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사 - 반딧불이 숲길 - 백련암 - 척판암
신록의 5월이 문 열자마자 나는 장안사(長安寺)를 찾아들었다. 열차와 버스로 장안사입구에 내린 나는 장안천 따라 십리길 트레킹에 나섰다. 짙푸른 산골짝을 어르며 흐르는 물살의 밀어(密語)는 나의 오감을 일깨운다. 참 오랜만에 체감하는 자연의 숨소리다. 내게 처녀지인 장안사골짝은 상류로 향할수록 음습하다. 그 물길의 은어(隱語)에 신경 쏟다보니 장안사입구도 지나쳤다. 어찌하다보니 숲길이 흐지부지 포도시 시늉만 있다. 저만치 뒤따르던 산님에게 묻자 여기는 반딧불이 생태숲길이고 이어지는 숲길은 모르겠단다.
대부분 여기서 돌아선다는데 나는 내친김에 숲길을 헤쳤다. 10여분 파고든 숲길이 냇물을 건너는 돌멩이 징검다리가 있어 건너 편 임도에 올라섰다. 포도(鋪道)를 타고 내려오자 반가운 관광객과 마주쳐 장안사를 묻자 한참을 내려가야 된단다. 의아하긴 했어도 홀로숲길이 흐뭇한 기분이었다. 완만한 내리막은 신났다. 울창한 수목이 터널을 이뤄서다. 장안사입구에 들어섰다. 넓은 주차장 뒤에 천왕문이 있어 아까 나는 건성으로 그냥 물길 따라 출렁다릴 건너 반딧불이동네로 들어섰던 거였다.
장안사는 석탄일 봉축행사 준비로 어수선하다. 천왕문 앞에 뜬금없는 해태가 마중을 나오더니 대웅전 마당엔 배불뚝이 포대화상이 넉살을 떨고 있는 게 여느 절과는 달랐다. 대웅전의 고색창연함이 장안사의 상징일 터다. 장안사는 부산의 동북단 불광산 자락에 673년(문무왕13년) 원효대사가 척판암(擲板庵)과 같이 창건한 절로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된 것을 1631년(인조8년) 의월대사가 중창하였다. 불광산(佛光山)은 팔기산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8개나 되는 봉우리를 올라야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아까 나를 유혹(?)하며 이끌었던 장안천(박지천)은 장안사(부산기념물 37)를 끼고도는 냇가다. 사천왕 왼쪽 옆구리 부도밭에서 시작한 원효스님 108계단숲길을 오르다가 그만 빠꾸했다. 왠지 그냥 척판암 산행에 올인 하고 싶었다. 시장기도 들어 어디 호젓한 곳에서 기갈도 때우고 말이다. 백련암 가는 길은 포장된 신작로다. 울창한 산림 속의 넓은 임도는 사람도 차도 없는 나 홀로 전세 낸 길 같았다. 늘푸른 활엽수와 소나무들의 위용도 사뭇 나를 위해 존재하나 싶었다. 뭔 짓을 하건 누구 눈치 볼 것 없는 적요한 수목공화국이다.
백련암은 언덕 빼기에 단촐 하게 있는데 입구에서 얼쩡대는 누렁이가 주지인가 싶게 경내는 적막했다. 얼른 일별하고 아래 언덕바위에 엉덩이 걸치고 늦은 점심을 했다. 장안사를 떠나 한 시간여 동안 사람그림자도 못 봤다. 아니다 아까 승용차 한 대가 백련암옆 포장길로 들어갔었다. 백련사입구에 서어나무에 기대선 척판암 이정표가 있었다. 걸어서15분 소요라는데 얼른 봐도 상당히 깔크막이다. 좀전 승용차가 올라간 임도도 척판암 푯말이 있는데 나는 부러 깔끄막길을 택했다. 그 선택은 탁월했다.
