황당했다. 따님을 동반한 보살님도 미안해 몸을 뒤틀었다. 반대편 쪽문이 있는데 하필 내가 있는 잠긴 문을 열려고 왔던가? 한참 후 자릴 털고 내려오며 살피니 모녀는 절(拜) 삼매경이었다. 배(拜)삼매경이든 식(食)삼매경이든 몰아경은 선(禪)의 경지가 아닌가! 월내역을 향한다. 월내역도 달랑 덩치 큰 역사 하나뿐이다. 담에 장안사 탐방길에 다시 찾아오겠다고 약속했다.       2024. 04. 28

대웅전 마당은 초파일 봉축행사준비가 한참이었다
동백나무 숲
우아한 야자수(종려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 직전이다
젊은시절 향곡, 성철스님은 절친한 도반(道伴)으로 열공(熱功)하면서 (깨달은 바를)일러보라며 경내의 우물(깊이 6m)에 머리를 잡아 처넣는 메다꽂이 몸싸움도 했단다. 서로의 공부를 탁마한 샘터를 훗날 탁마정(琢磨井)이라 했다.

"탁마라 함은 옥 따위를 갈고 닦는 일 또는 수행하며 학문, 기예, 정신 따위를 향상시키는 행위나 과정을 일컫는 말이다. 향곡, 성철 두 분 스님께서 젊은날 이곳에서 수행하실 때 더욱 더 깊고 세밀한 깨달음의 세계를 체험코자 한 스님께서 다른 스님의 목덜미를 잡고 우물 물 속으로 머리를 처넣고 올려 주지 않아 생명이 극한 상황에 이르게 하여 한마디 이르도록 하여 공부를 지어나가셨는데, 뒷날 두 분 스님은 차별삼매를 낱낱이 점검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사의 반열에 오르셨다. 복원은 수행에 뜻을 둔 후학이라면 능히 탁마정을 봄으로 회심하여 자기자신의 수행 정도를 다시 점검하는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 믿고 삼락 이근창 거사의 발원과 혜경 이병교 거사의 감리가 큰 힘이 되어 이루어졌다. 이 글을 읽는 이여! 마땅히 두 분 스님의 처절했던 그 때의 심경을 한번쯤 헤아려 봄이 어떠할는지!"       <탁마정 안내문>에서 발췌

▲길상선원입구의 대나무숲 터널, 죽순이 한창인데~! 스님들은 죽순나물반찬 안 잡수나?▼
샤가
길상선원
오죽
담쟁이넝쿨이 주인공인 어느 폐가
▲고리원자력발전소 원경▼
돌머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