빡센 깔끄막 오름길에서 힘들어 헉헉댄 건 펼쳐지는 진귀한 수목들의 포퍼먼스에 비할 바가 못 됐다. 서어,느티,참나무 등등 고목들이 버텨온 세월의 풍상이 그렇게 기기묘묘하게 조화를 일궈 숲의 별천지를 조성해서다. 몇 십 여년 산행 중에 이처럼 나를 흥분 내지 감탄시킨 활엽고목의 세계는 없었지 싶었다. 게다가 나 홀로 개판 쳐도 된다. 빡센 갈지자 산 오름길은 척판암에 대한 기대치를 한껏 부풀리는 거였다. 척판암은 빡센 돌계단을 내려보는 옹색한 사천왕(?)이 한쪽 문을 열고 나를 맞이한다.
절터라고 할 수도 없는 경내를 빠져나와 갈지자 계단을 오르고 올라 단애에 붙들어 맨 산신각까지 어디 한군데 편안하게 안좌(安坐)한 곳이 없어보였다. 원효스님은 어째 이곳에 정좌를 했을꼬? 파계(破戒)승이 속세와 절연하려 산꼭대기 절벽에 은신했을까? 스님은 중국 종남산 운제사 대웅전의 비극을 신통예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산사태로 태화사 대중 1000명의 목숨이 목에 가시처럼 걸려서 이 벼랑 끝 암자를 떠날 수가 없었을 테다. 활불(活佛)의 궁극 점은 중생의 제도와 오도(悟道)에 이르게 하는 방도일 테다.
불광산 척판암(擲板庵)은 673년 원효대사가 장안사와 함께 창건했다. 스님이 척판암에 머물면서 대운산 정상 큰바위에서 구도를 할 때 상서롭지 못한 기운이 감돌아 도통한 즉은 중국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 대웅전이 장마로 무너질 찰나였다. 그 아래 태화사(泰和寺)에서 공부하는 1,000명의 승려가 산사태로 매몰될 운명에 처한 것을 알고, ‘효척판이구중(曉擲板而救衆;판자를 던져 대중을 구한다)’이라고 쓴 큰 판자를 하늘로 날려 보내어 태화사 마당에 이르게 하였다,
법당에서 공부 중이던 대중들이 태화사 처마 끝에 이상한 발광체가 떠있자 놀래서 모두 나와 붙잡으려는 순간 잡힐 듯한 물체가 절 밖으로 십리쯤 달아났다. 따라가서 가까스로 붙잡자 갑자기 천둥소릴 내며 땅에 떨어진 게 판자조각 이였다. 그 판자를 갖고 절에 왔을 땐 뒷산이 무너지고 사찰은 이미 매몰됐었다. 이에 1천명의 승려와 대중들이 원효스님의 혜안과 예지에 감동하여 이역만리 길 원효스님을 찾아와서 가르침을 받게 된다. 스님은 장안사가 비좁아 양산의 원적산(원효산,적성산,정족산)으로 그들을 인도하자 산령각의 신이 마중을 나왔었다.
내원사(內院寺) 일주문 옆의 산령각(山靈閣)이다. 산령각 옆의 노송은 원효스님이 짚고 온 지팡이를 산령각 앞에 꽂은 것이다. 원효는 내원사계곡에 대둔사(大芚寺)와 89개 암자를 세워 988명의 대중을 안주시켜 모두 오도(悟道)케 하여 천성산(千聖山)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천성산 억새평원을 화엄벌이라 하는데 원효스님이 화엄경을 설법한 장소다. 그 억새평원은 철쭉동산이 되어 산님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판자를 날려 대중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은 원효의 명성이 중국까지 회자됐음을 상징하는 일화로 당고승전(唐高僧傳)에 기록됐다.
이 때의 이적(異蹟)을 기리기 위해 절 이름을 척판암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고, 1938년에 경허(擎虛)가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산신각에서 중년부부가 치성을 드리고 있었다. 이 벼랑 끝을 오르는 일심만으로도 기도하는 마음은 충일했을 터~! 척판암 앞 벼랑에 오래된 귀목 한 그루가 싱싱한 가지를 하늘로 치솟고 있다. 파란하늘에 하얀 구름이 유유한데 스님은 저 구름 속으로 ‘효척판이구중’판자를 띄웠을 테다. 원효스님은 당대에 누구도 주저했던 실사구시(實事求是)를 구현한 활불(活佛)이었다. 하루 종일 숲길을 헤친 홀로산행은 아까 산신각의 부부의 기도를 알 듯 싶었다. 2024. 05.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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